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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금목서 피는 계절에 큰스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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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5 년 11 월 [통권 제151호]  /     /  작성일25-11-05 11:28  /   조회1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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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윤달이 들어 있는 해는 일반 달보다 여유가 있어 우리 선조들은 그동안 미뤄 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거나 마음을 정리하는 데 적합한 해로 여겨 왔습니다. 평소에는 꺼렸던 일도 윤달은 ‘귀신도 쉬는 달’이라 여기고, 조상의 묘를 이장하거나 수의 등을 준비해 두면 액운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집을 고치거나 혼례를 치르기도 했지요.

 

우리 불교에서도 윤달이 들어 있는 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해로 여겨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공덕을 쌓는 기회’로 생전예수재를 거행하거나 삼사순례를 하는 등 다양한 의례와 신행활동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복덕을 증장하는 기도와 법회를 분주하게 준비하곤 했답니다. 특히 성철 종정예하의 생가가 있는 겁외사는 대진고속도로 상의 단성IC와 근접해서 도道의 경계를 넘나들며 삼사순례를 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라 올 초에 주지에게 바짝 긴장하고 순례단을 정성스레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고 했습니다.


기후 변화가 우리 일상에 주는 영향

 

그런데 올봄에 산청군 시천면에서 시작된 산불은 역대 최악의 산불로 고운사의 문화유산까지 소실되는 등 우리 국민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게다가 여름에는 단순한 장마를 넘어선 기록적인 국지성 폭우가 기습적으로 내려 ‘기후 재난’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폭우가 지나가고 나니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어 기후 변화가 일상에 미치는 충격에 정신이 아뜩하기만 했습니다. 무더위를 잊고 살던 백련암에서조차 열대야로 잠을 뒤척였으니, 도심에 사는 분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까 심히 염려되는 여름이었습니다.

 

사진 1. 백련암을 수놓은 무궁화꽃. 사진 서재영.

 

그러다 보니 윤달이 시작되는 7월 25일(윤 6월 1일)부터 8월 22일(윤 6월 29일)까지 한 달 동안 겁외사를 찾는 삼사순례 차량을 보기가 참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특히 영남 지역의 사찰이 산불과 폭우로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그쪽으로 삼사순례를 가면 오히려 수해 복구에 누累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랫녘으로 삼사순례 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겼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금목서를 구해 심어 보거라

 

바깥세상은 이렇게 난리부르스인데, 폭염의 기세가 차츰 꺾이던 즈음에 백련암 마당의 백색 단심 무궁화 80여 그루는 꽃을 활짝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에는 8월 말이면 꽃이 시들었는데, 올해는 전지가 늦어서인지 8월 중순이 지나면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10월 초순까지 만개해서 백련암을 찾는 신도들을 맞이해 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긴 한가위 연휴가 끝나 가면서 꽃들도 하나둘 떨어지니 소납의 마음도 덩달아 텅 빈 듯, 허전함과 쓸쓸함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겁외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는 상좌 일학스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지금 겁외사 마당에 금목서 꽃이 한창 피어 향기가 온 사찰을 감싸고 있습니다. 한번 다녀가시지요.”

 

사진 2. 율은고거(성철스님 생가) 장독대 뒤에 만발한 금목서. 사진 일학스님.

 

참으로 반가운 전화였습니다. 백련암 감원 일엄스님에게 ‘후딱 겁외사 한번 다녀오자’고 제안하여 점심 공양을 마치고 백련암을 나서서 오후 2시 반쯤 겁외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우선 겁외사 금목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하고 몇 년이 지난 뒤의 일로 기억됩니다. 성철 종정예하께서는 당시 원주 소임을 보고 있는 스님에게 “여기 앞뜰에 금목서를 구해서 심어 봐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때 백련암 서쪽 마당 끝 20여 평 남짓에는 그리 마디가 굵지 않은 대나무숲이 있었습니다. 원주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큰스님 고향이 산청군 단성면 묵실인데, 그 동네에 대나무가 많다고 하네요. 그래서 큰스님께서 대나무를 심어 봐라 하셔서 지금 저렇게 대나무숲이 생겼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원주스님은 금목서 두 그루를 구해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착근을 하지 못하고 비실비실하더니 그대로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큰스님께선 안타까워하시며 “금목서도 살리지 못하는 멍충이들”이라고 하시며 혀를 끌끌 차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제가 원주가 되어 일 년쯤 지났을 때 큰스님께서 또 금목서를 심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소납은 대구 도심 출신이라 출가 전까진 땅하곤 아무런 인연 없이 살아와서 밭일만 하면 ‘맨날 터지는 놈’이었는데 이제 금목서 심는 일을 맡고 보니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요새라면 서툴게나마 핸드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볼 수 있지만 그때는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고 깜깜 절벽으로 살던 시절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진 3. ‘당신의 마음을 끌다’, 또는 ‘첫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금목서의 황금빛 꽃송이.

 

금목서를 구해 심고 나서, 이 스님께도 여쭙고 저 스님께도 여쭈어 가며 열심히 키운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이번에도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형 천제스님이 주석하시는 부산 해월정사에 가 보니, 거기는 금목서가 참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겁외사에 금목서를 심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금강굴 불필스님께서 큰스님 생가 복원불사를 하시며 아울러 겁외사까지 지으시고 모든 운영권을 성철스님문도회에 넘기셨습니다. 주지는 상좌들에게 맡기고 저는 들락날락거리며 절을 보살펴 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보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넓은 마당 한 켠으로 덩그러니 드러나서 뭔가 안정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울타리가 될 나무를 심어서 경계를 지으면 훨씬 안정감이 들겠다 싶어서 15여 년 전에 금목서를 물색하여 담을 치듯이 80여 미터의 길이로 집 둘레에 심었습니다. 그것이 잘 자라 이제는 2미터 이상의 울타리가 생기고, 10월 중순쯤이면 황금색 꽃이 만발하고 그 향기가 퍼져 천리향, 만리향과 동급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큰스님께서도 금목서의 향기를 그리워하시며 그 시절에 그렇게 우리들에게 심어서 잘 키워보라고 하셨나 보다 생각하니 새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목서는 75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는 살지 못하는 나무였으니 백련암은 생장 조건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천리만리 가는 향기처럼 큰스님 가르침이 퍼지기를

 

일학스님의 전화를 받고 반가움에 들떠 겁외사로 한걸음에 달려오면서 지난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금목서를 만나리라 기대를 했는데, 전연 딴판의 모습에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스님, 죄송합니다. 금목서의 키가 너무 커져서 법당 쪽에서 바라보면 절이 답답하게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웃자란 금목서 가지들을 정리해서 키를 맞추면 양쪽 다 훤히 보여 사찰 풍경이 더 좋아보이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이번 봄에 상층부를 한 30센티미터 정도 잘라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꽃 풍경이 지난해보다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지금 울타리 금목서는 좀 보잘것없지만 여기저기 고목古木 금목서에 황금꽃이 피어 향기가 진동하니 보실 만합니다.”

 

사진 4. 따사로운 가을볕을 친구 삼아 백련암 마당을 포행하시는 성철스님. 사진 주명덕.

 

소납은 키가 작아진 금목서 울타리에 마음이 팔려 시큰둥해하고 있는데, 일학스님이 고목 금목서 이야기를 하니 어디를 보란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실은 울타리 말고도 고목 금목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동안 곁시늉으로만 봐 왔던 모양입니다. 주지스님을 따라 법당 앞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앞에 활짝 핀 금목서를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금목서 옆에는 그보다 좀 더 둥치가 크고 굵은 은목서가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듯 은빛으로 반짝이는 꽃가지를 희끗희끗 내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굵은 금목서와 은목서가 여기 있었단 말이지. 그동안 난 무엇을 보고 다녔단 말인가?’ 갑자기 죄송함과 야속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스님, 저기 생가터 들어가는 담벼락에 저희 키만 한 은목서가 있고, 생가 장독대 뒤에도 금목서가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 있습니다.”

일학스님을 따라 장독대에 다다르니, 말 그대로 금목서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성철 종정예하께서 백련암에서 “금목서! 금목서!” 하시던 그 간절하심을 오늘 여기 이 생가에 매 가을마다 오셔서 풀고 계셨구나 싶어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금목서에 대한 감동을 안고 백련암에 돌아와 불필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늘 겁외사에 가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받고 왔습니다. 저는 울타리 대신 제가 심어 놓은 금목서만 생각했지 곳곳에 있는 금목서 고목에 핀 황금꽃의 아름다움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여기저기 있는 금목서와 은목서의 모습을 보고 너무 감동했습니다. 도대체 그 고목들을 어디서 구하셨는지요?”

 

“아이쿠, 나도 이제 나이가 90이 되니 얼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겁외사를 창건하고 조경을 할 때 큰스님의 신실한 재가제자였던 화승그룹의 현승훈 회장님이 무엇보다 좋은 나무를 심어야 한다며 무척 애를 써주신 기억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겁외사 경내와 율은고거(큰스님 생가) 곳곳에 둥치가 크고 굵은 귀한 나무와 꽃나무들이 잘 자라서 세월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철 큰스님의 열반 32주기

 

이제 곧 성철 종정예하의 열반 32주기가 다가옵니다. 11월 5일부터 9일까지 백련암에선 4일4야 사만팔천배 참회기도가 이어지고, 8일에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해인사 운양대 큰스님 사리탑전에서 3천배 참회기도가 봉행될 예정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라는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해입니다. 겁외사 경내를 가득 채운 금목서 은목서의 향기처럼 우리의 기도가 천리만리에 퍼지도록 두 손 모으고 나를 돌아보는 절을 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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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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