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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 4 | 이노우에 테츠지로, 이노우에 엔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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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5-28 16:37  /   조회6,05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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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일본에 있어 근대불교학 출발의 계기로서 도쿄대학 ‘불교 강좌’ 개설은 불교회생의 상징이자 불교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거의 10여년에 걸친 불교탄압의 세례를 극복하고 새로운 불교의 모습으로 재활하여 일본 사회 속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 상징적인 사건이 도쿄대학의 불교 강좌 개설이며, 이 ‘불교 강좌’의 실질적인 역할이 근대불교학의 성립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불서 강의’의 이름으로 개설된 ‘불교 강좌’는 이후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영역을 확보하며 지속되어, 불교의 정신이 일본사회에 그 가치를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도쿄대학에서 ‘불교 강좌’가 개설된 것은 근대불교학이 성립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제機制였지만, 이 기제를 통해 불교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 데에는 당연히 불교가들의 열성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도쿄대학이 설립되자 불교의 각 종단들은 종단의 인재를 육성해 도쿄대학에 입학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렇게 육성된 인재들 가운데 도쿄대학에 입학해 불교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노우에 테츠지로

 

  각 종단에서 인재를 육성해 도쿄대학에 입학시키거나 해외에 유학시키는 것은 앞서서 살펴본 것처럼 메이지 초기의 종단협의체인 제종동덕회맹의 뜻을 실현시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의 근대화에 기여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곧 회맹에서 결의한 내용을 전 종단 차원에서 단합하여 합심 협력하는 일은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 일로서 근대기에 나타난 새로운 모습으로, 불교 근대화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도쿄대학에 불교 강좌가 개설되던 1879년의 시점은 불교가 사회적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기에는 여전히 그 기반은 약하였지만, ‘불교 강좌’의 설립은 불교의 가치를 드러내어 그러한 약한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 강좌 성립은 실질적으로 불교가 일본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종교임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무대가 된 것으로, 불교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의미를 갖는 사회적 역할 중의 하나가 소위 배야(排耶,  야소교耶蘇敎 배척排斥이라는 의미) 라고 불리는 서구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다수의 배야서가 등장하였지만, 배야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도 도쿄대학에서의 학문적인 토대에 의거 새롭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논의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도쿄대학에서 최초의 일본인 철학과 교수였던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郞, 1855-1944, 이하 테츠지로로 약칭, 사진 1)와 정토진종 대곡파의 자제로 태어나 오늘날 도요대학東洋大學의 설립자가 된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 이하 엔료로 약칭, 사진 2)이다. 

 

  테츠지로는 1877년 도쿄대학 개교와 함께 철학과에 입학하여 후에 독일로 유학해 돌아와 최초로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는 1884년 2월 독일로 유학하기에 앞서 1882년의 철학과 교과개편 속에 동양철학을 담당하였다.(이때 인도철학의 교과목은 하라 탄잔과 새로 강사로 임명된 요시타니 카쿠주가 격년으로 담당한다.) 동양철학을 담당한 테츠지로는 188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890년 10월 귀국하고, 귀국하여서는 철학과교수로 임명된 뒤 서양철학을 비롯해 비교종교, 동양철학도 강의하였다. 그렇지만 테츠지로의 서양철학 강의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면이 많아 후대 학자들의 평가로서는 서양유학의 6년이 ‘불모不毛의 6년’이라는 비아냥을 얻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 테츠지로는 이 독일 유학 기간 중에 대다수의 시간을 인도철학 연구에 힘을 쏟아 산스크리트어 등에 대한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가 귀국한 뒤 강의한 동양철학의 실제 내용이 인도철학으로서 그 강의의 결과물이 『인도철학사』(1892-97 강의)로 남아 있어 그것을 실증하고 있다. 곧 테츠지로는 불교학의 연장으로서 인도철학이 아니라 순수한 인도철학으로서 강의를 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인도의 종교철학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후대 일본의 인도철학 연구의 획을 그은 『인도철학종교사』(1914,10)가 간행되기 훨씬 전의 일로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테츠지로는 이러한 학문적인 업적보다는 관학(官學)을 대표하는 어용학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 후대 ‘교육과 종교의 충돌’로 알려진 것으로, 곧 국가주의적인 도덕 윤리와 기독교의 정신이 충돌하였을 때 국가를 대표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1890년 테츠지로가 독일에서 귀국하던 전년 1889년에 일본은 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에는 천황제국가의 교육이념이 담긴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발표되고, 이것에 대한 해설서인 ‘칙어연의勅語衍義’를 테츠지로는 저술하였다.

 


 이노우에 엔료

 

  이러한 국가주의적 교육이념이 전파되는 시점에 1891년 기독교도인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의 ‘불경사건不敬事件’이 일어나고, 이것에 대해 테츠지로의 인터뷰가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는 ‘교육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사건이 전개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국가적인 사안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신봉은 일본에서는 에도막부 시기부터 금지되었던 것으로,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중요한 잇슈가 되어 불교계에서는 다수의 비판서가 나타나고, 이노우에 엔료에게 이르러서는 더욱 치밀하고 세밀한 비판이 전개된다. 

 

  이노우에 엔료는 1858년 정토진종 대곡파 절의 아들로 태어나 종단에서 육성한 영재교육을 받고 1881년 24세때 도쿄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한다. 도쿄대학에 입학해서는 서양철학에 크게 자극을 받고 공부하여 철학회 조직, 철학잡지 발행 등 일본학계의 철학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엔료는 졸업에 임해 인도철학연구, 국가관료 진출, 종단복귀 등 다양한 진로가 열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마다한 뒤 교육자 내지 불교인으로서 길을 개척해 철학관哲學館을 세워 불교와 철학을 일반대중에게 알리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가 세운 철학관은 후에 도요대학으로 명칭을 바꿔 오늘날까지 존속하게 된다. 이노우에 엔료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글을 쓰고 강연을 하여 생애 160여 편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된다. 특히 이 저술들 가운데 기독교 비판의 상세하고 치밀한 저술로 크게 이름을 떨친 책이 『진리금침眞理金針』이며, 이 『진리금침』의 내용을 요약하여 불교의 회생과 재활을 알린 저서로서 크게 명망을 얻은 책이 『불교활론서론佛敎活論序論』이다. 

 

  『진리금침』은 전체 3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간행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 「초편」(1886,3)의 제목은 ‘야소교를 배척하는데 이론理論이 있는가’로서, 실제 기독교를 비판하는 핵심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출간되는 「속편」(1886,11)은 ‘야소교를 배척하는 일은 실제 있는가’, 「속속편」(1887,1)은 ‘불교는 지력, 정감 양쪽이 온전한 종교인 까닭을 논함’의 제목이 붙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엔료의 기독교 비판과 불교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초편」에서의 기독교 비판은 12가지의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12가지의 항목을 살펴보면, ①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 ②인류주장설人類主長說 ③자유의지설自由意志說 ④선악화복설善惡禍福說 ⑤신력불측설神力不測說 ⑥시공종시설時空終始說 ⑦심외유신설心外有神說 ⑧물외유신설物外有神說 ⑨진리표준설眞理標準說 ⑩교리변천설敎理變遷說 ⑪인종기원설人種起源說 ⑫동양무교설東洋無敎說 등의 항목으로 전개된다. 이 「초편」에 나타나는 이노우에 엔료의 기독교 비판은 매우 상세하고 치밀한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진리금침』의 이름으로 간행된 3편의 책은 이후 『불교활론』이라는 이름으로 보완 정리되어 출간되는데, 그 출간의 대의(大義)를 담아 간행된 책이 『불교활론서론』(1887,2)으로, 아마도 당시 불교계는 물론 일반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라 생각된다. 『불교활론서론』의 ‘서언’에서 엔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불교가 세간에서 성행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고, 그 재흥再興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독력으로 연구를 거듭해 이미 십수년이 지났다. 최근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가 서양의 과학과 철학의 원리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기에 일대논문을 저술키로 했다. 그 이름을 『불교활론』이라 한다. 먼저 첫 번째로 그 단서를 설하여 진리의 성질과 불교의 조직을 간단히 설명한다. 이것을 『불교활론서론』이라 제목을 붙인다. 본론은 「파사활론」, 「현정활론」, 「호법활론」의 3부로 나누고, 지금부터 3개월에 걸쳐 원고를 쓰고 그 후 세간에 보여 세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험해보고 싶다.” 

 

  이 엔료의 말에서도 나타나듯 『불교활론서론』을 간행하는 뜻은 불교의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뜻으로, 불교가 서양의 과학과 철학에 부합한 종교임을 증명하고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곧 엔료는 도쿄대학에 들어가 맹렬히 공부했던 서양의 철학적 진리가 불교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불교활론』을 짓는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엔료는 또 『서론』의 다른 곳에서 “내가 어렸을 때 불문佛門에 있으면서 불교 중에 진리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은 당시 나의 학식이 얕고, 그것을 발견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새롭게 한 종교를 세우려는 생각을 끊고 불교를 개량하여 이것을 문명화의 세계종교로 하고자 하는 것을 결정했다.”라고 말해 불교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근대불교학 출발의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도쿄대학의 불교강좌 성립은 불교의 정신을 객관적 내지 과학적으로 논하는 계기가 되고 후에 인도철학으로서 학문적인 영역을 확보하여 다수의 연구가 진행된다. 아울러 대학에서 논의된 불교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배야의 논쟁에서도 나타나듯 불교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불교의 정신을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가 된 도쿄대학에서의 불교강좌 성립은 불교계가 폐불훼석을 극복하고 진정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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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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