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以心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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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4 년 11 월 [통권 제1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85회 / 댓글0건본문
1교시 시작하고 나서 지각생 하나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온다. 칠판을 지우던 교사가 돌아보고 손에 든 지우개를 흔들어 보인다. 지각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씩 웃는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교실 풍경이다.
25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세존이 어느 날 많은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던 중에 가섭이 늦게 도착했다(이 분도 ‘지각대장’이라지 않은가). “왔냐?”하고 반가운 마음에 꽃을 들었고 가섭이 답례로 “또 늦어 죄송해요.”하면서 씩 웃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오히려 너무 심심해서 의아했다. 별일도 아닌데 선종에서는 어째서 이것을 첫째로 꼽아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상징하는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을까. 이 일로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가섭에게 맡겼다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고…. 평범한 몸짓에 담긴 그 깊은 의미를 아무래도 모르겠다. 그 사람이 세존이었고 또 그 사람이 가섭이었기에 그럴 수 있나 보다 하고 지나갔다. 싱거운 이야기가 또 있다.
위산이 하루는 방에 누워 있는데 제자 혜적(앙산)이 들어왔다. 위산이 몸을 돌려 등지고 눕자 혜적이 “제가 제자인데 저한테까지 예의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하였다. 위산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앙산이 그냥 나가버렸다. 위산이 “혜적아!” 하고 불러 세웠다. 혜적이 돌아보자 위산이 “내 꿈 얘기 좀 들어보라.”고 하여 앙산이 듣는 자세를 취했다. “해몽을 좀 해달라.”고 하자 앙산이 대야에 물을 떠오고 수건을 가져왔다. 위산이 세수를 마치자 이번에는 제자 향엄이 들어왔다. 위산이 향엄에게 “내가 좀 전에 혜적이랑 신통을 한 바탕 부렸다.”고 하니 향엄이 “안 그래도 다 알고 있다.”고 하였다. 위산이 “그럼 한 번 말해보라.”고 하자 향엄이 차를 한 잔 다려 왔다. 위산은 두 제자의 신통이 사리불과 목건련보다 낫다고 탄복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의아했다. 아침에 문안드리고 세숫물 대령하고 차 다려 올리는 게 뭔 대단한 신통이라는 건지…. “그래도 위산이고 그래도 앙산인데,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야. 내가 모를 뿐이지.” 아직도 이러고 있다.
이번에는 한 중학교 교사의 이야기다. 방과후 학습 때마다 땡땡이를 치는 아이가 있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학교 근처 피시방으로 도망을 간다. 겨우 찾아서 데리고 온 다음 왜 도망을 갔느냐고 물으면 “그냥요.”라고 답한다. 이유라도 알아야 용서가 되겠는데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그냥요.”는 묻는 사람의 꼭지를 돌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을 진정하고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으냐고 물으면 “아니요.”라고 답한다. 이 “아니요.”는 두 번째로 꼭지를 돌게 만드는 말이라고 한다. 그럼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그냥요.” 이 교사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그냥요.”와 “아니요.” 사이에서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이 학생을 피시방에서 잡아오다가 문득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실은 그 자신도 오늘 아침에 그냥 학교에 왔고 그냥 밥을 먹었고 심지어 이 학생을 잡아오는 것도 그냥 하고 있는데 왜 이 학생에게는 모든 것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 학생의 “그냥요.”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짜 ‘그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소통을 끊은 것은 학생이 아니라 자신 아니었을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날 학생과 앉은 자리에서 학생이 다시 “그냥요.”라고 답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에게 “선생님도 그냥 산다. 너랑 똑같다. 가봐라.” 했단다. 놀란 학생이 “샘, 진짜 그냥 가도 됩니까?”하자 이 말을 듣고 교사는 배꼽 빠지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래, 그냥 가봐라.”하면서 웃어줬단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며 교사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 나아가 인간의 삶이 보였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냥 살잖아요. 무의미를 견디면서요. 그런데 왜 유독 학생들에게는 의미를 강요할까요?”(『단속사회』 엄기호, 창비, 2014)
몇 학년인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무섭다는 중2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것과 약간 다른 버전도 있다. “씻어라.” “싫어요.” “이거 누가 그랬어?” “몰라요.” “왜 공부 안 해?” “그냥요.” 이런 식이다. 부모를 돌게 만드는 3단 콤보, “싫어요.” “몰라요.” “그냥요.”를 ‘중딩의 3요’라고 한다는데 임제의 3요 못지않게 깊은 데가 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만 열심히 해서 교사가 된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 심오한 3요를 모른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기호의 또 다른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는 아이들을 상대로 어찌할 바 몰라 두려움을 느끼는 기막힌 사연들이 많다.
그래서 ‘그냥’으로 깨달음을 얻은 교사의 이야기를 읽고 하마터면 “유단잔가?”할 뻔했다. 선종의 고수들도 불법(佛法)의 도리를 한 짐 짊어지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제자에게 그냥 짐을 내려놓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그냥’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을 때 그냥을 가지고 제자와 그냥 만날 수 있었다. 배꼽 빠지게 웃었던 그 대목에서 꽉 막혔던 제자와의 관계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 니 맘 내가 안다.” 세존의 염화미소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세간에서는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교사는 자기 삶을 들여다보았기에 남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제자와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교사가 앞으로 내공을 더 쌓는다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지 않을까.
말없이 웃어 보인 가섭의 몸짓 속에, 매일같이 스승을 시봉하는 앙산의 세숫대야 속에 무슨 심오한 불법이 들어 있나. 없는 의미를 찾느라 고생하지 말고 ‘아이고~ 의미 없다’만 알아도 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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