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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팔정도, 열반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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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8 월 [통권 제1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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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와 연기법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등각의 진리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깊고 오묘하여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처님은 고심 끝에 침묵하기로 결심했지만 범천(梵天)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찾아왔다. 그는 세상에는 아직 때가 덜 묻은 중생들이 있음으로 그들을 위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려주실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부처님은 범천의 권청을 받고 설법할 대상을 찾다가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비구를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 길로 베나레스 녹야원으로 찾아가 오비구에게 법을 설하시니 이것이 바로 처음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 초전법륜이다. 그리고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이 사성제와 팔정도에 관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으셨는데 왜 사성제를 설하셨을까?
이유는 사성제는 연기법에서 나온 법문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이 심오한 깨달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내용이라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연기법을 토대로 실천에 초점을 두고 구성된 법문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구성된 사성제는 인간에게 고(苦)가 발생하는 과정과 그 고가 소멸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고(苦)’와 ‘집(集)’이 인간의 고와 그 고가 발생하는 인과관계가 얽혀가는 악순환의 길이라면 ‘멸(滅)’과 ‘도(道)’는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로 가는 실천이라는 선순환의 길이다. 고의 발생으로 가는 앞의 것을 유전연기라고 하고, 고의 소멸로 가는 뒤의 것을 환멸연기라고 한다.

 

따라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연기법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고의 해소를 위한 구체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구경』에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향기없는 꽃과 같다고 했다. 교리가 아무리 심오할지라도 구체적인 실천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원효 스님도 “앎과 실천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했다. ‘불교(佛敎)’를 달리 ‘불도(佛道)’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을 통해 나의 삶이 되므로 불교는 ‘우리가 가야할 길’로 부르는 것이다.

 

연기법도 논리적이고 철학적 설명으로 끝난다면 사변적 지식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여래가 깨달은 연기의 진리는 사성제 팔정도라는 실천의 길로 제시된다. 사성제 팔정도는 삶 속에서 연기를 실천하는 것이며, 고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가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는 실천에 초점을 두고 설해졌으므로 사정제의 핵심은 팔정도로 대변되는 실천에 있다. 사성제를 지식으로만 이해하면 교리에 머물고 말겠지만 팔정도를 실천하면 삶을 바꾸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열반으로 가는 길

 

『대지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의 일체 지혜는 큰 수레가 되어 팔정도의 길을 따라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했다. 부처님의 지혜는 피안의 언덕으로 가는 수레라면, 그 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법이 지혜의 수레라면 사성제 팔정도는 그 수레를 열반의 세계로 끌고 가는 동력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의 지혜가 팔정도의 길로 갈 때 비로소 고통을 여의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은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실천을 통해 역사화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를 통해 여래가 깨달은 연기와 중도의 지혜는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로 불리는 팔정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로써, 연기와 사성제 그리고 중도와 같은 불교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그런 이치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말한다.

 

둘째, 정사(正思)는 바른 사유로써, 생각을 바르게 갖는 것을 말한다. 『반니원경』에 따르면 정사유란 온갖 세속의 일로부터 초연하고(出離), 분노하지 않으며(無????), 다른 생명을 해지치 않는 마음(不害)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정어(正語)는 바른 언어로써, 진실하고 부드러우며 화해와 평화를 위한 언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에 해당하는 거짓말(妄語),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아첨하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진실하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넷째,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로써, 몸으로 짓는 살생, 도둑질, 사음과 같은 세 가지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정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생명을 살리는 방생(放生), 남에게 베푸는 보시(布施), 계율을 잘 지키는 지계(持戒)를 생활화 하는 것이다.

 

다섯째,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로써,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조달하며 목숨을 올바르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명은 올바른 직업과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초기 경전에 따르면 불자는 점성술, 살생, 도박, 투기 등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반니원경』에 따르면 “악행을 억제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고,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갖가지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곱째, 정념(正念)이란 바른 마음집중으로써, 사념처(四念處)에 마음을 바르게 머무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는 네 가지의 본질은 무상하고, 고통스러우며, 실체가 없는 무아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치를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할 때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 정정(正定)이란 바른 선정으로써 마음이 온갖 경계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여 고요한 삼매에 드는 것을 말한다.

 

팔정도의 핵심은 중도

 

이상과 같은 팔정도설은 연기설로부터 도출된 것이므로 초기 불교의 핵심사상과 이어져 있다. 팔정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견해에서 시작하여 행위(身)와 말(口)과 마음(意)이라는 삼업을 포괄하고 있다. 팔정도의 내용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열 가지 악업을 멈추고 십선업에 대한 실천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팔정도는 초기불교에서 출발하여 십선(十善)이라는 대승불교의 보편적 실천으로 확장된다.

 

팔정도의 모든 항목은 하나같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은 정견이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정견이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숫자로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여행을 갈 때 먼저 보고 떠나는 것처럼 정견은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지도를 보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셋째, 집을 지을 때 비록 여러 가지 재료와 대들보가 중요하지만 대지가 가장 우선인 것처럼 팔정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성철 스님도 정견으로 모든 법을 올바로 보지 못하면 팔정도의 나머지 항목은 제대로 성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모든 법을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보아야 올바른 사유를 하게 되며, 마음이 올바르면 올바른 언어와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잡아함』28권에서도 “해가 뜨기 전에 먼동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타난다.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이 해탈한다.”고 했다. 정견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버리고 지혜의 눈을 뜨면 마치 여명이 밝아오듯이 삶에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견은 단순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해탈로 인도하는 핵심적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팔정도의 핵심이 되는 정견은 중도를 바로 깨친 것이라고 했다.

 

『잡아함 전법륜경』에도 “여래는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증지(證智)·등각(等覺)·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중략) 중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래는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고, 그 중도가 중생의 눈을 뜨게 만들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최고의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그 중도는 다름 아닌 팔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철 스님은 팔정도는 구경의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보았다. 팔정도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불교사상의 핵심인 중도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심천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 전체 불교를 중도라는 일미의 가르침으로 회통해 내는 스님의 정신은 팔정도에 대한 관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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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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