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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정토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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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4:01  /   조회1,00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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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의 불교 이야기 10    

 

한국에는 정토종淨土宗이라는 종파가 따로 없지만 정토신앙은 아주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토종은 『정토경淨土經』을 믿음의 근거로 삼는 종파입니다.  

 

역사적 배경

 

정토신앙의 연원을 따지면 3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4, 5세기 혜원慧遠(335~417) 같은 위대한 인물이 지극 정성으로 받들던 신앙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로서의 정토종을 시작한 이는 담란曇鸞(476~542)이라고 봅니다. 그 후 여러 지도자가 나타나 염주 사용을 도입하기도 하고 염불 수행을 널리 펴기도 하고 극락정토를 그린 그림을 사용하여 민중을 교화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1. 중국 동진 시대의 고승 여산혜원廬山慧遠.

 

한국에서도 원효 대사가 화엄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정토신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백성들에게 널리 펴는 데 힘썼습니다. 일본의 경우 신라승 혜인慧印이 640년 일왕 앞에서 처음으로 『정토경』을 강講한 이후 정토신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일본 불교 신도 절대 다수가 정토종에 속합니다. 그중에서도 신란親鸞(1173~1262)에 의해 개혁된 조도신슈(淨土眞宗)가 가장 우세합니다. 신란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염불 자체도 실행하기 힘들다고 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원력에 절대적으로 의탁하는 절대 신앙만을 강조했습니다.

 

사진 2. 일본 정토종의 개조 신란親鸞. 사진: 서본원사.

 

그는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주장한 기독교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여러 면으로 닮았는데, 그도 루터처럼 스스로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결혼 생활을 실천하고 다른 승려들에게도 결혼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정토신앙의 근거

 

정토 삼부경의 하나인 『무량수경』에 의하면, 옛날 어느 왕이 출가하여 다르마카라(法藏)라고 하는 비구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장 비구는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이 되면 우주 서쪽에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세우고 거기에 상주하는 부처님이 되기로 작정합니다.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원誓願을 해야 하는데, 그는 48가지 혹은 46가지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서원 중 제18번이 가장 중요한데, 거기에 의하면 자기가 서방정토 극락極樂 세계의 부처님이 되면 누구든 절대적인 믿음으로 자기를 생각[念]하면 이들을 모두 그곳 정토에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진 3. 아미타삼존도(고려 후기, 비단에 채색), 리움미술관 소장.

 

결국 법장 비구승은 긴 보살의 길을 완성해서 정토를 세우고 그것을 관장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Amitābha 혹은 Amitāyus인데, 각각 ‘무한한 빛’, ‘무한한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고쳐서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라고 했습니다. 빛은 지혜를, 목숨은 자비를 상징하므로 지혜와 자비가 온 우주에 가득하게 하는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이제 아미타불을 믿는 신도들의 할 일은 그가 한 ‘서원의 힘[願力]’을 믿고 열심히 그를 마음에 새기든가 그를 시각화하는 일입니다. 이런 수행법들도 중요하지만 중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지극 정성으로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을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삼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그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거나 부처님과 하나가 되고, 죽어서는 정토에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복음14: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극락정토란 어떤 곳입니까? 정토란 향내 나는 나무와 연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되었으며, 거기 흐르는 강물에는 향내와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그 물에서 놀 때 물의 온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어딜 가나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고, 자비와 기쁨과 인내와 관용과 평화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히 이름 그대로 ‘극락極樂’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사진 4. 극락세계를 표현한 관경觀經 만다라曼茶羅(일본 16c, 목판에 채색). 사진: 한선학.

 

정토의 아미타불은 양옆으로 관세음觀世音 보살과 대세지大勢至 보살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를 정토 삼존三尊이라고 합니다. 이 중 특히 관세음보살은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어주고 도와주겠다고 해서 본래의 얼굴에 열 방향을 다 볼 수 있는 열 개의 얼굴을 합해 열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11면 관음’ 혹은 ‘천수관음’이라고 합니다. 일반 신도들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는 대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함께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무 관세음보살’이라고 하여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부르기도 합니다.

 

비교종교학적 관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정토신앙에서 하는 염불과 비슷한 것이 기독교 전통 속에도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동유럽과 러시아에 퍼져 있는 동방정교 전통에서 실천되고 있는 ‘예수의 기도(Jesus’ Prayer)’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5:17)고 권고한 바가 있습니다. 동방정교에서는 그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말을 쉬지 말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3천 번, 좀 지나서는 6천 번, 이어서 만 2천 번, 그러다가는 세지 않고도 깨어 있든 자고 있든 심장 박동과 함께 저절로 되풀이되는 기도입니다. 어느 러시아 순례자가 이를 실천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순례자는 이런 기도의 결과, 무한한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땅에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공중을 떠다니는 느낌을 받고, 또 그가 만나는 사람, 그가 대하는 짐승,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일체감을 느끼며 이 모두가 사랑스럽게 보인다고도 고백합니다.(주1)

 

사진 5. 그리스 북부의 데살로니가에 있는 오래된 교회 유적.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기독교의 경우 보통 천국에 간다고 하면 거기가 최종 목적지로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믿지만, 정토신앙에서는 극락왕생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에서의 궁극 목표는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반에 들어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인데, 극락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므로 궁극 목적을 이룬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토는 모든 조건이 좋아 조만간 열반에 이르는 것이 보장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열반이라고 하는 소멸 상태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정토신앙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신도들은 극락왕생 자체를 궁극 목표처럼 여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힌두교에는 구원(목샤)에 이르는 길이 대략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직관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의 길’, 둘째는 어느 신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경배하는 ‘신애信愛의 길’, 셋째는 계율이나 도덕규범을 잘 지키고 이웃에 선행을 베푸는 ‘행동의 길’입니다. 정토신앙은 기본적으로 둘째 신애의 길이라고 할 수 있고, 기독교도 넓은 의미에서 정토신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섬기는 신애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독교는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강조하지만 불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종교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교에 물론 선불교처럼 ‘자력自力’적인 면이 강한 신앙체계도 있지만,(주2) 정토신앙처럼 ‘타력他力’적 신앙형태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가면서

 

일반적으로 종교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럿 있다고 말합니다. 힌두교에서처럼 지혜의 길, 신애의 길, 행위의 길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불교에서처럼 자력불교와 타력불교 혹은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가 있다고도 하고, 기독교에서처럼 주로 신의 은혜나 예수의 대속이라는 타력을 강조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종교사를 통해서 보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정토신앙과 같은 ‘믿음’의 길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앙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은 정토신앙뿐 아니라 모든 종교적 수행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지금의 ‘자기’를 잊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정토신앙을 신봉하는 분들도 정토에 왕생할 것만 생각하는 대신 지금의 자기를 잊고 새사람이 되는 데 더욱 힘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각주>

(주1) 오강남 엮어 옮김, 『예수의 기도』(대한기독교서회, 2003) 참조.

(주2) 선불교도 완전히 타력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안에서 부리로 껍데기를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부리로 쪼아주는 것을 ‘탁’이라고 하는데, 선불교에서 깨침에 이르는 것도 이처럼 줄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여 ‘줄탁동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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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서울대학교 종교학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화엄 법계연기에 대한 연구’로 Ph.D. 학위취득.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저서로는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도덕경』, 『장자』, 『세계종교 둘러보기』,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종교란 무엇인가』, 『예수는 없다』,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오강남의 생각』 등. 번역서로는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예수의 기도』, 『예언자』 등.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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