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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마이산에 올라 인류평화를 꿈꾸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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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09:48  /   조회6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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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스님 ❶   

 

스님의 법명은 월탄月誕(1936〜2022)이며, 법호는 미룡彌龍, 속명은 유찬수이다. 생애사 구술 요청에 월탄스님은 흔쾌히 응해 주셨다. 구술 당시 2010년도이다. 영상기록을 활용하는 시대, 이것을 이해한 스님은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스님은 자신의 출가 인연을 두고 이전의 유년기와 승가생활에 대한 기억들을 상세하게 회고하셨다. 

 

불교정화 과정에서 벌어진 각종 에피소드를 현실감 있게 회상하셨다. 특히 6비구의 대법원 할복 사건의 진행 과정과 그 후의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구술하셨다. 그리고 미륵불의 하생을 희구하고 용화세계를 구현하려는 스님의 서원과 정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구술이지만 스님의 용어 선택과 맥락 구성이 매끄러워 전달력이 높았다. 월탄스님의 유년기 리더십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는 과정들을 본 연재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완주군에서 출생하다

 

▶ 스님, 출생지와 부모님과 형제분에 대해 여쭈어보겠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저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음력 7월 15일 이 세상에 태어났답니다. 호적 기록이 한 해 늦어졌습니다.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라는 곳입니다. 아버지 유재옥 님과 어머니 이복순 님의 슬하에서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고장도 농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서면 반교리는 한 120에서 130호 되는 아주 큰 마을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논을 몇 마지기 가지고 있고, 밥은 그런대로 굶지 않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진 1. 미룡당 월탄대종사 진영.

 

옛날에는 국민학교였지요.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그러지요. 이서면 상개리에 있는 이서초등학교(1923년 이서공립보통학교로 개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전주동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역사가 최고로 깊은 지금 아마 금년(2010)에 100주년(1910년 공립 전주농림학교 설립)이라고 그럽디다. 그때는 농림중학교였지요. 농림중학교로 해서 나중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어(1951) 전주농림고등학교라고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저가 아마 45회인지 그렇게 입학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 다닐 때 저 혼자만 다녔습니다. 100여 호 되는데, 생활이 열악한 것도 있지만 교육에 대해 부모님들이 큰 관심이 없었어요. 다만 저희 부친께서는 달랐습니다. 저희 부친의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군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가 버들 유씨[柳氏] 종가에서 우리 아버님을 장손으로 양자로 들이셨답니다. 그런데 양자로 오시기 전 그 집안이 넉넉하지를 못하신 거 같습니다. 아버님은 선비신데 양자 오셔서 농사를 지었지만 철저하신 어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 지내고 시제 모실 때 아버님이 도맡아서 지방을 쓰거나 축문을 쓰셨습니다. 그런 선비 농부였습니다. 슬하에서 나는 두 형님을 모시고 두 누나를 모시고 밑에 남동생 하나 이렇게 해서 가족이 살았습니다. 형제들도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저 혼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분리되면서 제가 제2회로 입학했습니다.

 

유년 시절의 추억

 

내가 봐도 성적은 별로이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축구선수를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는 전라북도에서 우승을 한 번 했고, 고등학교 다니면서 또 축구부장을 했는데 한 번도 우승을 못했어요. 하하하. 그런데 축구를 하면서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초로 태권도가 들어왔어요. 한 번도 축구 우승을 못하니까 나는 “개인 운동을 해야지. 단체운동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그랬어요. 태권도를 1학년 2학기 때부터 해서 공인 5단입니다. 이 태권도 계통에는 여러 종이 있었습니다. 청도관, 지도관, 또 창무관 뭐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어요. 우리는 지도관 계통인데 서울에 가면 한국체육관이 있습니다. 한국체육관 전주지부입니다.

 

사진 2. 완주군 이서면 상개리 이서초등학교.

 

이 무술은 옛날 중국에 달마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지혜 지智 자, 길 도道 자 지도관智道館인데 실제로는 공수도空手道라고 그럽니다. 빈손으로 무술을 연마한다고 해요. 옛날에 중국에서 스님들이 농사를 짓는데 도둑놈들이 와서 농산물을 도둑질해 가도 승려들이 막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때는 달마스님이 어떤 어른인지도 몰랐지. 그 달마스님이 공수도 즉 빈손으로 도둑들을 막기 위해서 무술을 한 것인데, 바로 이 공수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불교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계셨는데 절에 다니신 거 같아요. 할머니가 절에 갔다가 제사 지내거나 불공하고 오시면 밤, 대추, 떡 몇 쪼가리를 싸 와요. 그걸 갖다주시는 할머니도 아마 내가 열 몇 살 정도 때 돌아가셨어요. 불교라는 것은 모르고 다만 할머니가 갖다주는 사탕과 떡 그것을 얻어먹은 걸로 아 절에는 그런 걸 주는가 보다, 그런 정도였지요.

 

▶ 읽으신 책 중에 기억에 남은 것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플루타크 영웅전』을 좋아해서 그걸 많이 봤고 그중에 우리 한국에 『소년 김유신전』이 있습니다. 또 『강감찬전』과 『이충무공전』 이런 위인전을 중학교 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감명이 깊은 것이 『소년 김유신전』인데, 그것이 나를 승려로 만든 그 어떤 계기가 된 거 같아요. 원래 김유신 어머니가 만명부인이거든요. 그리고 아버지는 서현이었습니다. 이 분은 진천,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은 그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각지대인 국경선입니다.

 

사진 3. 진천 김유신 탄생지.

 

김유신이 바로 그 진천에서 나셨거든요. 부친 김서현이 일선사령관으로 계시고 김유신은 경주에 사는데 항상 무술을 닦고 오다가 천관이라는 기생이 운영하는 술집에 가곤 했어요. 거기서 술을 먹고 유희를 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니 만명부인이 “너가 이렇게 방탕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하고 질책합니다. 소년 김유신이 꾸중을 듣고는 “다시는 안 가겠습니다.” 하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말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졸음이 왔어요. 그런데 말은 가던 대로 기생집으로 갔단 말이요. 기생집에 안 가기로 어머니와 약속했는데, “주인의 마음도 모르는 것이 무슨 명마냐?” 하고 말의 목을 칩니다. 거기서 아주 거기서 내가 대단한 감명을 받아요.

 

그 후 김유신이 천지신령의 힘을 입어야겠다고 3일 밤낮을 선도산仙桃山(영천의 중악석굴이라고도 함) 동굴에서 기도를 합니다. 거기서 그 신령이 나타나요. 그 신령이 나타나 삼척검三尺劍을 주면서 “너가 삼국을 통일하는 장군이 될 것이다.” 그래요. 거기서 선몽을 받아 칼을 받고 돌아옵니다. 나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원하는 것이 있었어요. 내가 약간 돈키호테적인 성격의 사람입니다. 나도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인류가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김유신은 천도산에서 산신령한테 검을 받는 계시를 받아 삼국통일을 하는데, 나도 천지신명께 힘 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답게 한번 멋지게 나폴레옹과 같이, 징기스칸 또 알렉산더와 같이 멋진 인생을 장군이 돼서 살아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인류평화를 위한 힘을 얻겠다는 각오 

 

“그러려면은 어떻게 할까? 천지신명께 힘을 빌어야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진안으로 갑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진안에 살고 있습니다. 전진택이라고 아버지가 약방도 하고 그쪽에서 좀 부유한 친구인데 이전에 거기를 몇 번 갔어요. 진안에 마이산이 있습니다. 말귀와 같이 두 봉우리가 쭈욱 서 있지요. 솟금산이라고도 하는데, 숫솟금산이 있고, 암솟금산이 있어요. 암솟금산에는 누구라도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사진 4. 전주동중학교.

 

그런데 숫솟금산은 너무 가팔라서 못 올라가요. “아하, 내가 그 명(승)지에서 천지신명께 기도해야 되겠다. 내가 원하는 인류평화와 평등 또 인류동체의 안락을 위해 내가 힘을 받아야 되겠다.” 해서 2학년 여름방학 때 숫솟금산에 몰래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가보니까 뭐 못 올라간다고 하는데 탑이 있어요. 마이산에 가면 탑이 아주 많습니다. 이갑용 할아버지가 쌓았다고 그래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그분을 한 번 만나 뵈었습니다. 그분이 또 무슨 관상을 잘 본다고 그래서 친구가 같이 가자 그래서 한 번 갔었어요. 허허.

 

▶ 실제 마이산을 오르셨군요?

 

그분이 나막신을 신고 숫솟금산에 올라가서 탑을 쌓았다고 그래요. 그냥 올라가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그래서 ‘신비의 산’이다 그래서 내가 도전을 했죠. 그 산을 그냥 올라갔어요. 올라가는 데는 별로 힘들지 않더라고요.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서 3일 밤낮으로 “천지신명이시여, 나한테 힘을 좀 주시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좁게 살아서 쓰겠습니까? 인류를 평화롭게 할 수 있고, 평등하게 할 수 있고, 인류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힘을 나한테 좀 주쇼.” 하고 하늘에 빌었어요.

 

사진 5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

 

먹지도 못하고 내려오지도 못하고요. 그런데 천지신명도 나타나지 않고 배는 고프고. “야, 이게 아니다.” 그러면서 살살 꾀가 나더라고요. 내가 “야호!” 하고 불렀더니, 그 전주공업고등학교 다니는 친구가 나타나서 나인지 모르고서 “너는 이놈아, 너희 어머니 아버지도 없느냐. 거기 올라가면 죽는 덴데 왜 올라갔느냐! 그 신성한 산을 버려서야 되겠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그래요. 나도 거기 있어봤자 안 될 것 같아서 고등학교 모자를 거기다 딱 놓아두고 돌 세 개를 가져왔어요.

 

화엄사로 들어가다 

 

천신만고 끝에 산을 내려왔습니다. 완전히 바위가 아니기 때문에 먼지가 쌓여 있고, 풀뿌리나 조그마한 나무가 자라요. 그걸 잘못 잡으면 수십 길 밑으로 떨어져요. 내려와서 보니 내가 아는 놈이었어요. 그래서 소문이 쫙 났어요. 그 친구 전진택이 “백마클럽의 유찬수가 말이야, 마이산에 올라갔어. 그러고도 죽지 않고 내려왔어.” 그랬어요. 내 속명이 유찬수예요. 백마클럽은 우리 농림학교 클럽입니다. 전라북도에 쫙~ 소문이 났어요. 돌을 세 개 가지고 와서 거기다가 뭐라고 썼느냐 하면, ‘노력’, ‘인내’, ‘성공’이라고 써 놓았어요. 성공을 하려면 참아내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아침마다 그걸 세 번씩 읽어요. 또 저녁에 자기 전에도 세 번씩 읽었어요.

 

그때 일제말기와 6·25사변을 지나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고등학교 중학교에 다녔거든요. 그 친구들이 담배 피우고, 술 먹고, 화투치기하는 노름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야, 니들이 성공할라면 술을 안 먹어야 되고, 여학생들 손목을 안 잡아야 되고, 또 이런 더러운 오락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제가 백마클럽 2학년 올라가서 클럽장이 됐어요. 그 친구들이 모여 술 먹고, 담배 피고 또 화투치기하다가 내가 딱 나타나면 그것들을 그냥 싹 없애 버리고 아주 깨끗한 척하고 있어요. 제가 운동하고 또 태권도를 하다 보니까 단수가 높고 그런데 카리스마라고 할까 그런 게 좀 있었습니다.

 

사진 6. 진안 마이산.

 

그때 당시에는 주먹패들은 여관도 공짜, 식당도 공짜, 기차도 공짜 또 버스도 공짜던 때였어요. 우리 백마클럽은 전주, 이리, 군산 쪽에서 다 무사통과예요. 그럴 정도로 우리들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육사를 가려고 했는데 떨어졌어요. 못 갔지요.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다가 태권도 도장을 하나 조그마하게 차렸습니다. 도장을 만들어서 거기 관장 노릇을 한 1년쯤 했어요.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하고, ‘부모님 은혜를 갚고 내가 원하는 세계를 가려면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된다.’ 그래서 1957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화엄사에 수학여행 갔었는데, 그 화엄사에서 하숙하기로 결정했어요. 차에다가 책 한 보따리 실어 가지고 절에 들어갔지요. 

 

바로잡습니다.

월간 『고경』 136호 본란에서 묘엄스님의 구술을 소개하면서 통도사 경봉스님의 사진을 게재하였습니다. 하지만 묘엄스님께서 전강받은 경봉스님은 동학사 11대 강주를 지내셨던 경봉 용국스님이었기에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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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obudd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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