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빚 갚음이 모자라도 ‘주어진 대로 묵묵히 사느라 애썼다’
페이지 정보
구미래 / 2025 년 7 월 [통권 제147호] / / 작성일25-07-05 12:49 / 조회8회 / 댓글0건본문
지전 ❸
의례에서 지전을 사용하려면 특별한 의식을 거쳐야 한다. 속계의 종이를 초월적 세계에서 통용되는 금은전으로 변환하기 위함이며, 이러한 의식을 ‘조전점안造錢點眼’이라 부른다. 지전을 조성한 뒤 마지막 점안을 통해 신성한 돈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지전을 금은전으로
조전점안은 본재本齋에 들어가기에 앞서 행하는 의식이다. 예수재에서는 대개 불단이나 시왕단 앞에 지전을 쌓아두고 그 앞에 증명법사 스님들이 자리한 가운데 조전점안이 이루어진다. 증명법사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관하면서 신묘한 가피가 깃든 청수를 지전에 뿌리고, 어산 스님들을 비롯한 대중 스님은 절차에 따라 진언을 외우는 일련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예수천왕통의』에 제시된 조전법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조전도량을 구성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발 위에 지전을 쌓고, 짚으로 엮은 발을 덮은 뒤 병풍 등으로 조전막造錢幕을 치게 된다. 지전 앞에 앉은 증명법사가 ‘조전 진언’을 염송하면서 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하고 대중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읊는다. 이윽고 법사가 요령을 울려 ‘성전成錢 진언’으로 돈이 완성되었음을 알린다.
이제 조성된 돈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점안 의식이 이어진다. 삼보의 가피로 지전을 금은전으로 변환시키려면 신묘한 물의 작용이 중요하니, ‘불수佛水·법수法水·승수僧水·가피를 발원한 청수를 증명단에 올리고, 법사는 솔가지로 청수를 적셔 지전에 두루 뿌리며 ‘쇄향수灑香水 진언’을 염송한다.

법사는 금은전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관하고 대중은 진언으로써 그 과정을 차례로 완성해 간다. 지전을 금은전으로 바꾸는 ‘변성금은전變成金銀錢 진언’, 금은전이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개전開錢 진언’을 거쳐, 완성된 금은전을 거는 ‘괘전掛錢 진언’을 외움으로써 드디어 명부에서 통용되는 돈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동참자들은 저마다 금은전이 든 경함을 머리에 이고 경내를 돌기 시작한다. 금은전 이운移運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옹호와 찬탄의 염송이 따르는 가운데, 길을 인도하는 인례引禮 스님을 따라 탑과 법당을 도는 예수재 특유의 행렬이다. 돌기를 마치면 명부의 창고지기를 모신 고사단庫司壇 앞에 차례로 금은전을 바친다.
고사단에 금은전이 수북하게 쌓여 가고, 전생의 빚을 헌납하는 헌전게獻錢偈·헌전 진언과 함께 이운을 마친다. 이처럼 신도들이 전생의 빚인 ‘지전과 경전’을 경함에 담아 고사단에 헌납하는 단계를 ‘금은전 이운, 경함 이운’ 등이라 부른다. 이제부터 고사庫司는 의례를 마칠 때까지 경함을 잘 지키다가, 봉송 때 태우면서 명부창고로 가져가게 될 것이다.
명부 중심의 만다라적 세계관
전생의 빚을 헌납하는 궁극의 대상은 시왕이다. 예수재는 생전에 사후 문제를 내다보는 의례이기에,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을 중시하는 것이다. 예수재의 삼단구조는 ‘불보살, 신중, 영가’로 구성하는 일반 천도재와 다르다. 산 자들을 위한 의례이니, 하단에는 영가가 아닌 명부에서 파견된 권속들을 모신다. 따라서 상단은 증명단이 되고, 명부시왕을 모신 중단이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며, 하단은 부속단에 해당한다.
또한 삼단을 각각 상중하로 세분하여 아홉 단을 갖추면서 이를 ‘예수 9단’이라 부른다. 아홉의 각 단에서도 다시 중앙과 좌우로 위상을 달리하는 존재들을 나누어 모심으로써 예수재에 청하는 불보살과 성중聖衆은 다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초월적 존재이자 현세의 원리를 담고 있는 법계法界의 주재자로서, 불교 세계관의 만다라적 특성을 보여준다.
상상단 : 비로자나불(중앙), 노사나불(좌), 석가모니불(우)
상중단 : 지장보살, 육광보살·도명존자, 육대천조·무독귀왕
상하단 : 대범천왕, 제석천왕, 사대천왕
중상단 : 풍도대제, 하원지관, 시왕
중중단 : 26위 판관, 37위 귀왕, 2부동자·12사자
중하단 : 종관, 7위 영관, 부지명위
하상단 : 고조관, 관사, 군졸·관리
하중단 : 사천사자·공행사자, 지행사자·염마사자
하하단 : 말
상중단의 지장보살과 좌우 협시를 비롯해, 중단과 하단은 모두 명부와 관련된 존재들로 포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문에는 이들이 맡은 각각의 직책을 기록하고, 중하단에는 ‘부지명위不知名位’라 하여 명부에 근무하지만 이름을 모르는 말단 관리까지 빠짐없이 거론하였다. 예수재가 사후에 만나게 될 심판자적 존재들에게 미리 기도 올리며 공덕을 쌓는 의식임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아울러 각단에 공양을 올리기 전에 “세속의 풍습대로 고귀한 자리를 배열했으나, 서열이나 신분이나 지위에 어긋남이 없었는지 염려되옵니다.”라고 아뢴다. 혹시 예의에 어긋남이 있었다면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간청하는 말이 이어지니, 조심스럽기가 한량없다.
예수 9단은 관념적인 신위체계이지만,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경우 별도의 단을 구성하여 공양을 올린다. 그런데 상단·중단에 비해 하단의 경우는 고사단·사자단·마구단을 각각 따로 설단設壇하게 된다. 사자使者는 민간의 저승사자와 달리, 초월적 존재들이 도량에 강림하도록 예수재의 봉행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가장 먼저 청해 공양을 올려서, 천계·허공계·지계·명계에 네 사자를 각각 파견하여 초청장을 전하도록 떠나보내게 된다. 고사庫司는 동참자들이 갚은 빚을 명부창고에 보관하여 관리해 줄 소중한 존재이고, 말은 이들을 태우고 오가는 궂은일을 맡았으니 콩과 여물을 차려 빠짐없이 챙기는 것이다.

빚을 갚고 받는 증명서
동참자들은 경전과 지전을 납입하고 나면 함합소緘合疏라는 한 장의 서류를 받게 된다. 재자의 이름, 주소, 갚아야 할 경전 수와 금액이 적혀 있는 이 서류는 예수재를 봉행하여 전생 빚을 갚았음을 인정하는 일종의 증명서에 해당한다.
함합소는 봉송 때 지전과 함께 태우는데, 예전에는 이를 중요하게 여겨 반으로 찢어서 한 조각을 간직하는 이들도 많았다. 자신이 간직한 절반의 함합소는 죽은 뒤 관 속에 함께 넣도록 하여, 명부에 있는 불태워진 조각과 맞추어 보아서 맞으면 그 공덕을 인정받아 내세의 길을 밝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함합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이 태어날 때 육십갑자에 따라 명부 화폐와 경전을 빚내어 사람의 몸을 받았으며, 이제 그 빚을 준비하여 환납하니 너그럽게 받아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용 가운데 다음의 구절이 주목된다.

고전庫前에 빚을 지어 사람 몸을 받아 빈부귀천·고락을 겪으며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여기 모자라는 명부 지폐와 『금강경』·『수생경』 등으로 빚진 수량을 준비하여 환납하오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 무력하여 숫자를 모두 갖추지 못했으니 오직 부처님의 법력에 의지해 구족하게 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빚을 내어 사람의 몸을 받았기에 이를 환납하면서, 숫자를 채우지 못한 채 명부 지폐와 경전을 갚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지은 빚을 힘써서 모두 갚는다는 내용이 아니라, 금액이 모자람을 알리며 나머지는 부처님의 법력에 의지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설정은, 육십갑자에 따라 갚아야 할 금액이 천문학적 숫자라는 데 겁먹지 않아도 됨을 말해 주는 듯하다. 그 빚을 업業으로 대입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으로 태어나 큰 악업을 짓지 않고 부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이라면, 무수한 전생 업의 무게에 너무 짓눌리지 말고 나태함 없이 스스로 돌아보며 살도록 다독이는 걸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의식문을 만든 옛 스님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특히 태어난 바에 따라 살아오는 과정에, 빈부귀천과 희로애락을 주어진 대로 모두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눈물겹다. ‘사람으로 태어나 고해苦海의 한평생을 사는 것’이 누겁 전생의 업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의미가 있으니, “주어진 대로 묵묵히 살아 태어날 때의 빚은 어느 정도 갚았구나.”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예수시왕생칠경』에서 “살아생전에 미리 정성스레 예수재를 닦아가되, 매달 음력 초하루·보름에 삼보 전에 지성으로 공양하며 행하도록” 하였다. 예수재가 특정 시기와 무관하게, 부처님 당시 초하루·보름마다 대중 앞에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어 참회하는 포살布薩 의식을 일깨우며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사후 극락왕생을 바라는 중생의 마음’을 ‘일상적 참회와 수행’으로 자연스레 이끌고자 한 것이다. 사후 심판관인 시왕을 중심으로 의식문이 성립되는 과정에, 점차 ‘빚’이라는 설정과 ‘지전ㆍ경전’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나를 위한 수행, 남을 위한 보시
빚을 가시화하기 위해 만든 지전과 경전은 회향 때 남김없이 태워 사라진다. 따라서 ‘방편에 불과한 낭비’라 여겨 지전을 쓰지 않는 사찰도 있다. 동참자들 또한 ‘극락길을 다지는 것’이라는 데 갇혀 있는 이들이 많고, 불교권 밖에서는 서양의 중세 면죄부를 연상하며 ‘극락 가는 티켓’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니 의례에 좋은 뜻이 담겨 있어도 공유하지 못하면 허사가 되고 만다. ‘설명에 인색한’ 한국불교의 특성은 의례의 내재적 의미를 전하는 데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죽음은 인간을 성찰적으로 이끄는 주제이지만, 천도재든 예수재든 극락왕생에 치중되어 죽음을 계기로 하여 삶을 돌아보고 성찰적으로 이끄는 종교의례의 목적이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편이다.
특히 예수재는 산 자의 사후를 다루는 것이기에 기복적 의례로만 여기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생전의 빚이 ‘업’이라는 사실은 물론, 업을 두 가지 빚으로 표현한 뜻이 ‘나를 향한 수행’과 ‘남을 향한 보시’를 이끌기 위함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는 동참자가 대부분이다. 경전 빚은 삼보의 가르침으로 인도하고, 금전 빚은 공덕을 베풀도록 이끄는 방편이니, 이러한 수행과 보시 공덕을 쌓음으로써 업을 맑히도록 일깨우는 데 있다.
따라서 태워버리는 낭비와 번거로움을 감내하면서 만드는 지전과 경전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기 위함이자 업을 새기는 종교적 장치이다. 예수재는 수승한 수행자들이 모여 마음을 닦는 수행 법회가 아니다. 경전 빚과 지전 빚, 그것을 갚고 나서 받는 증명서, 명부 존재에게 보내는 초대장, 현세와 내세를 오가며 연락책을 맡는 사자 …. 방편적으로 보이는 이들 요소는 불교적 진리를 풀어내기 위한 좋은 도구이며, 의례에 담긴 섭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와 은유이다.
중생의 근기에 적합한 이들 의례 요소는 엄숙불교에서 벗어나 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징검다리이다. 자칫 엄숙하고 딱딱하기 쉬운 의례에 부여하는 리듬과 윤활유, 미소와 같은 구실을 한다.
사후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 지어주는 공덕보다, 생전에 내가 스스로 짓는 공덕이 훨씬 크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니 후일 명부시왕 앞에, 금액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빚을 갚으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의미화에 기꺼이 뛰어들 수 있게 된다. 모두 나를 위한 ‘수행’도 남을 위해 마음을 내는 ‘보시’도 소홀함이 없는지 되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인도 데라둔 민될링 닝마빠 사원
3년 전 『고경』 연재를 시작하면서 티베트 불교에 관련된 걸출한 인물과 사찰 그리고 종단을 고루고루 섞어 가려고 기획은 하였다. 그러나 이미 지나온 연재 목록을 살펴보니 더러 빠진 아이템이 있었는데…
김규현 /
-
사찰음식, 축제가 되다
사찰음식이 국가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불교 전래 이후 꾸준히 발전해 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과 불교의 불상생 원칙과 생명존중, 절제의 철학적 가치를 음식으로 구현하여 고유한 음식…
박성희 /
-
운문삼종병雲門三種病
중국선 이야기 52_ 운문종 ❼ 운문종을 창시한 문언의 선사상은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그의 선사상은 남종선과 그 이전에 출현한 조사선의 사상적 근거인 당하즉시當下卽是…
김진무 /
-
성철스님문도회 개최 및 백련암 고서 포쇄 작업
성철스님문도회의 개최 지난 5월 14일 백련불교문화재단 사무실에서 성철스님문도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날 문도회에는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타스님(청량사 주지), 원행스님(정…
편집부 /
-
볼 수 없는 빛-연꽃
감지에금, 펄, 분채, 76x57. 이해기(2024).
고경 필자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