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불교의례 ]
방함록, 선대와 후대를 잇는 출가자의 수행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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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0:56 / 조회5회 / 댓글0건본문
안거에 든 선방 스님들은 한철 용상방龍象榜에 법명이 올랐다가 해제와 함께 지워진다. 서로를 공부의 의지처로 삼아 수행했던 대중이,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는다면 왠지 쓸쓸할 법하다. 그 자취는 명망 있는 선승을 중심으로 기록될 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스님들은 중국·일본과 달리,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수행기록을 적극적인 역사로 남겼다. 소중한 수행공동체의 시공간을 갈무리하여 선대와 후대 수행자들을 잇는 단단한 힘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선원의 안거 기록을 ‘방함록芳啣錄’이라 부른다.
수행자의 빛나는 이름
여름과 겨울의 안거 철마다 묶어내는 방함록에는 결제철 선방에서 함께 수행한 대중명단이 빠짐없이 기록된다. 용상방에 붙이는 각 수좌의 법명과 소임은 물론, 승랍僧臘·세수世壽, 출신 사찰 등을 적어서 남긴다. 용상방은 안거를 마치면서 소각하지만, 방함록에 이를 기록해 둠으로써 선원의 전통과 가풍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방함은 ‘꽃다운 명성’을 뜻하는 방芳과 ‘직함·소임’의 함啣(銜)이 함께했으니 ‘수행자의 빛나는 이름’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사회에서 쓰는 ‘방명芳名’이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면, 선원의 ‘방함’은 출가수행자의 직분을 상징하는 셈이다.
처음 방함록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한국불교에 선풍을 크게 일으킨 경허鏡虛 선사에 의해서이다. 격변의 시기인 1899년에 해인사 퇴설선원堆雪禪院의 법주가 된 경허스님은, 안거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그해 동안거부터 방함록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방함을 쓰는 이유는 후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후인에게 보여준다는 뜻은 무엇인가. 몸은 물거품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우니, 경책하고 부지런히 정진할 줄 아는 이는 누구인가. 법의 성품이 본래 공하고 지혜의 빛은 길이 밝으니, 깨달음에 드는 자는 누구인가. 후인이 지금을 보는 것이 마치 지금 사람이 예전을 봄과 같으며, 후인이 후인을 보는 것이 마치 후인이 지금을 봄과 같다. … 이 선당에 안거하는 자는 가히 거울삼아 경계할지니라.

안거를 시작하는 날, 그는 방함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방함을 기록함으로써 후대 수행자들이 늘 선대의 수행을 보게 됨을 엄중히 새겨, 흐트러짐 없이 수행 정진에 임하여 정법을 이어가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선원을 운영하려면 안거 대중이 함께 지켜야 할 규범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에 경허스님은 1903년 범어사 계명암雞鳴庵 선원에서 10조목으로 된 「방함청규문芳啣淸規文」을 지었다. 그 내용을 보면 소임을 구성하는 원칙과 함께, 대중이 오로지 수선修禪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격요건을 분명히 하고, 수행에 장애되는 자를 불허하는 조항을 두었다. 아울러 법랍의 높고 낮음 없이 모든 대중이 울력에 동참토록 하였고, ‘방함 17직명職名’이라 하여 소임을 상세히 구분하였다.

이처럼 방함록에는 약식 청규淸規에 해당하는 대중생활의 기본 수칙을 두어, 대중은 이를 보며 선방 수행의 지침으로 삼는다. 또한 청규에 규정한 대로 방함록과 용상방에는 소임에 따라 분배한 대중의 법명이 나란히 기록되면서, 한철 대중생활의 수행을 차질없이 이어가게 된다. 따라서 청규·방함록·용상방은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방함록을 탐구하는 재미
초기 방함록에 기록된 직명은 조선 후기에 전승된 선원의 소임 내력이 담긴 소중한 자료이다. 1903년 「방함청규문」의 17개의 직명은 조실祖室, 열중悅衆, 선백禪伯, 지전知殿, 지객知客, 원두園頭, 간병看病, 반두飯頭, 정인淨人, 서기書記, 전차煎茶, 채두菜頭, 시두柴頭, 별좌別座, 도감都監, 원주院主, 화주化主이다. 근래의 소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가운데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을 살펴보자.
우선 고려 후기까지 있었던 후원後院 소임으로 ‘전좌典座’가 사라지고 ‘별좌’와 ‘원주’가 등장하여, 조선시대 어느 무렵에 이러한 직책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선종의 『선원청규』에 나오는 전좌는 음식과 공양간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주지 아래 최상위 직인 4지사知事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사찰의 경우, 원주는 후원의 책임자이고 별좌는 원주 아래에서 공양간을 이끌어가는 소임을 일컫는다.

선원의 소임과 일반사찰의 소임은 상통하게 마련이다. ‘별좌는 강원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강원이 있는 사찰에서는 고학년 학인 가운데 음식솜씨 좋은 이가 별좌를 맡았다. 근래에는 별좌 또한 찾기 힘들지만, 이처럼 ‘원주’와 ‘학인 또는 사미·사미니’가 짝을 이루는 한국 특유의 공양간 소임 양상을 방함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또한 용상방과 방함록에 출가자만 기록하는 오늘날과 달리, 재가자와 관련된 소임으로 ‘정인·화주’가 등장한다. 당시 재가자 또는 삭발하지 않은 행자를 ‘정인淨人’으로 두면서 공양 나누는 일을 맡긴 듯하다. 정인은 초기불교에서 출가자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거나 분배하는 일을 금하고 재가자의 손을 빌린 데서 유래한 소임이다. 중국불교에 와서 출가자가 공양간을 관장하게 되었지만, 『선원청규』에 적혀 있듯이 발우공양 때 음식 분배를 위한 정인을 두어 초기불교의 규범을 따랐다. 1903년 이후의 방함록에는 정인 소임이 보이지 않아, 이 무렵은 음식을 분배하는 행익行益 소임이 재가자에서 출가자로 바뀌는 과도기일 가능성이 있다.
‘화주化主’는 선원 운영을 위해 시주를 전담한 소임으로, 출자가·재가자가 모두 해당한다. 이후의 여러 방함록을 보면 화주를 맨 앞에 기재한 선원도 있어, 선원 존립의 토대가 되는 보시 소임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수덕사 견성암見性庵 비구니 선원의 방함록을 보면, 1927년 첫 동안거를 열 때는 화주 소임이 없다가, 1942년부터 청신녀淸信女 2명을 화주로 두었고, 1945년에는 비구니 1명과 청신녀 4명이 화주를 맡았다. 이처럼 방함록에 수행 승려뿐만 아니라 외호外護 재가자의 명단을 함께 기록한 문화는 오래 지속되었다.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선원의 청규를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운영 경비는 선원의 자산으로 충당하되 입방入榜 승려 가운데 재산이 있으면 각자의 비용을 부담토록 하는 다양한 방식을 취하였다. 방함록에 드러나지 않는 운영의 물적 기반이 청규에 담겨 있으니, 서로를 보완하는 자료로써 입체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근현대 대부분 선원은 출가자 중심으로 운영했으나, 범어사·도리사·유점사 선원처럼 우바새·우바이 계를 받았거나 독실한 재가자일 경우 입방을 허용한 곳도 있었다. 선학원禪學院 중앙선원의 방함록에는 1934년부터 1949년까지 재가 여성으로 구성된 부인선원을 따로 둔 기록이 있다. 일찍이 재가불자의 수행을 장려하여 오늘날 시민선방의 효시가 되었기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선농일치禪農一致로 참선과 노동을 병행한 선종 사찰의 면모가 농감農監·농막農幕 등의 직함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선원마다 같은 소임의 명칭이 조금씩 바뀌거나 새로운 소임이 등장하는 양상도 파악할 수 있다.
승가의 수행문화를 꿴 보물
방함록은 선원마다 따로 적어 보관했는데, 1967년부터는 전국 수좌모임인 선림회禪林會에서 각 선원의 자료를 취합해 전국의 안거 기록을 한 권으로 묶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이전 시기인 1899년부터 1967년까지 각 선원에 전승되어 오던 방함록을 근래 조계종 교육원에서 수집하여 『근대 선원 방함록』을 펴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는데, 최초의 방함록부터 지금까지 136년의 수행기록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승가의 수행 문화를 꿴 보물이 되었다. 뜻있는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각 선원의 전통과 가풍, 대중 생활의 다양한 양상을 살필 수 있고, 수좌들의 수행 경로와 흐름은 물론 출가자 개인의 미시적微視的 수행자취까지 더듬어볼 수 있다.
최초의 방함록이 시작된 해인사 퇴설선원을 살펴보자. 1899년 동안거부터 1967년 하안거까지 퇴설선원에서 총 2,292명이 수행하였고, 방함록은 312쪽에 달한다. 경허스님이 선원을 개설하자 당시 제산霽山·용성龍城·초월初月스님 등 빼어난 수좌들이 몰려들었고, 1900년 하안거에는 경허스님의 제자 한암漢巖스님이 서기를 맡아 방함록을 기록하였다. 이후 1910년대에 25명 내외를 유지하였고, 일제 수탈이 극에 달한 1943~1945년에는 10명이 채 되지 않다가 광복 이후 70~80명으로 급증하여 격동기의 선 수행 역사를 읽어 볼 수 있다.

이 무렵 젊은 시절의 큰스님들이 퇴설선원에서 맡은 소임을 보면, 1947년 하안거에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암西庵스님이 정통淨桶을 맡아 해우소를 청소했고, 성수性壽 대선사는 持殿지전 소임으로 법당 관리에 힘썼으며, 범룡梵龍 전계대화상은 등불을 밝히는 명대明坮 소임을 맡아 대중 수행을 뒷바라지하였다.
그 뒤 1967년에 해인사가 총림으로 지정되면서 성철性徹스님이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 해에 총림으로 첫 동안거를 시작한 방함록에는 성철스님의 친필 서문과 함께 눈빛 형형한 당대 수좌들의 법명이 힘차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당시의 동안거에 동참한 백여 명 수좌들이 함께한 기념사진이 전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1899년 경허스님이 첫 방함록을 쓰면서, 제목 아래 써놓은 다음의 당부가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함록을 절대 유실하지 말며 영구히 유전케 하라.
此芳啣錄切勿遺失永久流傳
경허스님의 첫 방함록이 오늘날 해인총림 선원의 방함록으로 136년의 맥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제자 만공滿空스님의 수덕사 능인선원能仁禪院과 견성암 선원을 비롯해 전국의 선원에서 방함록을 계승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첫 동안거부터 기록이 시작된 능인선원의 방함록을 보면, 만공스님은 1946년 입적 전까지 안거 기간에 오늘날 조실에 해당하는 주실籌室로서 선원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0. 수덕사 능인선원.
1941년 능인선원에서 동안거에 든 스님들의 소임을 보면, 성철스님은 마호磨糊를 맡아 대중의 장삼에 먹일 풀을 쑤었고, 덕숭총림의 방장을 지낸 원담圓潭스님은 시자侍者로 조실인 만공스님을 모셨다. 원담스님에 앞서 2대 방장을 지낸 벽초碧超스님은 대중의 수행처를 깨끗이 쓸고 닦는 소지掃地를 맡았다.
비구니 수행처인 견성암 선원 또한 1927년 안거를 시작하면서부터 방함록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만공스님이 이끄는 가운데 여성 출가자들의 수행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첫 안거인 1927년에는 한국불교의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킨 법희法喜스님이 원주를 맡은 것으로 보아, 음식솜씨와 후원 살림살이에도 뛰어났음이 짐작된다.

지금도 매년 하안거와 동안거를 마치면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에서 『선사방함록禪社芳啣錄』을 묶어 각 사찰에 배포한다. 2024년 동안거 방함록을 보면, 전국 94개 선원에 1,379명의 수좌가 정진하였고, 396명의 외호대중 스님이 이들을 뒷바라지하였다. 스님들 또한 철마다 방함록을 보면서 한동안 소식을 알지 못했던 도반을 대중명단에서 반갑게 만나기도 한다. 대중생활의 정수인 선방禪房의 수행공동체 연구가 더욱 다채로워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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