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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연기설과 우주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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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12 월 [통권 제2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9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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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에 대한 두 입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가 장안에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는 광활한 우주를 소재로 하고 있어 우주의 생성과 신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광활한 우주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종교계를 대표하는 창조설과 전변설 그리고 과학을 대표하는 빅뱅설이 양대 축을 형성해 왔다.

 

그런데 최근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뉴스가 하나 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빅뱅설과 다윈의 진화론이 창조설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교황청 과학원이 개최한 ‘자연의 진화개념’이라는 회의에 참석한 교황은 이상과 같이 말하며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강조했다. 외신은 이를 근거로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 같은 사이비 과학에 대해 교황이 단호히 부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창조론은 기독교 교리의 출발이다. 창조론의 관점에서 볼 때 빅뱅은 하나님의 창조행위 밖의 일이므로 수용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 두 주장이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교황의 발언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종교가 과학적 사실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교황은 클런치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권투 시합을 하다가 상대의 공세에 밀리게 되면 상대방을 껴안고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클런치다. 작금의 형국은 과학에 의해 수세에 몰린 종교가 정면대결 대신 과학을 껴안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빅뱅설은 어떤가?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빅뱅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 대폭발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는 학설이다. 빅뱅설에 따르면 태초의 우주는 무한대에 가까운 밀도와 온도를 갖고 있지만 부피는 0에 가까운 점에 불과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들이 무(無)에 가까운 작은 점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우주시간 0초의 순간 대폭발과 함께 물질과 에너지들이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은하계와 천체들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물론 인도 종교에도 창조론에 해당하는 교설이 있는데 브라마니즘에서 말하는 전변설(轉變說)이 그것이다. 전변설에 따르면 태초에 유일한 정신적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일체 만유가 변화하여 생성되었다고 한다. 태초에 브라흐만이라는 근본원리가 자신을 무한히 확장시켜 우주와 온갖 사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연기설, 불교의 우주론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우주와 존재의 기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까? 성철 스님은 누군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묻는다면 연기설이라고 답할 것이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연기설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는 관계성을 기본으로 하는 교설이다. 연기설의 핵심은 모든 존재는 수평적 상호관계 속에서 성립되고, 존재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유지되고 변화하며, 상호관계 속에서 소멸해 가는 법칙을 담은 교설이다. 이런 관계를 논리적으로 밝힌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하나는 시간적 인과(因果) 관계로 보아서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만물의 존재원리로 보는 해석이다. 먼저 시간적 인과관계로 보면 이렇다. 십이연기는 ‘무명·행·식·명색·6입·촉·수·애·취·유·생·노사’라는 12지 범주로 설명된다. 무명(無明)으로부터 행(行)이 나오고, 행에서 식(識)이 나오고 이런 식으로 계속 전개되어 ‘유(有)’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적 순차성으로 십이연기를 해석하면 무명(無名)이 곧 존재의 근원처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십이연기설은 우주와 존재의 생성을 설명하는 이론이거나, 모든 것은 무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교설은 아니다. 성철 스님은 연기를 시간적 발전관계로 보아서 존재의 생성으로 해석하면 연기설도 창조론이나, 전변설과 같은 맥락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경고한다. 무명에서 행이 나왔고, 행에서 식이 나왔고, 이렇게 하여 생과 사가 있고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설을 생성의 원리로 해석하는 것은 후대에 등장한 왜곡된 해석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설명이다.

 

불생불멸과 연기설

 

앞서 살펴본 창조설, 전변설, 빅뱅설처럼 우주와 존재의 기원에 대한 주장은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들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만유는 하나의 어떤 근원과 시간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창조설은 신으로부터, 전변설은 태초의 브라흐마로부터, 빅뱅설은 무의 상태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시작됐다고 한다.

 

둘째는 만유를 있게 한 태초의 원인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출발이 되는 신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따라서 창조설이든 빅뱅설이든 태초라고 전제하고 있는 그 상황 자체가 이미 태초가 아닌 셈이다. 아무 것도 없어야할 태초에 이미 신이 있고, 엄청난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존재와 우주는 어느 한 순간 어떤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갑자기 생겨나거나, 스스로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창조론은 차치하고 과학계의 정설로 믿고 있는 빅뱅설도 마찬가지다. 빅뱅설이 정상우주론과 경합을 벌이다가 학계의 정설로 정리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어떻게 있었는지, 요동치는 엄청난 에너지가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근원적 답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는 씨앗에서 탄생했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단 1세대만을 놓고 본다면 나무가 씨앗에서 나왔다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씨앗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따라서 창조설과 빅뱅설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긴 사이클 중에 어느 한 과정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아무것도 없었던 태초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우주의 탄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까?
불교는 우주의 기원과 끝에 대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우주는 처음부터 생성도 없었고, 완전한 소멸도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연기의 근본은 ‘진여(眞如)’를 설명하는 것인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연기설에 대해서 존재의 발생으로, 시간적 순차성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연기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화엄의 법계연기론에서 ‘성기(性起)’설에 대한 이해도 그 중에 하나다. 성기에 대해 ‘일어난다〔起〕’는 말에 착안해서 ‘생겨 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는 것이 우주에 대한 불교의 관점이다.

 

그럼에도 연기설에 대해 존재의 생성으로 보는 시간적 인과관계설과 존재론으로 보는 시각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해 왔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라고 못 박았다. 연기설은 모든 존재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성철 스님은 왜 불교의 우주론으로 연기설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음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되기 때문이다.

 

연기란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성질〔相依性〕’이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처럼 시간적 순차성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성으로 규정된다. 만물은 “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설의 관점에 입각해 보면 어떤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만유가 나올 수는 없다. 나아가 하나의 근원적 시점으로부터 한쪽방향으로 흐르는 시간도 있을 수 없다. 현재의 한 순간에는 아득한 과거와 미래와 서로 응축되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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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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