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서유기 ]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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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0:57 / 조회175회 / 댓글0건본문
지난 글에서 천신들도 어쩌지 못하는 손오공을 이랑진군이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가 갖춘 제3의 눈과 하늘에서 비추는 전면적 관찰의 눈[照妖鏡]의 힘에 의해서였다. 당시 관찰의 눈앞에 달아날 곳이 없게 된 손오공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안긴 것이 있는데 바로 태상노군(노자)의 금강 팔찌[金鋼琢]였다. 이번 이야기는 금강 팔찌로부터 시작된다.
태상노군의 금강 팔찌
이랑진군과 손오공의 전투를 지켜보던 태상노군이 왼손에 차고 있던 금강 팔찌를 손오공의 머리에 던져 그를 쓰러뜨린다. 이에 손오공은 천상으로 압송된다. 이랑진군의 관찰의 눈만큼이나 금강 팔찌의 공이 큰 것이다. 손오공을 쓰러뜨린 금강 팔찌는 『서유기』 전편을 통틀어 최고의 무기로 꼽히기도 한다. 원래 그것은 노자가 함곡관을 넘어갈 때 탔던 푸른 소의 코뚜레였는데 이때는 팔찌로 차고 있었다. 태상노군은 관세음보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무기는 금강 팔찌[金鋼琢]라고도 하고, 금강 올가미[金剛套]라고도 합니다. 왕년에 제가 함곡관을 지나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될 때 그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중국의 도교에서 창안한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을 의식한 표현이다. 중국의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교가 원류이고 불교가 아류라는 것이 노자화호설의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무수하게 생산되어 온 중국 원조설 중 최초의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노자가 성불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므로 그것은 수행의 핵심이 되는 무엇이다. 그 이름과 기능을 통해 볼 때 그것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를 동시에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것이 손오공의 정수리를 때려 넘어뜨렸다는 점이나 금강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그것은 금강의 지혜를 상징한다. 이때 금강은 번개의 다른 이름이다. 다음으로 그 이름이 금강이고 왼손에 끼는 팔찌라는 점에서 그것은 불생불멸의 본질을 상징한다. 이때의 금강은 견고한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 그것이 왼쪽 손에 낀 팔찌라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의 문화에서 왼손은 원리를 상징하고 오른손은 실천을 상징한다. 손오공의 집착에 대한 타격이 원리적 차원에서 일어났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금강 팔찌 혹은 금강 올가미의 형태와 이름, 노자가 성불할 때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은 공空을 상징한다. 팔찌나 올가미의 동그란 빈 공간이 공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전매특허인 무無, 혹은 무위無爲는 불교의 공과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초기의 역경사들이 공을 무無로 번역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금강 팔찌는 번개, 원리, 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셋은 또 묘하게 하나로 통일되는 관계에 있다. 번개처럼 형상과 이름을 무너뜨려 그 본질적 실체가 따로 없다는 공의 도리를 드러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형상의 숨바꼭질 놀이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금강불괴의 손오공
태상노군의 팔찌에 쓰러진 손오공이 하늘로 압송되자 옥황상제는 그에게 참수형을 명한다. 그러나 손오공의 몸은 금강불괴라서 어떤 무기로도 상처를 내지 못한다. 원래 손오공의 잘못은 유위적 공부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였다는 데 있다. 이제 자아를 내려놓아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하늘의 형벌은 주희가 제창한 바, “하늘의 이치를 남기고[存天理], 인간적 욕망을 소멸시킨다[去人欲].”는 지침을 따른다. 여기에 동원되는 천신들의 칼과 도끼와 번개와 불은 자아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원숭이가 자아의식의 화신이라면 천신들의 형벌은 못된 마음을 없애려는 도덕적 단죄와 인위적 수행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그림자를 지우려는 일과 같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에 태상노군이 나선다.
“저 원숭이는 반도복숭아를 먹고, 서왕모의 술을 마시고, 저의 단약을 훔쳐먹었습니다. 다섯 단지에 넣어둔 단약을 막 만든 것이나 숙성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뱃속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런 뒤 삼매의 불로 그것들을 한덩어리로 녹여 금강불괴의 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없앨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끌고 가서 팔괘로에 넣고 불기운을 조절해 가며 단련하여 선단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저 몸은 저절로 없어질 겁니다.”
손오공은 자아를 키우는 보약들을 넘치게 먹었다. 반도복숭아에, 천상의 술에, 태상노군의 단약까지, 그 수행의 중간 결과를 마음껏 향유한 것이다. 수행의 과정에 머물러 그 경계를 탐닉하고 향유하는 것을 사이비라 한다. 손오공이 요마로 취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많은 수행자들이 손오공처럼 수행의 중간 경계에 스스로 도취한다. 장좌불와를 자랑하고, 만일염불을 과시하고, 삼매를 자처하고, 팔만대장경의 지식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아가 강해져서 ‘나는 이런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산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이렇게 유위적 공부로 키운 자아를 유위적 방법으로는 녹일 수 없다. 그래서 천신들의 어떠한 노력도 손오공을 없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태상노군은 그 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바로 무위자연의 길, 팔괘로의 연단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답이 되지 못한다.
태상노군의 팔괘로, 무위자연의 길
“태상노군은 손오공을 팔괘로에 가두고 장장 7×7=49일 동안 불의 단련을 시작한다. 손오공은 팔괘로의 바람이 부는 자리에 앉아 불길을 피한다. 이때 휘몰아치는 연기만은 피할 수 없어서 그것에 눈을 상한다. 손오공이 ‘붉은 눈에 황금빛 눈동자[火眼金睛]’를 갖게 된 사연이다. 49일이 지나 팔괘로를 열자 손오공이 뛰쳐나와 연단실을 엎어버린다. 그리고는 태상노군마저 내동댕이치고 달아난다. 여의봉을 휘두르는 손오공의 위세에 시간의 신(구요성관)과 공간의 신(사대천왕)들이 모두 숨어버리고 만다.”
태상노군의 팔괘로는 그(노자)의 특기인 일없이 저절로 되도록 맡겨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철학을 구현하는 현장이다. 원래 팔괘는 하늘, 땅, 천둥, 바람, 물, 불, 산, 연못의 다양한 자연현상을 상징한다. 이 다양한 현상을 팔괘로에서 융합하여 궁극의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태상노군의 뜻이다. “손오공의 몸을 녹여 선단을 단련해 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오공은 녹기는커녕 더 강화되어 나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팔괘로의 연단술은 유위에 상대되는 무위를 세워 보다 세련된 자아 집착을 키우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태상노군이 손오공에게 나뒹군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태상노군, 즉 노자는 도교에서 진리의 화신에 해당한다. 불교로 보자면 석가모니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지고의 존재가 일개 원숭이에게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도교에서는 팔괘로에서 만물을 녹여 만든 한 알의 선단을 궁극으로 본다.
또 도교의 관점에 의하면 개인적 존재를 유지하면서 궁극의 선단을 완성할 수 있다. 그것이 불사이다. 그러니까 팔괘로에서 뛰쳐나온 손오공은 도교적 입장에서 보면 불사의 몸을 이룬 궁극의 존재가 된다. 태상노군과 동격이 된 것이다. 얼마든지 태상노군을 넘어뜨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시간의 신과 공간의 신이 숨어버린 것도 이 때문이다. 주객이 사라진 절대적 하나의 자리에 시간과 공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의 하나를 찾는 놀이는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위에 자꾸 무엇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궁극의 하나를 설정하는 이 못된 버릇을 법집法執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소멸하지 않는 불사의 실체를 설정하는 일이고, 그것에 자아를 동일시하는 일이다. 최고의 아만이고 최고의 집착이다. 그래서 팔괘로에서 나온 손오공은 최고의 자리, 옥황상제의 옥좌를 넘보게 된다.
부처님의 손바닥과 손오공
무적이 된 손오공은 극대화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옥황상제의 옥좌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에 옥황상제는 석가여래에게 도움을 청한다. 석가여래가 현신하여 손오공에게 도력 시합을 제안한다.
“그러면 나와 시합을 해보자. 너의 모든 재주를 부려 내 오른 손바닥을 벗어나 봐라. 만약 벗어날 수 있다면 네가 이기는 것이다. 그러면 더 싸울 것 없이 옥황상제를 서방으로 모셔 가고 천궁을 너에게 양보하도록 하겠다.”
여래의 오른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으면 옥황상제의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손오공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눈 깜빡할 사이에 10만 8천 리를 가는 근두운이 있으므로 질 수 없는 시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아, 간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근두운을 타고 날아가는 손오공의 앞에 다섯 개의 살빛 기둥이 나타난다. 세상의 끝이 분명했다.
손오공은 그중 가장 높은 가운데 기둥에 표시를 한다. “제천대성이 여기 와서 놀고 가노라!” 그리고는 다시 첫 번째 기둥에 오줌을 갈겨 더 확실한 증거를 남긴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손오공에게 여래가 손바닥을 내민다. “머리를 숙여 여기를 보라!” 손오공은 여래의 손바닥을 보고 경악한다. 자신이 세상의 끝에서 만난 기둥에 써 놓았던 글씨가 여래의 가운데 손가락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엄지에서는 영역 표시로 남겨놓은 오줌 냄새가 진동했다.
부처님의 손바닥과 그 위에서 일어난 시합에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버무려져 있다. 우선 시합의 장소가 왜 여래의 오른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은 선가에서 본질과 현상의 불이적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다섯 손가락은 각자의 모양을 갖지만 결국 하나의 손바닥으로 돌아간다. 또 하나의 손바닥은 다섯 손가락으로 퍼져 나간다. 손바닥이 본질이라면 손가락은 현상이다. 이것을 모아 쥔 주먹과 펼친 손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른손일까? 앞에서 태상노군의 팔찌에 대해 살펴보면서 왼쪽 팔이 원리적 눈뜸의 차원을 가리킨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문화적 문법에 의한다면 석가모니의 오른손은 현실적 체험의 차원이 된다. 그러니까 손오공이 왼팔 팔찌의 충격을 통해 공의 원리에 눈떴다면 이제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현실적 체험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은 무엇인가? 가운뎃손가락에 표시를 했다는 것은 자신이 중도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손오공의 착각을 가리키는 장치다. “제천대성이 여기 와서 놀고 가노라.”고 했으므로 자아(제천대성)도 있고 대상(여기)도 있다. 상대되는 두 측면이 세워졌으므로 중도가 성립하지 못한다. 착각인 것이다. 게다가 엄지손가락에 오줌을 갈겼다. 그것은 자기를 최고로 여기는 자아의식의 발산을 가리킨다. 모든 자아의식의 발산은 이처럼 지린내 나는 오줌을 뿌리며 자기가 최고(엄지손가락)라고 외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것을 모르는 손오공은 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여래는 그 손을 오행산으로 만들어 손오공을 가둔다. 이로써 손오공은 둘이면서 하나인 불이의 세계를 체화하는 시간을 보내라는 숙제를 받게 된다. 여래는 산신에게 명하여 원숭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쇠구슬을 먹이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구리 녹인 물을 먹이도록 한다. 이제 원숭이는 주체적으로 할 일이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오는 인연을 받아들이는 일만 허락된 상황이다. 초근목피가 와도 받아들이고, 산해진미가 와도 받아들인다. 쇠구슬이 오면 그것을 씹고, 구리 국물이 오면 그것을 마시는 것이다. 손오공은 그렇게 오행산에 묶여 500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갔을 때 삼장이라는 인연을 만나게 된다. 본격적인 서천여행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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