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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쌍으로 막고 쌍으로 비추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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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6 월 [통권 제3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4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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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변견이 낳은 대립과 갈등

 

최근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이유 없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묻지마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치안불안에 대한 성토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사건의 파장은 예기치 못한 곳으로 번졌다. 이 범죄가 여성혐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남녀 간의 성대결로 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사회에도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를 외치며 대립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이 드러났다. 

 

문제는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이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주제와 영역은 다르지만 사람들은 늘 편을 갈라 논쟁하며 갈등해 왔다. 일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세대갈등,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이념갈등, 공공시설을 둘러싼 지역갈등, 경제적 불평등을 둘러싼 빈부갈등 등 두 편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충돌하는 사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갈등의 양상은 비록 다양하지만 결국은 나와 남, 남과 여,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대립으로 압축된다. 세상을 두 편으로 나누고, 어느 한 편에 서서 바라보는 것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변견은 극단적 시선이므로 자신이 속한 쪽과 반대편을 둘로 나누는 진영논리로 발전한다. 진영논리는 복잡한 현상을 양자대결로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관점과 주장을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몰아간다. 

 


 

 

나와 너로 구분된 변견에 뿌리를 둔 진영논리는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들게 만들고, 다른 생각에 대한 구별짓기와 차별로 이어진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중재를 제안하거나 화해를 이야기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상대편은 배제와 극복의 대상일 뿐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에 가차 없이 악으로 규정짓고 단죄하려 든다. 

 

선악으로 양단된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선에 의한 악의 지배를 정당화 되고, 선을 명분으로 차별의 담론과 배제의 폭력을 합리화 한다. 승찬 대사는 ‘지극한 도는 좋고 싫음을 따지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중생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것에 매몰되어 있고, 그로부터 번뇌가 일어남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차별변견으로 온 사회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 받는 사례를 수 없이 보아 왔다. 종교적 갈등이 그랬고, 동서의 이념대결이 그랬다. 대립과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존재의 실상과 쌍차쌍조

 

그렇다면 이와 같은 차별과 변견의 골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부처님은 그와 같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할 방법으로 중도(中道)의 길을 제시했다. 중도는 이분법적 사유에 뿌리를 둔 양변을 초극하는 것이며, 대립하고 갈등하는 진영논리를 해체하는 것이며, 화해와 공존의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문제는 어떻게 중도를 실현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천태 대사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원리를 제시한다. 쌍차쌍조는 여러 종파에서 중도를 설명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하지만 종횡무진으로 쌍차쌍조를 활용하며 중도를 설명한 것은 천태 대사가 최고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평가다. 

 

쌍차쌍조의 문자적 의미는 ‘양변을 모두 막고, 양변을 모두 비춘다.’는 뜻이다.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변을 다 막는 것이 쌍차이고, 차별하며 배제하려했던 양변을 모두 드러나게 하는 것이 쌍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쌍차쌍조는 중도를 달성하는 방법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하지관』에 따르면 쌍차쌍조란 단지 변견을 깨고, 극단을 치유하는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실상 그 자체라고 한다.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존재의 실상은 오히려 쌍차쌍조로 설명되는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법계는 인연에서 생겨나기 때문에[從因緣生] 체가 다시유가 아니니[體復非有], 유가 아니기 때문에 공이고[非有故空], 공이 아니기 때문에 유이다[非空故有]. 공과 유를 얻지 못하나[不得空有] 공과 유를 쌍조하여[雙照空有] 삼제가 완연하니 부처의 지견을 갖춘다.”

- 『마하지관』

 

우리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존재를 보고 ‘유(有)’, 즉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존재들과의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있는 것(有)’ 같지만 본성을 따져보면 실체가 없음으로 ‘있음이 아님[非有]’ 즉 본체가 텅 비어 있는 ‘공(空)’이다. 이로써 유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부정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텅 빈 공만 있는 것일까? 비록 인연 따라 생성되었다고 할지라도 눈앞에는 무수한 존재들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도 아님[非空]’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공도 부정된다. 결국 고정불변의 실체인 유도 없고[非有], 텅 빈 공도 없다[非空].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므로 있음과 없음이 쌍으로 부정됨으로 이를 ‘쌍차(雙遮)’라고 한다. 

 

그럼 유도 없고 공도 없는 것인가? 눈앞에 펼쳐진 존재는 분명히 있음으로 유는 있다. 나아가 유의 본질을 궁구해보면 텅 비어 있음으로 공도 있다. 존재의 실상은 ‘공이 아님[非空]’이므로 유(有)가 있고, 그 유는 실체로서 ‘유가 아님[非有]’으로 공(空)도 있다. 결국 제법의 실상은 유와 공이 모두 드러나 있는데 이를 ‘쌍조(雙照)’라고 한다. 이처럼 존재의 실상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기 때문에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쌍차를 통해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부정하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과 유의 존재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쌍조가 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있음과 없음이 쌍차쌍조의 관계에 있고, 이런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부처님의 안목이 열린다. 그래서 천태 대사는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雙遮二邊], 바로 중도에 들어가[正入中道] 쌍으로 이제를 비추면[雙照二諦]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가 구족된다.”고 했다.

 

상호부정을 통한 긍정의 발현과 상호긍정을 통한 부정의 해소

 

존재의 실상이 중도라면 쌍차쌍조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의 삶을 여는 지혜의 말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변견을 넘어서는 중도를 강조했고, 역대의 고승들은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설명방식을 동원했다. 

 

첫째는 쌍민쌍존이다. 존재의 실상은 나와 너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의존해 있다. 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 혼자 존재하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을 바로 드러내자면 나와 너가 모두 사라져야하는데 이를 ‘쌍민(雙泯)’이라고 한다. 쌍민을 통해 대립하고 투쟁하는 모습이 사라지면 양측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측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쌍존(雙存)’이 실현된다. 

 

둘째는 쌍비쌍역이다.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와 너로 갈라져 서로 옳다고 고집하는 자기중심적 인식이 해체되어야 한다. ‘오직 나만’이라는 인식도 틀렸지만 반대로 ‘오로지 너만’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이처럼 자신만 옳다는 나와 너의 배타적 태도를 부정하는 것을 ‘쌍비(雙非)’라고 한다. 나만 고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너만 내세우는 것도 틀렸음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양 당사자가 완전하게 긍정되는데 이를 ‘쌍역(雙亦)’이라고 한다. 

 

셋째는 쌍지쌍관이다. 나와 너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면 나와 너가 각자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생각과 몸짓은 멈추어야 한다. 너도 너의 진영으로 치닫는 것을 멈추어야 하고, 나도 나의 진영으로 질주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쌍방이 자기중심적으로 내달리는 질주를 멈추는 것이 ‘쌍지(雙止)’이다. 철저하게 나와 너라는 관점을 버리고 자기진영으로 치닫던 행위를 멈추면 그때 양측을 모두 관조할 수 있는 ‘쌍관(雙觀)’의 안목이 열린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멈추면 비로소 서로가 모두 보이는 것이 쌍관이다. 

 

넷째는 쌍차쌍조이다. 나만 옳다는 나 중심적 생각과 행동도 막아야 하고, 반대로 너만 옳다고 고집하는 생각과 행동도 막아야 한다. 이렇게 쌍방의 변견과 행위를 철저히 막는 것이 ‘쌍차(雙遮)’이다. 철저히 부정하면 양측이 모두 사라지고 마는 무(無)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이 오롯하게 드러나는 ‘쌍조(雙照)’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이처럼 나와 너,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부정하는 것을 ‘쌍차이변(雙遮二邊)’이라고 한다. 양쪽이 동시에 왜곡된 생각을 내려놓고,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리는 질주를 멈추고, 자신만의 배타적 주장을 버리는 것이 쌍차이변이다. 쌍차를 통해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울타리는 해체된다. 나와 너,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은 쌍방이 둘러친 두 겹의 울타리다. 따라서 한쪽만 부정해서는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 쌍방의 울타리를 동시에 해체할 때 비로소 대립과 갈등은 사라지고 화해와 공존의 길이 열린다. 

 

쌍민, 쌍비, 쌍지, 쌍차는 나와 너를 차별하며 서로를 배제하는 인식을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로의 긍정성을 발현하는 상호주의적 방식이다. 성철 스님은 “철저하게 부정하면 대긍정이 나타난다.”고 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밝게 빛나듯 왜곡된 인식과 행위를 제거하면 긍정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중도의 원리는 쌍차, 즉 부정을 위한 부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철저하게 양측을 부정할 때 완전한 긍정이 드러난다는 것이 쌍차쌍조로 실현하는 중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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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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