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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아라비아 상인과 불교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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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5 월 [통권 제145호]  /     /  작성일25-05-04 23:40  /   조회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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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서 벵골만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까지 활약하던 상인을 다루었다면 인도양에는 당연히 아라비아 상인이 존재했다. 아라비아 상인은 페르시아, 아라비아반도만을 꼽는 것이 아니라 서인도 구자라트나 남인도 상인까지 포괄한다. 아라비아해에서 홍해를 거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 무역망이 작동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반도, 홍해는 물론이고 서인도 곳곳에 무역항이 존재했다. 해양실크로드 네트워크이다.

 

국제무역항 타나

 

기원후 천 년 동안 인도와 로마 사이에 해상으로 오간 물동량에 비하면, 같은 시기 육상 실크로드를 통과한 물류 총량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수준에 불과하다. 인도 서해안에 당도한 로마 선원과 상품은 북인도를 가로질러 마우리아 왕조 이후 번성하던 내륙 깊숙한 불교 중심지까지 닿았다. 아라비아해에서 데칸 남부의 남인도 내륙상권으로도 상권이 확장되었다. 고고학적 증거물로 인도아대륙 곳곳에서 로마산 유물이 출토되는데 도기류, 유리공예품, 그리고 콜라푸르(Kolhapur)에서 발견된 포세이돈 청동상 등이 좋은 예다. 국제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부의 증가는 상인계급을 중심으로 불교진흥에 공헌하게 만들었다. 아라비아해의 타나(Thana, 塔納)라 부르던 무역항도 그런 곳이다. 

 

사진 1. 아라비아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진 고대 무역 루트.

 

뭄바이의 살세타(Salsette, Shatshashthi) 섬에는 타나, 미라-바얀다르(Mira-Bhayandar) 같은 도시가 포진해 있었다. 타나는 오늘날 메트로폴리탄 뭄바이의 일부인데 그 타나에 거대 석굴군이 존재한다. 타나는 기원전 4세기 인도 서북부를 침략한 알렉산드로스에 맞대응한 포루스왕의 거성이기도 하다. 헬레니즘 제국의 경계선이 좀 더 남진하지 못하고 인도 서북부에서 멈춘 이유이다.

 

포루스왕은 기원전 4세기 인더스강 유역을 통일한 마가다 왕국의 왕이었다. 훗날 마르코 폴로는 “타나는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누구에게도 조공을 바치지 않는 크고 훌륭한 독립 왕국으로서 고유 언어를 갖고 있으며, 교역이 발달해 수많은 선박과 상인이 그쪽으로 폭주한다.”라고 했다. 『송사』에도 타나 왕국이 등장하는데, 마르코 폴로 기록과 비슷하다. 타나는 헤나 방향제 등의 수출로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사진 2. 오늘날 뭄바이 근처 나라소파라(Nalasopara) 스투파 흔적.

 

콘칸은 북쪽으로 다만강가(Daman Ganga)강, 남쪽으로 카르와르(Karwar) 안제디바(Anjediva) 섬까지 길게 이어진 인도 서부 해안이다. 서쪽은 아라비아해, 동쪽은 데칸고원으로 이어진다. 콘칸 지역은 적어도 3세기 스트라보(Strabo) 시대부터 로마인에게 회자되었다. 콘칸 해역에 많은 항구가 포진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소파라(Sopara, 오늘날의 Nallasopara, 수라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항구이자 콘칸 경제의 중심이었다. 소파라는 무역 중심지이자 불교 학습의 중심지였으며 캄베이(Cambay)에 뒤이은 서인도의 중요 거점이었다. 

 

소파라와 경쟁하던 차울도 북부 콘칸을 지배한 살리하라의 중요 항구였다. 차울은 데칸의 사타바하나 왕국 수도인 프라티티스탄(Pratisthan)과 연결되었다. 프톨레미오스는 소파라와 마찬가지로 차울도 언급하였으며, 쌀과 참기름(sesamum), 고급 옷감, 사탕수수 등을 이집트로 수출하였다고 하였다. 특히 차울은 방향 식물 헤나(Henna)로도 유명했다. 서아시아 도기도 많이 발굴되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의 이슬람식 터키석, 분홍색 채도기 등이다. 중국 도기는 일반 도기, 청화백자, 청자 등이 발굴됐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본산이었던 차울

 

칸헤리 동굴사원의 5세기 금석문에서 차울을 언급하고 있으며, 6세기 코스마스(Cosmas Indikopleustes)는 차울을 세보르(Sebor)로 호칭하였다. 아랍 역사가 알 마수디(Al Masudi)가 10세기 초반에 차울에 당도했을 때, 그는 번성하는 항구를 목격하고 이를 기록에 남겼다. 동서 문물의 교류가 장기지속으로 활발했다는 증거다. 

 

사진 3. 고대항구 소파라의 벽돌로 지은 불교 유적. 사진: Indica today.

 

소파라와 차울은 북 콘칸에 자리 잡아 불교와 자니이교의 본산이었다. 소파라와 차울을 중심으로 콘칸에는 기원전 3년에 이미 불교도가 있었다. 아소카의 불교전파가 미친 결과이다. 마우리아 제국의 마하라슈트라 침공은 기원전 321년에서 181년 사이에 일어났다. 기원전 315년 마우리아는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를 통해 해안을 남하하여 소파라로 들어갔다. 북쪽으로 우회하여 아라비아해로 침공한 것이다.

 

1882년 소파라에서 아소카 석비와 스투파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14개 스투파 중 8번째였다. 1956년에는 부이가온(Bhuigaon) 마을에서도 9번째 스투파가 발견되어 콘칸 지역에도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소파라의 니르말(Nirmal) 고고학 조사에서 스투파가 1882년에 발굴되었는데 기원전으로 소급되었다. 8〜9세기 부조 조각도 발굴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전 300년대부터 8〜9세기까지 천년 이상 불교왕국이 존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이들 유물은 뭄바이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4. 소파라의 스투파에서 나온 사리함.

 

『마하완사』에 따르면 싱할라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된 비자야가 수파라카(Supparaka, 소파라)에서 스리랑카로 떠난 것으로 등장한다. 7세기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소랄타국(蘇剌咤國, Surata)을 언급했다. 오늘날의 토지에 염분이 많고 바람이 드센 곳으로 묘사했다. 가람이 50여 곳 있고, 승려는 3,0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상좌부를 따르며, 이곳 역시 이교도가 뒤섞여 살고 있다고 했다. 현장의 목격담은 소파라에 불교가 번성하던 마지막 기록으로 간주된다.

 

콘칸 해안의 번성하던 칸헤리 동굴사원

 

타나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칸헤리(Kanheri) 석굴이 있다. 뭄바이 북쪽의 산자이 간디(Sanjay Gandhi) 국립공원에 위치해 있다. 칸헤리가 위치한 살세타는 지금은 뭍이지만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으며, 유력한 무역상인이 포진한 타나의 경제력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석굴군이 위치한 산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아라비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굴의 시대에는 아라비아해를 오가는 상선이 굽어보았을 것이며, 그들 상선이 석굴을 찾아왔을 것이다. 갠지스강과 벵골만에서 시작된 불교가 아라비아해 언저리로 확산된 결과이다.

 

사진 5. 콘칸 석굴 내의 스투파.

 

칸헤리는 바위 군을 절단한 109개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정연하고 질서 있게 굴착되었으며, 오랜 시일에 걸쳐 조성되었다. 1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불교조각과 그림, 비문이 전해온다. 칸헤리는 ‘검은 산’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크리쉬나기리(Krishnagiri)에서 유래한다. 국제무역항 타나의 경제력이 이들 석굴사원을 가능하게 했다. 서인도의 상업거점 소파라, 카이얀(Kaiyan), 나식(Nasik), 파이탄(Paithan), 유자인(Ujjain) 등과 연결되었다. 아라비아해에서 남인도 내륙으로 연결된 것이다. 

 

석굴은 1세기에 지어졌으며 3세기에 콘칸(Konkana) 해안의 중요 불교 정착지가 되었다. 마우리아와 쿠샨시대에 석굴군이 만들어진 것으로 비정된다. 마우리아제국이 서쪽과 데칸 남쪽까지 경략하면서 불교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09개에 달하는 석굴은 단단한 승가 조직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서인도 불교순례처로 많은 이들이 찾아왔고, 불교대학이 위치하여 불교연구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배를 타고 순례객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사진 6. 비교적 덜 알려진 콘칸 지역 쿠다 계곡의 부조.

 

높은 언덕 위의 거대한 바위를 촘촘하게 깎아낸 계단을 통해 칸헤리 석굴에 오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평범하고 꾸밈이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다. 동굴마다 침대 역할을 하는 돌 받침대가 있다. 동굴은 수도승의 주거처이자 공부방, 명상처 등으로 활용되었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동굴이 가장 중요한 사원인데 거대한 회당(Chaity)이 있으며, 암벽을 통째로 깎아냈다. 입구에 170년경의 비문이 있는데, 많이 훼손되어 일부만 해독된다. 칸헤리 불교의 전성기를 알려주는 비석이다. 많은 금석문이 전해오는데 브라흐미, 팔라바, 데바나가리(Devanagari) 문자 등이다. 남인도 동해안의 팔라바 문자가 발견되는 것이 흥미롭다.

 

속속 발굴되는 또 다른 석굴들 

 

2016년에 고고학자들은 칸헤리 석굴 근처에서 또 다른 7개의 석굴을 발견하였다. 승려들이 비가 많이 내리는 몬순 절기에 이용했던 은신처로 확인되었다. 칸헤리 유적과 마찬가지로 식수원이 있는 저수지 근역에 위치해 있다. 저수지에서 관을 통하여 물을 공급하여 식수원으로 썼다. 2천여 년 전 승려들이 수도하고 은신하던 것으로 보아 살세타 섬 주변이 모두 불교 중심지였다. 칸헤리 석굴군 이외에 다수의 석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불교세가 강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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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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