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서유기 ]
백골 요괴 세 번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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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0:25 / 조회3회 / 댓글0건본문
서천행을 하던 삼장 일행이 백호령白虎嶺에 이르자 백골 요괴[白骨精]가 삼장을 잡아먹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팔계가 반가워하지만 손오공이 그 정체를 알아채고 여의봉으로 때려죽인다. 요괴는 껍데기를 버리고 원래의 정신을 빼내어 달아난다. 팔계와 삼장이 그 잔인함을 비난한다. 손오공의 여의봉에서 달아난 백골 요괴는 다시 팔순 노파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손오공이 또 그것을 때려죽인다. 삼장과 팔계의 비난이 한층 더해진다. 다시 백발 영감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손오공이 호법신들을 호출하여 요괴의 원래 정신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차단한 뒤 여의봉으로 그것을 때려죽인다. 요괴는 달아나지 못하고 백골 무더기로서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삼장은 팔계의 부추김을 받아 손오공을 여행단에서 축출해버린다.
백골 요괴의 정체
이야기는 간단하다. “요괴가 모양을 바꿔가며 세 번 나타난다. 그때마다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때려죽인다. 팔계가 손오공을 비판하여 삼장을 움직인다. 손오공이 쫓겨난다.” 백골 요괴 이야기는 이렇게 극히 단순하지만 중국에서는 높은 인기를 누려온 『서유기』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 스토리만 따로 떼어내어 각색한 연극, 영화가 있고, 여러 종의 동화와 만화로 재창작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유기』의 원형인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 모음집은 늦어도 송宋대, 빠르면 당唐대에 완성된 것으로 얘기된다. 그것이 『서유기』 성립의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온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괴의 정체는 백골白骨이다. 백호령白虎嶺에서 나타났으므로 백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젊은 여인→노파→노인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나타나다가 결국 백골 무더기로 남는다. 그런 점에서 그 정체는 백골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결국 백골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뚜렷하다.
그런데 이 백골白骨과 백호白虎는 쌍성첩운의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백골=백호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과거의 남성 중심 세계관에서 여인은 사람을 해치는 백호와 같은 존재였다. 『서유기』의 원형인 『대당삼장취경시화』에는 여인이 백호로 변해 손오공과 싸우다가 죽어서 백골로서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인=백골=백호의 관계가 성립한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가장한 백골 요괴는 왜 나타났는가? 『서유기』의 모든 요괴는 서천행의 당사자인 삼장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괴가 출현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요괴가 나타난 원인을 알 수 있다. 백골 요괴가 출현하기 직전에는 먹는 문제로 삼장과 손오공 간에 갈등이 있었다. 삼장이 공양을 좀 구해오라고 하자 손오공이 타박을 하고 이에 삼장이 발끈한다.

사부님도 참 멍청하십니다. 이 깊은 산중에는 마을도 없고 여인숙도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살 곳이 없는데 어디 가서 공양을 구해오라는 겁니까?
이 원숭이야! 양계산을 생각해 봐라. 너는 여래의 돌상자에 갇혀 입은 움직여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때 내가 너를 구해 계를 내려주고 제자로 삼았던 거 아니냐? 어째서 노력해 보지도 않고 핑계만 대는 거냐?
손오공은 사부인 삼장에게 왜 토를 다는가? 수행은 마을도 없고 인가도 없는 깊은 숲을 걷는 일과 같다. 기댈 곳도 없고 머물 곳도 없다. 몸을 단련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이 한 걸음을 바로 알아 땅에 발을 디딜 뿐이다. 음식만 해도 그렇다. 음식을 구할 수 없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조바심을 낼 것이 아니라 배고픈 현장을 바로 수용하는 것이 수행이다. 음식을 먹는 일이나 배를 곯는 일이나 한결같이 진리가 나타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먹을 것을 갈망하는 삼장은 잘못되었다. 그렇다고 전혀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에게 몸은 무시할 수 없는 수레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화를 내는 삼장도 문제지만 배가 고픈 것에 대책이 없는 손오공도 문제다. 삼장과 손오공의 필연적인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요괴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갈등 상황에 대한 호응이다.

요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요괴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으로 변신하여 두 손에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난다. 먹을 것에 대한 욕망과 색욕에 대한 욕망은 몸을 가진 존재를 지배하는 두 가지 본성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장면이다.
굉장한 요괴였다. 음산한 바람을 멈추고 산골짜기에서 몸을 한 번 흔들어 변신을 하였다. 변신한 몸은 달과 같고 꽃과 같은 용모를 지닌 젊은 여인이었다. 그 수려한 눈썹과 맑은 눈, 흰 치아와 붉은 입술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왼손에는 파란 항아리, 오른손에는 초록 병을 들고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삼장 쪽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모양과 색채의 향연이다. 달과 같고 꽃과 같은 용모, 수려한 눈썹과 맑은 눈, 흰 치아와 붉은 입술, 파란 항아리와 초록 병이 모두 색色=모양이라는 단어를 띄우기 위한 수사이다. 더구나 여인은 파란 항아리에 담긴 쌀밥과 초록 병에 담긴 볶음면을 삼장에게 공양으로 올리고자 한다. 이에 모양에 대한 치우침[色病]을 대변하는 팔계가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에 끌려 앞으로 마중을 나가 그녀를 맞이한다.
여인이 말한다. “스님! 이 산은 뱀이 돌아가고 짐승들이 두려워하는 백호령白虎嶺이라는 곳입니다. 정서 쪽 아래가 저의 집이랍니다.” 모양으로 부처를 찾고 소리로 부처를 구하는[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색병色病에 걸려 있는 팔계가 이 아름다운 여인과 색색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반기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양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모양[色]의 허망함[空],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원리를 등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색병色病을 치유하는 길은 무엇인가? 손오공은 요괴가 나타나는 족족 때려죽이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괴가 여인, 노파, 영감으로 모양을 바꿔 나타날 때마다 여의봉을 휘둘러 죽여버린다. 남녀노소의 차별적 모양에 상관없이 여의봉을 휘둘러 그 모양의 허위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젊은 여인이 가져온 밥과 국수는 원래 구더기와 두꺼비였다는 것을 밝히고, 두 번째로 나타난 팔순의 노파가 18살 젊은 여인의 모친이라기에는 너무 늙었으므로 거짓이라는 것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영감은 이제까지 나타난 남녀노소와 모양은 다르지만 결국 한 무더기 백골이라는 정체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때마다 저팔계가 그 무도함을 비난하고 삼장이 이에 동조한다. 요괴에게 잡아먹힐 뻔한 위기를 해결해 줬다고 생각하는 손오공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그렇다면 손오공은 옳고 삼장과 팔계는 틀렸는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양에 속지 않는 것과 모양을 무시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모양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 역시 공이라는 모양에 지배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팔계가 색병色病에 걸렸다면 손오공은 공병空病에 걸린 상황이다. 공에 집착하면 색에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도를 잃고 스스로 요괴가 될 수밖에 없다. 나중의 일이지만 삼장에게 쫓겨난 손오공이 화과산으로 돌아가 요괴대왕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팔계와 손오공 둘 다 잘못이 반반이다.
화해의 길과 결별의 길
색병色病의 팔계와 공병空病의 손오공이 화해할 길은 없는가? 그 모순된 양 측면은 삼장의 마음을 구성하는 내용물이다. 삼장은 팔계에게 경도된 상황이다. 그래서 팔계의 사주를 받아 손오공을 쫓아내고자 한다. 그 축출의 명령이 세 번 내려지는데, 이에 대한 손오공의 반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의 축객령에 손오공은 관음보살이 계를 주고 삼장이 몸을 풀어준 일을 추억하며 은혜를 갚을 기회를 달라고 한다. 삼장 또한 자신과 함께 정을 생각해서 그와 화해한다.

관음보살의 은혜란 무엇인가? 과거 천상을 어지럽힐 때 손오공은 요괴였다. 무상, 고, 무아의 현주소를 부정하고 영생과 쾌락을 추구하며 자아숭배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오행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운행에 역행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오행산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역으로 공에 대한 집착이 깊어 편공偏空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비해 관음보살이 제시한 것은 공의 진정한 실천이었다. 그것은 공이라는 관념 자체까지 부정하는 길[空空]이다. 무조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인 것을 되살리는 길이다. 삼장이 서천행을 결행하게 된 계기가 되는 관음보살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 소승의 가르침은 죽은 자를 되살리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 어울리도록 할 뿐이다. 나의 삼장으로 된 대승불법은 죽은 자를 하늘에 오르게 하고, 고난에 처한 이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손오공은 죽이는 데 치중하고 있으므로 관음보살의 길을 벗어나 있다. 이것이 손오공의 축출되어야 하는 이유인데 쫓겨나기 전에 관음보살의 은혜를 기억했으므로 화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나타난 노파를 죽이자 다시 삼장은 머리테 주문을 외어 손오공을 벌한 뒤 그를 내쫓고자 한다. 그러자 손오공이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머리테를 풀어주면 군말 없이 서천 여행단에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장은 죄는 주문만 알지 푸는 주문은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용서하고 화해한다. 왜 이 일이 화해의 조건이 되는가? 삼장이나 손오공 모두 푸는 법을 모르는 것이 서천행의 문제이다. 손오공은 오직 죽임 일변도의 극단을 걷고 있고, 삼장은 오직 살림 일변도의 극단을 걷고 있다. 손오공의 입장에서 푸는 법을 안다면 철저한 죽임은 진정한 살림으로 귀결될 것이다. 삼장의 입장에서 푸는 법을 안다면 진짜 살림은 죽임을 통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손오공의 죽임에 대한 집착을 풀기 위해서는 삼장의 살림이 필요하다. 삼장의 살림에 대한 집착을 풀기 위해서는 손오공의 죽임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해가 필요한 것이다.

세 번째로 요괴가 영감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이에 손오공이 영감을 죽이자 삼장은 그를 축출하면서 파문 증명서까지 써준다. 손오공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 하자 삼장이 몸을 돌린다. 그러자 손오공은 세 개의 변화신을 만든 뒤 본래의 자기까지 더해 사방에서 인사를 한다. 삼장은 별수 없이 손오공의 인사를 받는다. 삼장은 저팔계의 편(색병色病)에 서서 손오공(공병空病)을 부정하고 있다. 양자가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파문 증명서가 내려진다. 그런데 손오공의 멋진 작별의 절은 무엇인가? 그것은 손오공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볼 때 손오공이 사방에서 하는 절은 지극히 대승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실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법이 마음이고 곳곳이 법당이다. 어느 곳이나 이 한 몸으로 절을 하면 거기가 모두 스승의 자리이다. 그런데 손오공에게는 아직 공이라는 중심이 따로 있다. 이 법집으로 인해 그는 화과산 수렴동의 제천대성으로 복귀한다. 사라졌던 자아가 권토중래한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손오공은 태양[日]을 상징하고, 저팔계는 달[月]을 상징한다. 손오공과 팔계가 함께해야 해[日]+달[月]=밝음[明]이라는 해탈의 공식이 성립한다. 저팔계와 손오공의 협업이 있어야 서천여행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백골 요괴 이야기는 손오공과 팔계의 더욱 굳건한 결합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의 서막에 해당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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