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밥심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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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1 월 [통권 제2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03회 / 댓글0건본문
또 한 해가 넘어간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올해는 쇼크 받은 심장에 더 큰 쇼크가 밀려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꼽아 보자니 먼저 이들이 떠오른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맞아 죽은 병사, 살 길이 막막해 자살한 세 모녀, ‘국밥 한 그릇 드시죠. 개의치 말고’를 남기고 자살한 쪽방촌 노인, 한 가수의 어이없는 죽음,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자살한 경비원….
사고가 났는데도 수습이 안 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땅콩’을 먹으며 ‘찌라시(오빠, 내 카톡 뒤지지 마)’를 읽다가 생각해 보니 아직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벌어놓은 돈도 없이, 직장도 없이, 그것도 사대강건(四大康健)한 채로 살아 있다니. 밥을 굶어 본 적이 없고 입맛을 잃어 본 적도 없으니 그 또한 신통한 일이다. 불보살의 가피와 주위 사람들의 보살핌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꼬박꼬박 챙겨먹은 밥 덕분이 아닐까 하고 제일의(第一義) 공덕을 밥에게 돌려 본다.
한 달 전에 친구 둘과 여행을 갔다가 어느 스님의 토굴을 방문했다. 도착하니 어두워진 뒤라 뱃속에서는 연신 쪼르륵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초면에 제대로 인사를 드릴 틈도 없이 스님이 차려온 밥상부터 받았다. 김치와 된장으로 차려진 소박한 밥상이 수랏상 못지않았다. 그 밥을 먹고 나니 새 힘이 돋았는지 어두워진 토굴이 눈에 들어왔다. 숲 속에 방 하나, 부엌 하나, 푸세식 똥간 하나, 끝. 나무를 때서 방을 덥히고 물도 데워 쓰는, TV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는 그런 곳이었다. 난생 처음 본 토굴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단순함에서 저런 간지가 나는 것일까.
토굴 주인은 20년 넘게 선방과 토굴을 오가며 참선을 하신 분이라고 한다. 며칠 뒤 결제를 앞두고 선방에 갈 차비를 하고 계셨다. 얼마 전 평생 참선을 해 오신 큰스님이 조계종에서 탈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착잡하였는데 우리 불교에 아직 결제라는 제도가 있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다. 부처님 때부터 있어왔던 제도가 지금도 이어진다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진다. 불교계에 이순신이 있다면 아마도 “신에게는 아직도 눈 푸른 결제 대중 몇몇이 남았사옵니다.”라고 할 일이다.
선방은 구경한 적이 없는데 친구가 어느 지면에 선방 풍경을 엿보게 해주는 시를 소개하였기에 옮겨 본다. 부안 내소사 주련에 적힌 글이라고 한다.
탁명종락우죽비鐸鳴鐘落又竹毘
봉비은산철벽외鳳飛銀山鐵壁外
약인문아희소식若人問我喜消息
회승당리만발공會僧堂裏滿鉢供
목탁이 울리고 종 내리고 죽비를 치니
봉황새는 은산철벽 밖으로 날아가 버리네.
만약 누가 나에게 희소식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회승당의 만발공양이라고 하리라(박상준 번역, <법보신문> 연재)
친구의 재치 있는 해설도 슬쩍 끼워 원고 매수를 채워 본다.
“봉황새는 목숨과도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치열한 문제의식의 화두이다. 그 치열한 화두도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는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목탁이 울리고 종소리가 잦아들 때까지만 해도 입술 가에 남아있던 봉황새가 방선을 알리는 죽비가 쳐지면 그만 은산철벽을 뚫고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깜깜한 사방 천지에 길이 막혔고 앞에는 오직 은산철벽. 뚫기 어려운 그곳을 향해 온몸을 부딪쳐 결전을 치르고 있을 선방 스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상이 잘 안 된다. 오히려 밥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밥 따위에 집착할 리 없는 선방 스님들도 밥종 소리에 봉황을 날려 보낸다 하니 몸을 가진 중생은 예외 없이 밥심으로 산다 하겠다. 잠시 이런 저런 망상에 빠져 있다가도 쪼르륵 종소리가 올라올 때는 어김없이 실존의 주인공을 마주하지 않으실까. 부디 밥 잘 드시고 척추기립근이 무탈하여 희소식 만나시기를….
연말결산을 해 보니 염불도 참선도 하지 않고 밥만 착실하게 먹었다. 밥 먹다 보니 나이도 어김없이 더 먹게 되었다. 그다지 잘하지도 못하는 밥벌이로 많은 시간을 보냈으나 앞으로도 여전히 밥을 위해 바쁠 예정이고 밥심으로 살 것이다. 누군가 먹지 못하고 간 밥, ‘국밥이나 한 그릇 드시죠.’로 남기고 간 절실한 밥을 위해.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가끔 이렇게 안부를 물을
것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
해가 바뀌는 길목에서, 없던 신심을 겨우 일으켜 축원문을 읽어 본다.
제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새해에는 모두가 ‘사대강건 육근청정…염불자 삼매현전, 간경자 혜안통투, 참선자 의단독로…’
이어서 주위의 각각 등 보체에게 이렇게 축원한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며 몸에 갇혀 계신 엄마, 마음에 기쁨 있으시기를. 8개월 째 시급인턴하며 자본에 등 털리는 조카, 그딴 회사 그만두기를. 마트에서 일하는 동네 친구, 갑질하는 진상 퇴치법 연구하기를. 물, 공기, 다음으로 담배가 필요한 흡연자, 이제는 쫌 그만하시기를.
원고를 쓰고 보니 열두시가 넘었다. 배가 고프다. 야참으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포만감에 개다리소반을 발로 저만치 밀어놓고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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