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속의 불교 ]
‘불교의 유신’과 ‘신문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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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 2025 년 5 월 [통권 제145호] / / 작성일25-05-04 23:34 / 조회93회 / 댓글0건본문
배를 띄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바람이 굳셈이라.
서리 아래에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느니라.
미美의 음音보다도 묘妙한 소리. 거친 물결에 돛대가 낫다. 보느냐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千萬의 장애障礙를 타파打破하고 대양大洋에 도착倒着하는 득의得意의 파波를
보이리라 우주宇宙의 신비神祕.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沙漠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 한용운, 「처음에 씀」, 『유심』 창간호 서문(주1)
인용한 시는 만해 한용운이 『유심』 창간호 서문으로 쓴 것인데, 그 표현과 내용이 다분히 불교적인 선시의 시풍과 화법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에게 대중적인 설법의 형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물의 외양과 현상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불교적인 지혜를 통해서 근원적인 뿌리를 깨우치라는 내용으로 『유심』이라는 잡지와 한용운의 사상이 지닌 핵심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이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한 이후 1918년 『유심』을 창간하고 그해 12월까지 3호를 발간하다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독립운동을 주도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3월 풀려난 뒤, 1925년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기까지의 과정은 서로 연관을 지어서 긴밀히 살펴봐야 하는 대목이다. ‘불교의 유신’과 ‘유심’, 그리고 ‘조선의 독립’, 『님의 침묵』이라는 종착점은 이 점에서 하나의 ‘도정’에 해당된다.

승려인 만해가 왜? “시를 썼는가?”라는 질문과 한국 현대시 혹은 현대문학 속에 ‘불교’가 “어떻게 접목되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포착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님의 침묵』의 문체가 지닌 순한글체와 연애시적 화법 등은 김억이나 김소월 등 당시 문단의 ‘현대시 운동’이 끼친 영향, ‘타고르’라는 인도 시인의 영향 등이 두루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심』이 종간된 1918년 12월과 3·1독립운동 참여로 인한 3년 간의 옥고로 인한 ‘공백기간’의 의미이다. 투옥으로 인한 불교, 정치, 문학의 활동이 중지된 지점에서 이 ‘공백’은 사실 공백이 아니라 ‘변화’의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보인다. 1925년 불과 몇 달에 걸쳐서 『님의 침묵』을 완성했다는 문학사적 기적은 어쩌면 이 긴 공백을 포함한 도정이 예고했던 최종 종착점이 아닐까.
한용운의 시풍과 화법의 놀라운 변신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하나의 ‘기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918년부터 1922년의 강제적 칩거의 시간이 있었고, 또 1922년부터 1925년 사이 당시 신문학 운동의 급격한 전개와 성장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사건’으로까지도 여겨지는 것이다.
불교의 ‘유심’에 의한 지혜, 불교 유신과 독립, 그리고 유심을 근거로 한 지혜를 시와 문학의 화법에 적용하는 일은 일정한 시간적 경과와 도정을 통해서 표출되었지만, 실상은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평가가 될 것이다.
불교와 조선의 독립, 그리고 불교와 문학의 만남, 불교와 근대의 결합은 유심이 유신과 『님의 침묵』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장면들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조선 불교계 잡지 『불교진흥회월보』와 수송동이라는 상징성
1895년 ‘승니입성금지령’이 해제되면서 불교계 종교활동과 문화운동이 조선의 도성 ‘한양’과 식민지 도시 ‘경성’이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산중 불교’로 소외되어 온 ‘불교’가 도성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대전환점’에 해당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불교의 유신은 한말의 국권 상실, 식민지화, 근대화라는 격동 속에서 그 방향을 잡아야 했기에 한동안 많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근대적 종교로 스스로를 혁신해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한 ‘불교계’의 가장 시급한 목표는 당시의 모든 교육, 정치, 사상, 문화운동이 그렇듯이, 신학문 습득,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 통일된 단체 구성, 인쇄, 출판 등의 근대적 미디어 제도를 갖추는 것이었고, 비록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런 활동은 1910년대 식민지 도시 경성의 중심지인 종로(수송동)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 사이의 갈등, 총독부의 조선불교사찰령 등에 의해서 불교의 유신과 국권회복, 문화운동 등에 일정한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교계도 산중의 선가 중심적인 수행불교를 벗어나서 ‘경성’이라는 상징적 중심지에서 문화활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등을 발간하는 1910년대이다. 불교의 개혁과 유신, 그리고 근대적 문화운동으로서의 불교를 지향하는 과정은 ‘불교’의 도성 진출 즉 근대도시 경성에서의 ‘불교운동’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난다. 이 수송동 일대에서의 불교계 활동은 상징적인 측면에서 ‘승녀입성금지령’의 해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권상실’을 배경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가 창간되고 이후 1913년 『해동불보』로 이름을 바꿔서 재간행되는 것을 시작으로 『불교진흥회월보』(1915), 『조선불교계』(1916), 『조선불교총보』(1917), 『유심』(1918) 등의 잡지가 창간된다. 이런 불교계 잡지의 창간은 ‘근대적 불교운동’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결과적으로는 이런 불교계의 문화운동이 자연스럽게 당시의 ‘신문학 운동’과의 결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수송동에는 30본산 주지들이 회합하던 원종 종무원 중앙포교당과 ‘승니입성금지령’ 해제를 기념해서 지은 각황사가 있었고, 근처의 사동에는 범어사에서 신축한 임제종 종무원 중앙포교당이 있었다. 이후 1912년 6월 17일 각황사에서 거행된 30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선교양종으로 종지를 통일하면서 수송동의 종무원 중앙포교당으로 일원화되지만 이 지역은 승려를 포함해서 당시 불교계 지식인 엘리트(학인) 등의 문화적 거점으로서 문학, 출판을 포함해서 활발한 문화 활동이 전개되는 중심지였다.(주2) 1914년 8월 10일 각황사 내에 ‘불교진흥회’가 설립되고 기관지 『불교진흥회월보』(1915. 3,15)가 창간되는데, 이 과정은 당시 이능화, 양건식 등의 학인(불교계 지식인)들이 불교 근대화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보여준다.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 해제, 종로에 사찰 건립, 30본산 주지 회의 개최와 불교 잡지 간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당시 불교계 근대적 문화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경성이라는 중심지에서의 불교계 활동은 곧 당시 문화 활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던 ‘문학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건식,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등의 불교계 입문이나 교류는 그런 사실을 반증하는 사실 중 일부이다.
경성이라는 도시에서의 문화 활동이 ‘불교 유신’의 큰 핵심축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가되고 식민지화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불교’의 전통적인 사찰 중심의 ‘산중 불교’ 체제가 새로운 도시 문화 활동으로서의 불교, 불교 대중화로 전환될 뿐만 아니라 승려 교육의 중요성 증가로 인한 ‘교육기관’의 필요성 때문에 종단 자체의 근대적 제도 정비가 절실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후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한용운에게 불교의 유신은 불교의 선과 유심 사상을 바탕으로 ‘문화, 정치, 교육, 사상’의 전반에 걸쳐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그 근대적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승려 한용운이 독립운동가, 사상가, 시인 한용운이 되는 과정은 분화가 아니라 ‘불이不二’에 해당하는 것이다.
강용흘 『초당』(주3) 속의 한용운과 1920년대 독자
어느 날 그들은 문학을(옛날에 논의되던 문학과는 다르지만)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현대의 사상가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으로 훌륭한 사람과 하루살이 같은 사람을 혼동하고 또 그들을 과거와는 전혀 결부시키지도 않았다. 한국의 생존 작가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논의할 때 서울에서 용운의 제자였던 한 사람이 다음의 시를 제시하였다.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생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줏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줏은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는 할 수 없습니다.
눈물을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얼마나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그때에는 말하자면 심사위원들이었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용운이 비록 열렬한 우국지사로 알려져 있기는 해도 승려인데다가 전통주의자이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누가 뭐라든 간에 가능한 그의 시를 모두 모았다.
한국의 가장 유명한 사원 가운데 몇 개는 웅대한 원형 산맥인 금강산의 1만 2000봉우리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송전치와 그 장터로 돌아가기 전에 그 절들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주4) (강용흘 『초당』 중에서)
인용한 내용은 1931년 영어로 출간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강용흘의 『초당』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아마도 『님의 침묵』이 출간된 이후 한용운의 시를 영어권에 소개한 최초의 사례라고 판단된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용운에 대한 평가나 소설 속 주인공의 한용운 시에 대한 탐닉은 따라서 1920~30년대 당시의 『님의 침묵』에 대한 동시대 독자들의 감각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용에서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조선의 문학과 사상을 논하면서 한용운을 평가하는 부분은 따라서 상당히 인상적이다.

주인공인 ‘청파’는 소설의 1장에서 이 소설의 내용이 자신의 자전적 생애에 대한 기록임을 밝히고 있는데, 전통적인 한학의 교육으로부터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하는 과정까지 구한말에서 식민지 시기에 이르는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과 새로운 근대의 접합이 때로는 미래에 대한 대안으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그려낸다. ‘청파’의 삶이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전통적인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 소설에는 유가, 도가, 불교 등에 얽힌 다양한 체험과 설화가 등장하는데, 특히 주인공의 유학 시절을 전후로 하는 장면에서는 불교와 한용운의 이야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소설에 실린 한용운의 시는 인용한 작품을 비롯해서 6편에 이른다. 이 소설에 실린 구절 중에 “용운이 너무 상징적으로 표현했으므로 일본인들은 그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님, 그의 추상적인 미의 환상, 그것은 곧 한국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주5)라는 한용운의 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1920년대 당시 강용흘의 생각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대 독자 청파의 생각과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용운의 ‘시적 성취’는 이 점에서 불교적 유심론이 ‘님’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불교, 민족, 독립, 중생, 자비심, 미, 지혜, 깨달음, 완성, 열반을 ‘불이不二’와 ‘화엄’의 상태로 가져가서 ‘시적 언어’로 유신維新해 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새로움’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선 불교적인 ‘깨우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형상에 매이지 않고 그 근원을 성찰하는 시적 사유를 ‘한국시’와 ‘시적 언어’에 부여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시의 현대성 안에 단순히 서구적인 영향만이 아니라 동양적인 사유와 가치,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불교적인 혜안과 형이상학적인 통찰이 수사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성취한 ‘님’과 ‘사랑’, ‘불교’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주>
(주1) 『유심』(1928, 9). 1쪽. 인용은 필자가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현대어 표기로 고쳐 적은 것이다.
(주2) 고재석, 『한국근대문학지성사』(깊은샘, 1991). 26쪽. 참조.
(주3) 1931년 미국에서 “The Grass Roof”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출간되어 ‘구겐하임’상과 ‘Book of the Century’상을 수상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에서 읽혔다. 강용흘은 1898년 함경도 홍원 출생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 소설에서 한용운에 대한 설명 중 ‘젊은 승려’ 등의 표현은 그가 1920년대 중반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거나 소설적 허구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을 변형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4) 강용흘, 『초당』, 장문평 역(범우사, 1993). 307~308쪽.
(주5) 위의 책,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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