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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악취공과 만법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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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10 월 [통권 제3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9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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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의 유론을 논파하다

 

불교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불교는 근본불교와 부파불교로, 대승불교는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으로 대별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불교의 근본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부파불교 시대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각 부파의 독립적 해석이 진행되고, 이에 따라 교리도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인도불교에서 그 양상은 부파불교의 유론-중관학의 공사상-유식학의 만법유식으로 전개되면서 상호 영향과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파불교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든 존재는 실체가 있다는 유론(有論)이다. 대표적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부파의 이름 자체가 ‘일체가 모두 있다고 설하는 부파’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핵심은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로 압축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실재하며, 존재의 본체는 항상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사유를 담고 있다.

 

이런 주장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파불교의 유론에 대응하여 등장한 사상이 중관사상이다. 용수보살은 설일체유부의 사상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삿된 견해로 파악했다. 그는 유부의 실재론적 세계관을 논파하기 위해 반야의 공관(空觀)에 입각하여 존재의 실체는 공하다는 ‘무견(無見)’을 주창하게 된다.

 

매일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불자라면 반야의 공관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과격한 주장인지 알 것이다. 일례로 반야심경에서는 오온(五蘊)도 없으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도 없으며, 심지어는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고 설한다. 오온, 십이처, 십이연기, 사성제 등은 불교교설의 기본을 이루는 내용들인데 이것을 하나하나 부정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핵심 내용이 연기설(緣起說)인데 그와 같은 십이연기도 없으며, 초전법륜에서 5비구에게 설법한 사성제마저 없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불자들은 모두 공하다면 굳이 그런 교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런 혼돈에 빠지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중요한 단서를 하나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是故空中)’이라는 구절이다. 반야의 공사상과 중관사상은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이라는 관점에서 일체 만물을 설명한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온이 공함으로 마땅히 나(我)도 없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경계(境界)도 없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도 공하고, 그 대상이 되는 육경도 공하다. 나아가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과정도 공하고, 고집멸도라는 고통의 발생과 소멸도 공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관사상은 존재의 실상, 사물의 본성, 세계의 궁극적 원리에 대해 탐구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관사상을 연구하는 학파를 법성종(法性宗)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본성과 사물의 근본을 탐구하는 종파라는 뜻이다. 존재의 본성에서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명멸하는 현상들일 뿐 그 본성에서는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

 

중관의 악취공을 비판하다

 

본성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공할지라도 현상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록 물거품 같을지라도 무수한 존재들이 눈앞에 존재하고, 그것들은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결정적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그런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시고공중’이라는 전제조건을 간과하면 자연히 혼란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반야의 공관에서 설하고 있는 오온, 육근, 육경, 십이연기, 사성제가 공하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야의 공은 어디까지나 ‘존재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존재의 본질은 꿰뚫어보지 못하고 현상적으로 펼쳐지는 오온을 부정하고, 육근과 육경을 부정하고,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만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 공으로 만병통치약으로 삼으면 허무적 세계관에 빠지게 되고, 모든 것이 공이라고 주장하면 염세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의 업도 공하므로 열심히 선업을 쌓을 필요도 없다는 궤변에 빠지게 된다. 연기도 공하고, 사성제도 공함으로 거룩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할 필요도 없다는 자기부정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교설이라도 그것이 절대화 되면 독단이 되기 마련이다. 그것을 예견한 용수는 중론에서 공(空)의 이치를 비누에 비유했다. 손에 묻은 때를 씻기 위해서는 비누를 칠해야 한다. 하지만 때를 씻어낸 뒤에는 비눗물마저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그래서 『아함경』과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과 같은 것(如筏喩者)’이라고 비유했다. 강을 건너가면 뗏목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용수는 부파불교의 유론을 깨기 위해 근본적 관점에서 공을 설파했다. 공은 유론의 왜곡과 독단을 깨는 범위에서 유효하다. 그렇지 않고 공이 모든 것에서 절대화되면 그것은 또 다른 왜곡이 된다. 유론이라는 사견을 혁파했다면 공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공공(空空)’이다. 하지만 어떤 교설이든 학파가 되고 사상적 정체성이 성립되면 그것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도그마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유식사상은 이처럼 중관사상이 갖는 극단적 공견을 비판하며 성립한 사상이다. 중관사상이 철저히 사물의 공성을 주장하는 반면 유식사상은 완전한 실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관의 공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피력한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용수 보살은 법성(法性)을 많이 말하고, 유식 계통에서는 법상(法相)을 많이 말해서 은연중에 반대적 입장”처럼 보인다고 설명한다. 존재를 근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공하다. 하지만 현상[相]의 관점에서 보면 눈앞에는 놀랄만한 다양한 존재들이 펼쳐져 있다. 유식은 바로 그런 현상적 모습을 설명하기 때문에 유식학파를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부른다. ‘법의 현상’, ‘법의 모습’을 논하는 종파라는 뜻이다. 법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는 중관사상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유식은 모든 것이 공하다는 명제 대신 ‘일체만법은 오직 식(萬法唯識)’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상을 체계화한 것은 미륵(Maitreya)이며, 그의 뒤를 이어 무착(Asānga)과 세친(Vasubandhu)이 유식학을 대성하였다.

 

유식사상의 핵심도 중도

 

용수는 『중론』에서 “공에 집착하면 제불(諸佛)이 와도 구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계승한 중관학파는 유식학파로부터 악취공(惡取空)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중관학파는 공을 잘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빠뜨린다는 비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유식학은 부파불교의 유견과 중관사상의 무견을 종합한 또 다른 중도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비록 겉보기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상의 근본을 이해하면 충돌하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했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성(性)이 곧 상(相)이고, 상이 곧 성’이 되는 성상불이(性相不二)이므로 중관은 성을 논하고, 유식은 상을 논하고 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연 따라 생겨나는 모든 존재[衆因緣生法]는 본성에서 보면 철저히 공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즉공(卽空)’이다. 하지만 눈 앞에는 펼쳐져 있는 현상적 모습은 또 분명하게 존재함으로 ‘즉가(卽假)’이기도 하다. 따라서 존재의 본성인 공(空)이 그대로 현상으로써의 가(假)이고, 현상인 가가 곧 본성에서는 공함으로 존재의 실상은 공과 현상의 중도(中道)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본성인 성(性)과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 상(相)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한다. 따라서 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중관과 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유식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법의 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지적이다.

 

결국 성철 스님은 유식학의 핵심도 중도라는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중관과 유식은 대립적 교설이라는 관점을 해체시킨다. 유식학도 공견이나 유견에 집착하는 변견(邊見)을 떠나 중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가사지론』에는 “있음과 있지 않음 두 가지를 함께 멀리 떠나는 것(二俱遠離)은 법상(法相)이 포섭하는 진실한 성품의 일이니,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이름한다. 둘이 아니므로 중도라 이름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나아가 “양변을 멀리 떠남[遠離二邊]을 위없는 부처[無上佛]”라고 설하고 있다. 양변을 벗어나는 중도를 구경의 경지로 삼는 것은 중관사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식학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의 구경목표도 양변을 떠난 중도의 체득, 양변이 서로 소통하는 중도에 있다는 것이 『백일법문』의 설명이다. 이렇게 보면 중관은 악취공이고, 유식은 중관을 비판했다는 학계의 대립적 이해구조는 깨진다. 중관이든 유식이든 핵심은 중도에 있음으로 근본으로 바로 들어간다면 중관이든 유식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는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 『백일법문』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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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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