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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삼승과 일불승 그리고 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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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2 월 [통권 제2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0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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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를 건너가는 배

 

절에서 망자를 천도할 때 반야용선이라는 배가 등장한다.

지혜의 배를 타고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가라는 염원의 표현이다. 이처럼 종교는 피안으로 건너가는 뗏목이나 배로 상징되기도 한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말이 바로 불교를 배로 표현하는 것이다. ‘승(乘)’이란 범어 ‘야나(Yāna)’에서 온 것으로 배나 수레와 같은 ‘탈 것’을 뜻한다. 중생이 사는 세상이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라면 고해의 저편에는 열반의 세계가 있다.

 

고해의 저편에 있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타는 배가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승’이다. 따라서 승이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나 수행법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 배의 크기에 따라 대승이나 소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승(大乘)이란 함께 타고 가는 큰 배라는 뜻인 반면 소승(小乘)은 자기 혼자만 타고 가는 작은 배라는 뜻이다. 물론 소승이라는 이름은 대승에서 동체대비의 정신을 강조하고, 자기 수행에 치중하는 부파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승’이라는 말은 대승과 소승이라는 구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천승(天乘), 인승(人乘) 등과 같이 오승(五乘)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표적인 것이 삼승(三乘)이라는 개념이다. 대승과 소승이 피안으로 가는 배의 크기에 관한 것이라면, 삼승은 배의 성격에 따른 구분으로 다음과 같다.

 

피안으로 가는 세 가지 배

 

첫째는 성문승(聲聞乘)이다. 글자의 의미로 보면 ‘소리 들음의 배’라는 뜻이다. 원래 성문이란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고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제자들이다. 이들을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은 부처님의 음성이다. 따라서 성문은 진리의 음성이라는 배를 타고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간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중생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보살이 부각됨에 따라 성문은 소승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성문들도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아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성문승으로 분류되는 무리들은 생멸의 견해를 벗어나지 못한 수행자들이라고 했다. 사성제를 탐구하여 공부에 진전이 있긴 있지만 그 경지는 완전한 열반이 아니라 유여열반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이다. 글자의 의미로 보면 ‘연기의 깨침이라는 배’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부처님께서 설한 연기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사람이다. 연기법을 자각함으로써 무명을 밝히고 고통에서 벗어났음으로 연기를 깨닫는 것이 고해를 건너가는 배가 되는 셈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피안으로 건너간 성문과 달리 연각승은 혼자서 연기의 진리를 깨닫는 수행자들이므로 달리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한다.

 


사진=서재영

 

성철 스님은 연각승이 비록 십이연기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지만 중도의 이치를 바르게 깨친 경지는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생멸의 관점에서 십이연기를 관하기 때문에 여전히 치우친 변견(邊…見)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연각은 중도를 바로 깨치지 못했음으로 이들 또한 유여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보살행의 배’라는 뜻이다. 성문과 연각은 진리를 깨닫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자신의 해탈에 몰입한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이들을 ‘작은 배’라는 뜻에서 소승이라고 폄칭했다. 하지만 보살은 중생을 향한 끝없는 실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무한한 실천이야말로 자비의 실현이며, 그것이 불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승에서는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보살행을 고해를 건너가는 큰 배로 삼는다.

 

성철 스님은 보살승에 대해 “남을 위해서라면 내가 해탈하는 것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만 번 가도 좋다는 대보리심을 발해서 육도만행을 닦는 사람”이라고 했다. 끝없이 남을 돕는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마침내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배로 삼는 것이 보살승이다.

 

일불승과 다승불교

 

대승의 관점에서 보면 성문과 연각은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므로 잘못된 것이다. 반면 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승이 바른 불교가 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부처님의 근본 입장은 성문승도 아니고 연각승도 아니며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이라고 했다. 그 근거로 “시방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 있을 뿐 이승과 삼승은 없다”는 『법화경』의 말씀을 들고 있다. 오직 일승인데 상황에 따라 성문과 연각을 말하고, 때로는 보살을 보태 삼승을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승이란 무엇인가? 스님은 일승이란 “진여법계를 바로 깨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 진여법계를 바로 깨친 사람은 성문과 연각처럼 생멸의 관점에서 연기와 사성제를 이해하거나,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서 끝없이 보살행만 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일승이란 “오직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를 바로 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각각의 탈 것은 진정한 배가 아니다. 고해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배는 일승뿐이기 때문이다. 일승은 달리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타는 유일한 배’라는 뜻이다. 말씀만을 듣는 것도 아니고, 연기의 진리를 생멸적으로 깨닫는 것도 아니고, 보살행만 실천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경부선을 타야하듯이 불자들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해탈을 얻고 ‘부처님의 집〔如來家〕’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이 타는 그 배는 ‘중도를 바로 깨치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들은 성문이든, 가르침을 궁구하여 연기를 깨친 연각이든, 무한한 자비심으로 실천하는 보살이든 핵심은 중도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해를 건너갈 수 있으며, 그것만이 진정한 해탈로 가는 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불승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첫째,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이 타는 배를 타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부처님의 수레를 탈 수 있다는 뜻이며, 모든 중생이 본래부처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 제자들은 삼아승지겁을 돌아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쳤음을 강조한다. 누구나 바른 진리를 깨달아 금생에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삼승이 방편이라는 것은 아득한 세월동안 말씀만 듣거나, 교리만을 연구하거나, 봉사만 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배를 타고 금생에 깨치고 여래의 집에 도달하는 것이 일불승의 핵심이다.

 

둘째, 대승과 소승이라는 담론은 배가 크냐 작으냐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불승은 배의 크기가 아니라 피안으로 가는 배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전환된다. 자기 수행과 해탈만을 추구하는 성문과 연각은 소승으로 폄하되고, 끝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살은 대승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부파불교의 전통이 자신의 이익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그런 편견을 부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보살승이라고 보았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보살승 역시 방편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승이냐 대승이냐는 무의미하다. 관건은 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배가 피안으로 가는 배이냐, 고해의 격랑을 떠도는 배이냐이다.

 

셋째, 일불승의 배는 어떻게 탈 수 있는가이다. 성철 스님은 부처님의 배를 타고 여래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했다. 여래의 배를 타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야 하고, 참선은 화두를 참구하여 깨치는 것이다. 참선 수행을 통해 화두를 바로 깨치는 것이 완전한 해탈인 무여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소승이나 대승도 아니고 삼승도 아니다. 혹자는 초기불교가 대안이라고 하고, 혹자는 대승불교가 대안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는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일본불교, 서양불교 등이 혼재하는 다불교시대가 되었다.

 

일불승의 정신이 새삼 중요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작금의 상황 때문이다. 다양한 불교전통이 갖는 차이를 부각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갈등만 고조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전통을 종합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한국불교는 대승도 소승도 아닌 다승(多乘)불교가 되어야 한다. 다승불교는 수많은 전통이 난립하는 불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불승의 논리로 보면 다승이 곧 일승이기 때문이다. 삼승이 방편이었듯 다승불교 역시 방편적 구분이다. 근기와 취향에 따른 접근은 다양하고 형식과 그릇은 다승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다양한 배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다승불교는 일승으로 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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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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