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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일심삼관과 존재실상의 내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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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3 월 [통권 제3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6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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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제원융과 일심삼관의 관계

 

일반적으로 종교의 핵심주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언제나 인간을 지켜보며 삶의 길흉화복까지 좌우한다고 믿는다. 이런 전통에서는 신의 권능과 초월적 힘에 대해 설명하는 신학(神學)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교의 핵심주제는 이와 다르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연기법(緣起法)이며 그것은 존재의 실상(實相)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내용보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교설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핵심사상은 존재의 근본을 설명하는 실상론이며,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설사 불교에서 말하는 실상론이 진리이고, 그것이 옳다고 한들 당장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반문은 오랫동안 불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자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존재의 실상을 바로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고(苦)의 근원적 뿌리가 무명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야만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을 밝히는 것은 존재를 규명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 고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존재를 규명하는 실상론과 그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마음의 평화와 삶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천태학에서는 삼제원융(三諦圓融)과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이 두 영역을 관계 짓고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태대사는 존재의 실상을 삼제원융으로 설명한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공가중(空假中)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파악한 것이 삼제원융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으므로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空)하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개체적 존재는 공하지만 수많은 존재들과 중층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개체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므로 그 자체는 가상 즉, ‘가(假)’가 된다. 이처럼 공과 가는 존재의 두 성질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테제의 핵심은 연기적 관계성이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공을 철저히 깨달으면 가를 알게 되고, 가를 철저히 알게 되면 공을 알게 되므로 공과 가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不一不二]’ 중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존재의 세 특징을 ‘삼제(三諦)’라고 하고, 그것이 상호소통하는 중도적 관계에 있으므로 삼제원융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와 같은 존재의 실상이 아무리 고원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나와 무관한 고담준론이 되고 만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고통의 뿌리라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고 이해하는 것은 고를 해소하는 길이 된다. 따라서 삼제원융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내면화하고 나의 안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삼제원융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철 스님도 “일체 제법이 원융한 삼제의 도리를 구비하였다고 하여도, 이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낱 수고로운 일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는 단지 객관세계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한 과학과 같은 학문이 아니다. 객관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진리를 내면화하여 고의 뿌리가 되는 무명을 밝히는 것이 불교다. 그때 존재의 실상은 비로소 나를 평화롭게 하는 진리가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태학에서도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통찰하는 관법(觀法) 수행을 중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일심삼관은 삼제원융이라는 실상을 철저히 체득함으로써 내면을 밝히는 나의 지혜로 전환하는 관법이다. 성철 스님도 일심삼관이란 “경계로서의 이법(理法)인 원융삼제(圓融三諦)를 관찰하는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법”이라고 했다. 객관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원융삼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주체적 노력과 지혜로운 안목을 여는 실천적 관법이 일심삼관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내면화 하는 관법

 

“일체 모든 가(假)가 다 공(空)하여 공이 그대로 실상임[空卽實相]을 체득하는 것을 공관(空觀)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 공을 통달했을 때에 관법(觀法)이 중도에 명합하여 능히 세간의 생멸법상(生滅法相)을 알아서 여실하게 보는 것을 가관(假觀)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공한 지혜가 그대로 중도이기 때문에 둘이 없고 다름이 없는 것을 중도관(中道觀)이라 한다.” - 『마하지관』 3권


위의 인용문은 <마하지관>에서 설명하는 일심삼관에 대한 내용이다. 공가중이라는 삼제를 바르게 깨달으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如實知見]’이 열린다. 그렇게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면 번뇌와 고통을 초래했던 무명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렇게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내면의 평화를 얻는 세 가지 관법이 일심삼관이다.

 


 

 

첫째는 공관(空觀)이다. 천태대사는 “일체 모든 가(假)가 다 공(空)하여 공이 그대로 실상임[空卽實相]을 체득하는 것”을 ‘공관으로 들어가는 것[入空觀]’이라고 했다. 우리는 감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안으로는 마음이 있다고 믿고, 나를 구성하는 오온(五蘊)과 사대(四大)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이를 좀 더 확장하면 내가 욕망하는 객관대상이 실재한다고 확신한다.

 

이렇게 내가 있고, 객관이 있다고 믿는 것에서 자아에 대한 아집이 생겨나고, 대상에 대한 욕망이 강고해져 집착이 일어난다. 삶의 고통은 이와 같이 존재를 실체시하고 그것이 존재의 실상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집착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안으로 내가 공함을 깨닫고, 밖으로 모든 존재가 공한 것임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성철 스님은 “모든 가(假)가 실제로 공한 것을 체득하면 공 그대로가 실상”이라고 했다. ‘공관으로 들어감’이란 모든 것이 공하여 실체가 없음이 존재의 실상임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이 해체될 때 비로소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공관은 존재에 대한 실체론에서 비롯된 욕망을 해체하고 영혼의 속박을 푸는 해탈의 인식이자 눈이다. 그래서 공관은 반야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 모든 유위법은 마치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볼 때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應作如是觀]”고 강조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반야심경>은 “오온이 공함을 알아서 일체 모든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났다.”고 설한다. 공을 바로 알아야 모든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가관(假觀)이다. 존재의 본질적 실상이 공하다고 했을 때 여기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가관은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거짓 이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존재는 우리가 보는 개체라는 거짓 이름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무수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천태대사는 “만약 하나의 법과 일체법이 인연으로 생겨난 법[因緣所生法]이라면 이것은 거짓 이름[假名]”임을 확고하게 아는 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어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통해 눈앞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연소생법’ 즉 ‘인연에 의해 성립된 존재’일 뿐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란 개나리는 개나리 혼자 피어난 것이 아니다. 토양 속에 있는 수많은 박테리아와 자양분, 빗물과 햇빛과 바람 같은 대기환경 등 말할 수 없이 많은 관계의 산물이다. 개나리는 개나리라는 독립적 실체가 있어 저절로 핀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존재들의 관계와 도움 속에서 피어난다. 따라서 개체로서의 개나리는 거짓 이름일 뿐이며, 개나리의 진짜 근원은 관계성의 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가관은 모든 존재가 거짓 이름이며 텅 비어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보편적 관계 속에서 우주적 무게로 펼쳐져 있음을 보는 것이 가관이다. 가관에 들어가지 않고 공관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은 공하고 헛된 것으로 잘못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눈이 필요하다. 가관은 개체존재의 거짓을 폭로함으로써 한 존재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깨닫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관은 허무주의로 매몰될 수 있는 인식을 중화하는 긍정의 안목이다.

 

셋째는 중도관이다. 모든 존재는 실체가 공하다는 ‘공’과 모든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인연으로 성립되어 있음으로 거짓이라는 ‘가’는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적인 진술이 아니다. 공은 ‘텅 빔’이라는 허무적멸이 아니라 관계성을 밝히는 것이므로 공관에 들어가면 개체 존재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가관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 가관 역시 개체는 거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므로 철저하게 가관으로 들어가면 자연히 공관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공과 가는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므로 그것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도관이다.

 

중도관은 존재의 실상인 삼제는 상호소통하며 원융무애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면 공을 보는 눈 따로 있고, 가를 보는 눈이 따로 있지 않다. 실상을 그대로 꿰뚫어 보면 공을 알되 허무에 빠지지 않고, 가를 알되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에도 빠지지 않고 가에도 현혹되지 않고 실상을 통합적으로 꿰뚫어보는 눈이 중도관이고 일심삼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공과 가를 함께 통찰할 때 존재의 실상은 나의 지혜로 내면화하게 되고, 그때 대자유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 일심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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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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