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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를 만들어 낸 불교의 바닷길 ]
태국불교의 뿌리는 아유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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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1:20  /   조회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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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지척거리에 세계문화유산 아유타야가 있다. 오늘의 태국불교를 이해하려면 선행하여 아유타야를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사찰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유타야는 방콕 북쪽으로 64킬로미터, 짜오프라야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한다.

 

태국의 뿌리인 우통 그리고 아유타야

 

아유타야는 1350년부터 1767년까지 존속했던 시암의 왕국으로, 오늘날 현대 태국의 전신이다. 아유타야 사람은 스스로를 타이(Tai)라고 했다.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야유타야는 산스크리트어로 타라발저墮羅鉢底(Dvaravati)였다. 타라발저는 오늘날 방콕 주변에서 6세기∼11세기 후반까지 번성하던 고대 몬족 왕국이었다. 아유타야의 등장은 14세기지만 역사적으로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콕에서 가까운 우통은 기념비적 불교 건축물과 잘 정립된 조각 전통을 가진 대규모 도시로 성장했다. 우통은 아유타야 왕국의 기원이 됐다. 아유타야의 초대 왕인 라마티보디는 도시가 전염병에 휩싸였을 당시 우통의 왕자였으며, 동쪽으로 이주해 아유타야를 건설했다.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는다. 아유타야 왕국의 위치도 우통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사진 1. 오늘날 태국불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우통의 불상.

 

우통에서는 로마령 갈리아 황제의 초상이 각인된 동전도 발굴됐다. 로마에서 타이만을 가로질러 배가 도착했다는 증거다. 또한 스리위자야 불상도 발굴되어 해상왕국과의 교섭도 확인된다.

 

강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사원건설

 

아유타야는 크메르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던 14세기 후반 짜오프라야 계곡의 저지대에서 출현했다. 1세기 동안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집중 권력을 만들어 갔다. 아유타야 건국 이전에 짜오프라야강 하류 계곡에는 크메르 제국, 롭부리, 수판부리(Suphan Buri), 펫차부리(Phetcha Buri) 등 많은 정치체가 존재했다. 아유타야의 주요 라이벌은 북쪽으로 수코타이의 태국인, 서쪽으로 미얀마 페구의 몬족과 미얀마족, 따웅우(Taungoo)족, 동쪽 앙코르의 크메르족이었다. 한때는 미얀마 따웅우 왕조의 침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미얀마 통치에서 벗어난 아유타야는 군사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수코타이는 1419년에 속국으로 축소되어 1438년에 합병됐고, 앙코르 역시 빈번한 공격으로 결국 함락됐다.

 

사진 2. 아유타야의 무너진 불교 유적들.

 

건국 당시부터 유럽인에게 시암으로 알려진 아유타야 왕국은 홍해에서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해상무역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무역국가였다. 동시에 농업국이기도 했다. 넓고 비옥한 평야 한가운데 있는 짜오프라야강과 다른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풍부한 물이 공급됐고, 벼 재배에 이상적이었다. 식량, 특히 쌀, 사탕수수, 팜유, 생강, 과일을 생산해 수출했다.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 분지의 지배와 무역 출구를 제공할 항구의 통제를 목표로 공격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아유타야는 하루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 1350년 어느 날 시암의 수도로 선택됐을 뿐이다. 적어도 1200년경에는 중국과의 교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상인이 거대 사찰을 세웠다. 거대 사찰은 국제무역 상인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사진 3. 아유타야의 와불.

 

아유타야는 강줄기가 모여드는 천혜의 모래톱에 위치해 방어에 유리했으며, 강을 통해 바다로 곧바로 연결됐기에 대외무역에도 문제가 없었다. 삼각주의 풍부한 곡창지대에서 쌀이 생산됐으므로 식량도 걱정 없었다. 이미 국제무역촌이 형성됐기 때문에 왕국의 수도로서 이상적이었다. 

 

강과 바다의 만남이 선사한 동양의 베네치아

 

아유타야는 ‘동양의 베네치아’라 불리던 무역항으로,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다. 무너진 절터의 폐허 속에 앉아 있으면 중국어, 일본어, 인도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따위가 시끄럽게 들려오는 풍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한때 세계의 여행객, 선교사, 모험가를 자석처럼 끌어모으던 도시다.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강을 통해 곧바로 바다로 연결되는 위치에 자리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태국 중세 문명의 꽃인 아유타야의 왕궁과 거대 사찰, 촌락 유적은 강과 바다의 만남만이 줄 수 있는 ‘물의 선물’이었다. 

 

사진 4. 아유타야의 유적을 보수하는 모습.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강을 통한 무역을 통제하고 말레이반도의 일부 주요 항구와 벵골만 해안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 후 넓은 지역의 해상무역권을 확보했다. 아유타야의 첫 해외 상업적 교류 국가는 중국이었다. 이미 13세기 중반에 짜오프라야 분지에서 아유타야보다 앞서 일어난 수코타이(시엔)와 롭부리(로후)의 왕이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명 황제로부터 무역 특권을 얻기 위해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아유타야의 경우 1373년 보로마라차티랏 1세(재위 1370~1388)가 중국으로부터 공식 즉위를 받았다. 1408년 정화는 인도양 해상 원정을 위해 아유타야를 방문했다. 15세기 중반 이곳에는 이미 번성한 중국 상인 공동체가 있었다.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아유타야

 

1448년부터 1488년까지 통치한 보로마트라일로카나토왕 시대에 아유타야는 짜오프라야 분지의 확실한 주인이자 동남아시아의 새 중심지가 됐다. 연대기에 따르면, 아유타야는 16개 공국 또는 도시를 거느렸다. 1600년까지 말레이반도의 일부 도시국가, 즉 수코타이, 란나, 미얀마, 캄보디아 일부가 포함됐다.

 

16~17세기에 아유타야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문화가 번성했다. 나라이(Narai, 재위 1657~1688)왕의 통치 시기는 시암 문화의 황금기로 묘사된다. 시암 궁정과 유럽인 사이의 역사적 접촉, 특히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궁정에 파견된 시암 외교 사절로 유명했다. 1686년 10월 아유타야의 국왕 나라이는 태국 사신을 프랑스에 보내 루이 15세에게 편지를 바친다. 나라이는 교회를 짓는 데도 후원한 것으로 알려진다. 프랑스는 이를 왕이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전면 선교에 나선다. 대규모 선교단이 타이만을 통해 강을 거슬러 아유타야까지 당도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진다.

 

사진 5. 왓 마하탓(Wat Mahathat). 태국 아유타야 불교 유적.

 

해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에게는 해군력이 중요했다. 시암인이나 이 지역에 앞서 살았던 크메르인, 몬족도 선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히 대부분의 선원을 중국에서 아유타야에 제공했다. 중국인은 시암의 항구를 자주 방문하는 다른 외국 무역상보다 더 낮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더 유리한 대우를 받았다. 다른 상인은 대부분 코로만델 해안의 무슬림 아랍인, 페르시아인, 벵골인, 칼링가인이었다.

 

외국인이 왕국의 모든 주요 항구에 정착해 상업뿐 아니라 행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무슬림과 인도인, 페르시아인이 장관, 지방 총독과 요인으로 봉사했다. 무슬림의 역할이 커져 갔으며, 그 결과 아유타야는 여러 무슬림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교도의 상업 지배가 유럽인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기독교 도입이 이슬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을 때, 불교국 아유타야에서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쇠퇴했다.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역

 

중국, 일본 등지의 배가 몰려든 것은 상업성 때문이었다. 시암 자체의 물산뿐 아니라 인도에서 보내온 서구 제품, 거래 품목의 다양성, 동서 교류가 창조한 이국성 등이 상품성을 높였다. 시암 왕국은 상아무역을 독점했다.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는 상아, 코뿔소 등을 중국에, 일본에는 사슴 가죽을 팔았다.

 

동남아시아의 코뿔소 멸종 원인은 제국주의 세계 경영이 촉발한 자연 약탈이 큰 원인이다. 비단과 도자기, 조각된 상아, 은 가공품, 청동 제품, 구리 그릇, 진귀한 차 등이 중국에서 들어왔다. 일본에서는 진귀한 옷장, 부채와 우산, 은제품 등이 들어왔다, 무슬림 무역상인은 인도에서 아편, 옷감도 들고 왔다. 조선시대에 보물로 취급받던 상아는 이 같은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사진 6. 왓 프라 씨싼펫(Wat Phra Si Sanphet). 태국 아유타야 불교 유적.

 

풍부한 배 수리 기술, 아늑한 항만 시설 같은 조건도 번영의 뒷받침이 됐다. 상류의 라오스나 치앙마이에서도 배를 이용해 물산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강과 바다로 열린 길은 아유타야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었다. 접근성도 좋았다. 1년 안에 중국이나 무슬림 상인이 무역 거래를 마칠 수 있는 중간 지점이었다. 아유타야 만입灣入인 타이만에서 침몰된 무수한 정크선이 발견됐다. 중국 무역선이 끊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사진 7. 청동 불두(16C〜17C). 태국 짜오 쌈 프라야 국립박물관(Chao Sam Phraya National Museum).

 

시암의 배는 일본 기록에도 등장한다. 네덜란드와 중국, 시암, 일본의 배가 이곳에서 나가사키를 내왕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중개무역이 활발하게 인도양과 태평양을 오갔다. 아유타야는 동쪽으로 중국과 일본, 나아가 류큐를 상대했고, 서쪽으로는 인도양의 무슬림 상인과 거래했다. 유럽 물자가 무슬림 상인을 통해 동방으로 전달되고, 반대로 중국 도자기 등이 서방으로 나갔다. 아유타야의 강과 바다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중세적 세계 경영’을 성취했다. 태국불교의 배경에 이와 같은 아유타야왕국의 전설같은 서사가 깔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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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분과학문의 지적·제도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융·연구를 해왔다.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등에 기반해 바다문명사를 탐구하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역사민속학회장,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POCC) 등을 거쳤다. 『마을로 간 미륵』, 『바다를 건넌 붓다』,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2024 뇌허불교학술상을 수상했다.
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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