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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머리 둘 달린 뱀과 불이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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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7 월 [통권 제3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37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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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둘 달린 뱀

 

늘 듣던 소리, 늘 보던 풍광은 특별하지 않다. 설사 그것이 소중한 것일지라도 일상이라는 틀에 갇히는 순간 무덤덤하게 변하고 만다. 귀에 짝짝 붙던 노래도 여러 번 들으면 달콤함이 사라지고, 좋은 소리도 날마다 들으면 잔소리가 되는 법이다. 반대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처음 보는 풍광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어땠을까? 그 해답은 ‘희유세존!’에 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희유세존!’이라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부처님의 법문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희유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수보리는 부처님의 설법에 대해 자신이 체득한 지혜로는 들어보지 못한 법문이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면 부처님의 법문은 흘려들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희유한’ 말씀이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희유(希有)’란 ‘흔하지 않은’, ‘보기 드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설법이 단지 들어보지 못한 낯선 소리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희유세존’이라는 말에는 누구도 이르지 못한 경지에 이른 심오한 설법이며, 아무도 깨닫지 못한 진리를 담고 있는 거룩한 법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처럼 심오하지 않아도 낯설고 신기한 것을 보면 관심을 보인다. 1928년 9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양두사에 대한 기사도 ‘희유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잘 보여준다. 이 기사에 따르면 평택 망한사라는 절 근처에서 머리가 둘 달린 뱀 한 마리가 잡혔다. 나무하던 소년이 잡은 이 뱀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혼잡을 빚었으며, 이들의 관심에 부응하여 인근 군으로 순회전시까지 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머리 둘 달린 뱀은 분명 보기 어려운 것이고, 말 그대로 희유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머리 둘 달린 양두사는 옛날에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은 그것에 큰 관심을 보이며 흥미로워 했을 것이다. 「보현행원품」에 보면 보살은 “중생들이 즐겨하고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隨其欲樂] 그들을 성숙시킨다.”고 했다. 중생들이 가진 그릇에 따라 설법하셨던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사람들의 습성을 간과했을 리 없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을 소재로 법문하면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이고,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함경』에도 다음과 같은 양두사 이야기가 등장한다.

 

옛날에 머리가 둘 달린 뱀 한 마리가 살았다. 이 뱀은 비록 한 몸이었지만 맛있는 먹이를 만나면 두개의 머리는 서로 먼저 먹기 위해 경쟁했다. 그런데 맛있는 먹이는 민첩하고 동작이 빠른 오른쪽 머리가 늘 차지했다. 한 번도 먹이를 맛보지 못한 왼쪽 머리는 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른쪽 머리가 먹이를 발견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기회만 엿보고 있던 왼쪽 머리가 잽싸게 잡아먹어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개구리는 독이든 개구리였다. 오른쪽 머리는 그것을 알고 주저했지만 경쟁에서 밀렸던 왼쪽 머리는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냉큼 잡아먹는 바람에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뱀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독니가 달려 있는 머리가 하나만 있어도 치명적인데 양두사는 그런 머리를 둘씩이나 달고 있다. 따라서 양두사는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번뇌를 상징하기에 딱 좋은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불이법문(不二法門)

 

사람이든 동물이든 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법이다. 머리가 판단하고 결정하면 몸은 그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명령하고 판단하는 머리가 둘이 되면 어떻게 될까? 얼핏 보기에는 CPU를 두 개 장착한 컴퓨터의 듀얼프로세서처럼 다른 뱀보다 훨씬 똑똑하고 강력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각각의 머리가 서로 다른 판단을 한다면 다른 뱀에게 없는 두 배의 능력이 오히려 두 배의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른쪽 머리는 나무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왼쪽 머리는 땅으로 가고자 한다면 뱀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만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뱀이 그런 경우다. 뱀의 머리와 꼬리와 몸통이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며 싸우는 통에 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따가운 태양에 말라죽고 만다. 따지고 보면 양두사는 어느 머리가 먹이를 먹어도 상관없다. 비록 머리는 두 개지만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이를 먹기 위해 발버둥 치느니 차라리 좋은 구경이나 즐기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인데도 두 머리는 먹이를 놓고 싸운다.

 


 

 

뱀의 두 머리가 상징하는 것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유에 뿌리를 둔 차별인식이다. 그와 같은 차별인식은 뱀의 두 머리처럼 서로 대립하는 눈이므로 이를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나’라는 자기중심적 눈이 하나만 있어도 삶은 극심한 고통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나와 남을 분별하는 자기중심적 에고는 번뇌를 일으키는 맹독이기 때문이다. 그런 머리가 두 개로 늘어난다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번뇌도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개체 같지만 실상은 머리 둘 달린 뱀처럼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다. 그 몸은 가정이나 국가일 수도 있고, 환경이나 지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머리 둘 달린 뱀처럼 나와 너로 분열되어 갈등하고 싸운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나와 너를 구분하여 대립하고,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논쟁하고,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서 충돌한다. 부처님은 양두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모두가 한 몸인 사실을 망각하고 나와 너로 갈라져 싸우고, 그것 때문에 함께 몰락하는 중생의 변견을 설명하고 있다.

 

비록 머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이기에 오른쪽이 이로우면 왼쪽도 이로운 것이고, 왼쪽이 이로우면 오른쪽도 이로운 것이다. 반대로 왼쪽이 손해를 보면 오른쪽도 손해를 보고, 오른쪽이 손해를 보면 왼쪽도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천태 대사는 ‘차조동시(遮照同時)’라고 했다. 막음과 비춤이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머리가 먹이를 먹는 것이나 왼쪽 머리가 먹이를 양보하는 것이나 몸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두 개의 머리가 상징하는 양변에서 보면 득을 보는 자가 있고, 손해를 보는 자가 있지만 그들이 근거해 있는 근본, 즉 몸의 관점에서 보면 이익과 손해는 무의미해진다. 네가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 곧 네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실상을 보면 오른쪽도 왼쪽도 모두 하나의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이 잘되면 왼쪽이 잘되고, 왼쪽이 변을 당하면 오른쪽도 변을 당하는 것이 불이법문이다.

 

성철 스님은 존재의 중도성에 대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참으로 원융무애한 도리”라고 했다. 오른쪽 머리와 왼쪽 머리는 하나의 몸통으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전체로서 그것은 분명 하나이다. 하지만 오른쪽 머리는 오른쪽 머리대로 있고, 왼쪽 머리는 또 왼쪽대로 있기 때문에 둘로 존재한다. 두 개의 머리는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음으로 서로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과 왼쪽은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고 있음으로 그 두 머리는 또 각각 다른 머리이기도 하다.

 

존재의 중도성이란 뱀의 두 머리와 같이 서로 같으면서 또 다르고, 서로 다르면서도 또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중도를 바로 이해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우리가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一]’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볼 때 내가 좀 손해 봐도 전체적으로 이로운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이 생겨난다. 네가 이로운 것이 곧 몸으로 대변되는 전체가 이로운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 득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단, 이런 논리로 먹이는 늘 오른쪽이 먹어야 하고, 왼쪽은 배제되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중도란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이지만 개별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각자 고유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쪽은 왼쪽을 배려해야 하고, 왼쪽은 또 오른쪽을 배려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용수 보살은 중도를 설명하면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각 존재의 독자성이 하나도 없는 전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이면서 또 둘인 이 관계를 잘 파악해서 서로를 배려하고 공존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이 담고 있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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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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