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의료승과 매골승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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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12 월 [통권 제140호] / / 작성일24-12-05 11:07 / 조회160회 / 댓글0건본문
오늘날 ‘병원’이라는 용어는 사찰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건물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도선(596~667)이 찬술한 『관중창립계단도경關中創立戒壇圖經』에서 인도의 약기수원約祗樹園의 구조와 건물을 설명하면서 ‘병원’이라는 건물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약기수원의 중심 구역인 중원中院의 북쪽에 여섯 개의 원院이 있고, 그중 하나가 각종 의방醫方들을 보관하던 천하의방원天下醫方院이다. 또 중원의 서쪽에는 무상원無常院, 성인병원聖人病院, 불시병원佛示病院, 사천왕헌불식원四天王獻佛食院, 욕실원浴室院, 유측원流厠院 등 여섯 원이 있었다. 여기서 무상원, 성인병원, 불시병원이 의료와 관련된 건물이다. 인도 사찰의 한 구역이었던 병원이라는 치료 공간은 중국 사찰 구조 속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들의 의료활동과 한증소 운영
우리나라에서도 승려의 의료 활동이 불교 전래 초기부터 확인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인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 모례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마침 공주의 병이 위중하여 왕실의 근심이 되고 있었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향을 선물로 주고 갔는데, 그 사용법을 알지 못해 묵호자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묵호자가 병든 공주의 방에서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자 공주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했던 서희(943~998)가 병에 걸렸을 때 개경 개국사開國寺에 머무르며 치료하였고, 1152년(의종 6) 6월에는 역병에 걸린 자들에게 개국사에서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는 개국사가 병원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승려 가운데 의학 지식을 가진 경우도 있었는데, 원응국사 학일(1052~1144)은 그 비문에서 “사람들에게 질병이 있으면 그 귀천을 묻지 않고 모든 이를 구제하였으니, 그때마다 효험이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그가 질병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충렬왕 대에는 의승 천기天其가 등장한다.
공주가 병이 들자 염승익이 왕에게 아뢰어 승려 천기로 하여금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천기가 말하기를, “병이 낫지 않는다면 마땅히 불경과 불상을 모조리 태워버리겠다.”라 하고 가사를 찢어 공주를 덮고 종일토록 정성껏 노력했으나 그날 저녁 공주가 죽었다.
- 『고려사』, 열전36, 염승익
천기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공주가 사망하였지만, 천기의 질병 치료 능력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국가 구휼 기관에 의료승이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1421년(세종 3) 도성의 동소문과 서소문 밖에 활인원活人院을 두어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는데 승려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 대에 활동한 대사大師 탄선이 대표적인 승려이다.
서활인원 제조提調 한상덕이 건의하기를, “내년 봄에 성을 쌓을 군사가 많이 모이면 반드시 전염병이 돌 것입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초기에 도성을 쌓을 때 전염병이 크게 일어났을 때, 화엄종 승려 탄선이 전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였습니다. 지금 탄선이 경상도 신령에 있사오니, 역마를 보내서 불러들여 구호 받기를 원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년(1421) 12월 21일
도성都城의 동쪽 서쪽에 구료소救療所 네 곳을 설치하고, 혜민국 제조惠民局提調 한상덕韓尙德에게는 의원醫員 60명을 거느리고, 대사大師 탄선坦宣에게는 중 3백 명을 거느리고 군인들의 병들고 다친 사람을 구료救療하도록 명하였다.
- 『세종실록』 4년(1422) 1월 15일
태조 대 도성 축조 공사는 1396년 1~2월 및 8~9월에 진행되었다. 이때 전염병이 돌았고, 그 전염병을 치료하는 데 의승 탄선이 크게 공을 세웠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도성을 쌓을 때 지방에 있는 탄선을 불러들이자고 하였다. 제조 한상덕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이듬해에 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구료소救療所 네 곳을 설치하고, 탄선에게 승려 3백 명을 거느리고 병들고 다친 군사들을 치료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도적으로 국가 기관에 승려를 배치하여 병자를 치료하도록 한 곳으로 한증소汗蒸所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증승汗蒸僧이 있었다. 1423년(세종 5) 대사大師 명호明昊가 한증하는 욕탕浴湯을 만들어 병자를 치료할 것을 건의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고 일을 추진하다가 명호가 사망하면서 일이 중단되었는데, 1427년(세종 9)에 대선사大禪師 천우天祐와 을유乙乳가 다시 허락을 받아 한증소를 세웠다. 그리고 1429년(세종 11)에는 욕실이 너무 좁아서 대선사 일혜一惠 등이 시설을 늘리려 할 때 정부에서 쌀과 포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예조에서 동활인원東活人院의 보고에 따라 임금에게 아뢰기를, “예전에 지은 한증 목욕실汗蒸沐浴室은 너무 좁아서 남녀가 많이 모이게 되면 병을 치료하지 못할 사람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선사大禪師 일혜一惠 등이 신분의 높고 낮음과 남자 여자의 한증 목욕실을 구분하고자 하여 세 곳을 더 짓고 이내 석탕자石湯子를 설치하려고 하나 힘이 모자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풍저창의 쌀 1백 석과 전농시의 면포 1백 필을 빌려주어서 짓게 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1년(1429) 6월 27일
불교계가 한증소를 운영하며 병자를 치료하였으나 1445년(세종 27) 11월에 병자에게 효험이 없다는 이유로 폐지하였다. 의정부에서는 “동서 활인원이 이미 설치되어 질병을 치료하고 있고, 묵사墨寺는 마을 속에 있어서 승려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또 한증과 목욕이 질병에 특이한 효험이 없으니 폐지해야 한다.” 하였고, 세종이 그 건의를 수용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27년(1445) 11월 8일) 한증소가 있던 묵사의 위치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혜화문 밖 북쪽’이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성북동 별서別墅인 성락장城樂莊이나 그 인근에 있었던 것 같다.
무연고 시신을 묻고 천도하는 매골승
동·서 활인원에는 주인 없는 시신을 묻어주고 천도의식을 설행하는 승려인 매골승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 말 이달충은 당시 권력을 잡았던 신돈(?~1371)이 매골승 출신이라고 한 바 있다. 고려의 전통을 이어 조선에서도 동서의 활인원에 매골승을 각각 5명씩 두어 업무를 맡게 하였다.
예조에서 한성부와 함께 의논하여 매골승을 권면하는 사목事目을 임금께 올리기를, “예전에 정한 승려 10명의 수효가 적으니 지금 6명을 더 보충하여 동·서 활인원에 각기 8인씩 소속시켜, 한성 오부五部와 성밑의 10리里를 나누어 맡게 하고, 월료月料와 소금·장을 주고, 봄·가을 두 차례에 각기 면포 1필씩을 줄 것입니다. …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9월 1일
동서 활인원에 배치된 16명의 매골승으로도 부족하여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428년(세종 10)에는 각각 2명씩 증원하였다. 당시 매골승의 수요가 많아졌던 것은 전염병 등의 이유로 길거리에 시체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외 매골승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은 전쟁으로 길거리 시체가 많아졌을 때였다. 임진왜란 때에도 매골승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선조가) 명하기를, “듣건대 서울 안팎에 시체가 쌓여 있는데도 유사들이 거두어 묻지 못하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승려 가운데 해골 묻어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기도 했었다. 지금 얼어 죽은 시체가 노천에 뒹굴고 있는데도 거두어 묻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측은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전쟁으로 어지러운 중이라서 묻어줄 인력이 모자랄 것이기는 하지만 승려들을 모집한다면 이곳저곳의 시체와 해골을 모두 묻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중에 잘 묻어준 사람에게는 선과禪科를 주기도 하고 도첩度帖을 주기도 하겠다는 내용으로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 『선조실록』 26년(1593) 10월 2일
한양을 수복한 후에 돌아온 선조는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을 수습하기 위해 승려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모집된 매골승으로서 그 임무를 성실히 한 자에게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발급하던 선과를 지급하도록 한 것은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불교 승려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매골승이라는 표현은 이때 이후 『실록』에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승려들이 종종 동원되었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올해에 기근과 여역으로 사망한 자가 여기저기 쌓였습니다. 수레에 실어 내갔으나 멀리 묻을 수가 없어 도성 사방 십 리 내에 풀무덤이 널려 있습니다. 해골에 주인이 없고 끌어다 묻을 사람도 없습니다. 먼 곳으로 파서 옮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승인僧人 중에 혹 담당하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다면 불과 승인 2백여 명의 열흘치 일거리라 합니다. 이장할 만한 일가붙이가 있는 자는 표를 세우게 하고, 그 이외에 주인이 없는 시체에 대해서는 경기 지방의 승인 2백 명을 뽑아 모두 파 옮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재가하였다.
- 『현종개수실록』 12년(1671) 9월 12일
광해군 대부터 국가 기관에 소속된 매골승이 없어진 것 같다. 다만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일에 승려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위 기록에서 매골승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승려들이 매골의 일을 잘하였다는 인식은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국가 관리의 매골승은 없어졌지만 길거리 시신을 처리하기 위한 국가의 대책은 지속되었다.
(순조가) 명하기를, “따뜻한 봄이 돌아와 만물이 소생하는 때에 저 하소연할 곳 없는 백성들이 불행하게도 거듭 흉년을 만난 데다가 전염병까지 겹쳐서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잇따라 죽고 있다. 이것만도 매우 참혹하고 불쌍한데, 또 제때에 매장하지 못하여 시체와 해골이 도로에 낭자하니, 그야말로 평화를 깨뜨려 재앙을 초래한다고 할 만하다. 고요히 이 문제들을 생각하면 내 실로 부끄럽고 마음 아프다. 삼영문三營門의 장군들은 경조오부의 관원을 이끌고 각각 담당한 지역에 직접 가서 곳곳마다 시신을 찾아서 일일이 덮어 묻어주어서 허술히 하여 빠뜨렸다는 말이 없게 하라. 일을 마친 뒤에는 마땅히 따로 내시를 보내어 묘당(최고 행정기관)을 감찰할 것이니, 즉시 각 영문의 장군들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내일부터 거행토록 하고, 이 뜻을 진휼청賑恤廳과 경기 군영에도 잘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 『순조실록』 34년(1834) 1월 24일
위의 기록을 보면 연고가 없는 시신의 매장, 그리고 앞에서 서술했던 시신 매장을 국왕의 선정으로 인식하는 모습, 그리고 뒤에서 서술한 전염병 예방의 의미는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매골승이라는 명칭이나 승려의 모집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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