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들 수운과 소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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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1:01 / 조회5회 / 댓글0건본문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사람들 11
이번 호와 다음 호에 소개하려고 하는 네 분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심층 종교의 길을 밝혀준 사람들’의 명단에서 빠질 수 없는 분들이라 간단하게나마 소개하려고 합니다. 네 분은 수운 최제우, 소태산 박중빈, 다석 유영모, 신천 함석헌입니다. 지금껏 외국분들을 다루었지만 마지막 아름다운 피날레로 한국 분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선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와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을 소개하고 다음 호에 다석 유영모와 신천 함석헌을 다루겠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경주 월성군에서 60세 양반 출신 아버지와 과부 한 씨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10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읽어 경서에 통달했지만 서자로서 그 재능을 펼 수가 없어서, 장사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30세 경,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은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에 닥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서 오는 것으로 인식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할 결심을 굳힙니다.
수운은 그 당시 종교들을 검토한 결과 유불선은 기운이 다했고, 가톨릭도 공격성과 흑백논리에 치우쳐 있어 이 나라를 위해서는 부적절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구도의 길을 떠납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보면 집을 떠남이 모든 정신적 지도자가 취하는 영적 여정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그는 집을 떠나 전국을 주유周遊하다가 결국에는 경주 구미산 밑 용담龍潭으로 들어가 대도를 얻기까지 산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60년 4월 5일 37세에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한울님으로부터 “두려워하지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를 세간에 내어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치 말라.”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은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체험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경험했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그 후 1년 동안 한울님과의 소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해 6월부터 포덕布德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시천주侍天主였습니다. 많은 종교의 심층에서 주장하듯이 우리 인간은 모두 우리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각자가 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에 모두는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반상班常·서얼庶孼의 구별이 심하던 그 시대에 가히 혁명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단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 피신하며 『논학문』 등 여러 글을 지었습니다. 1863년 11월 경주에서 체포, 1964년 3월 10일 포덕을 시작한 지 3년이 채 못 되어 대구에서 41세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다행히도 수운에게는 유능한 계승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이는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었습니다. 1861년 동학에 입문하고, 1864년 수운의 처형 이후 제2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태백산 등 각지로 피해 다니면서도 수운의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을 간직하고 다니다가 드디어 간행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했습니다.
또 동학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하여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고 하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같은 심층적 가르침을 확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느 댁에서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는 것을 보고 한울님이 베를 짜고 있다고 하고, 어린이도 한울님이니 때리지 말라고도 했습니다.(동학교도이며 손병희 선생의 사위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제사 지낼 때 위패를 벽쪽으로 세우는 향벽설위向壁設位 대신 내 속에 한울님이 계시니 나를 향해 설치하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특히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공경하라는 삼경三敬 사상을 강조했는데, 이는 현재 생태계의 관심을 대변하는 듯한 혜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0년 간을 숨어서 포교하다가 1898년 4월 원주에서 체포된 후 서울로 압송되어 7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뒤를 이어 3·1 운동의 지도자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3대 교주가 되었는데, 그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손병희 이후에는 교주가 없이 중의제로 바뀌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사상을 이어받은 동학은 지금까지의 상극相剋 시대에서 상생相生의 시대로 바뀌는 개벽開闢을 통해 후천 개벽의 이상 사회를 강조하고, 이러한 과업을 이루기 위한 개인의 수도修道를 중요시했습니다. 마음의 근원을 맑게 지키고[守心] 기운을 깨끗이[正氣] 하는 수심정기는 동학의 핵심 심법心法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수심정기를 위한 도구로 21자 주문呪文을 외우는데,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입니다. “지극한 한울기운 지금 여기 크게 내리소서.”라고 청한 후 “한울님 모셨으니 조화가 자리 잡고, 영원토록 잊지 않으니 만사가 깨쳐지네.”라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은 전남 영광군에서 아버지 박성삼과 어머니 유정천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범상하지 않은 소년으로 7세 때 벌써 청명한 하늘을 보고 우주와 자연 현상에 의문을 품고, 심지어는 인간의 생사와 존재 문제까지도 궁금해하는 등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11세에 산신이 자기의 의문을 풀어주리라 믿고 4년 동안 산성기도를 했습니다. 15세에 결혼하고, 이듬해 처갓집에 인사차 갔다가 고대 소설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해 20세까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20세 때 아버지의 사망 후 구도의 노력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25세부터는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는 대정大定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임을 깨닫는 대각大覺을 이루었습니다. (원불교에서는 교조의 생일이 아니라 대각한 날을 개교일開敎日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여러 종교 경전을 살피다가 『금강경』을 읽고 자기의 경험이 부처님의 행적과 부합된다고 여겨 세상 진리를 밝히는 데 불법을 이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에서 8~9인을 규합하여 ‘불법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휘둘리는 사회를 정신개벽으로 구원하겠다는 종교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17년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허례허식 폐지, 미신 타파, 금주 금연, 저축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자금으로 1918년 간척사업에 착수했습니다. 간척사업의 성공으로 교단이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일반 서민들에게 농지를 제공함으로 교단의 위상이 튼튼해졌습니다.
1924년 교통의 요지라고 여겨지는 전북 익산에 중앙총본부를 건설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정식 이름으로 교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 2대 정산 종법사 때 교명을 ‘원불교圓佛敎’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원불교는 종법사는 익산에 머물고 교정원장은 서울에 머무는 체제로 바꿀 계획이라고 합니다. 원불교 기관으로는 특히 한의학으로 유명한 원광대학교, 원음방송, 기타 여러 개의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소태산 종정은 1943년 5월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6월 1일 53세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익산 원불교 총본부에 있는 대종사 중앙석탑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본 가르침은 『원불교전서圓佛敎全書』에 거의 다 들어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일원상一圓相으로, 이는 우주 만유의 본원인 법신불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또 사은四恩이라고 하여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을 마음에 간직하고 고마워하라고 합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등 계율을 지키되 그 앞에 ‘연고 없이’를 붙여 불가피한 경우를 상정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습니다.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하며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을 이야기하고, 동정일여動靜一如, 영육쌍전靈肉雙全,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 등을 실천하도록 권장합니다.

원불교에서 특히 인상 깊은 가르침은 삼동윤리三同倫理라 할 수 있습니다. ①동원도리同源道理: 모든 종교가 그 근원으로 돌아가면 결국 하나라는 것, ②동기연계同氣連契: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이 같은 기氣로 연결되어 있는 ‘동포’요 한 형제라는 것, ③동척사업同拓事業: 종교인이건 일반인이건 다 함께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힘을 합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요즘 종교계와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생명존중 사해동포 사상, 종교 간의 협력의 강조에 해당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불교도 동학과 마찬가지로 ‘후천 개벽, 다시 개벽’을 강조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운이 무극대도를 받은 경주 수미산 용담에도 가보고 소태산이 대각한 영광과 그의 활동무대인 익산에도 가보고, 여러 차례 천도교 초청으로 강연도 하고 오랫동안 원불교 원음방송에서 정기적으로 대담도 해서 이 두 종교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수운이나 소태산의 가르침이 널리 힘 있게 퍼져 그들이 바라던 후천 개벽 세상이 속히 이르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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