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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책의 향기]
메이지 정부는 왜 불교를 탄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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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20 년 4 월 [통권 제84호]  /     /  작성일20-05-28 17:31  /   조회5,7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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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10월14일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권력을 덴노(주: 일왕日王으로 불리는 천황天皇을 말한다. ‘천황’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피하고자 일본식 발음인 ‘덴노’로 표현한다.)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사츠마薩摩와 죠슈長州 출신의 막부타도파가 이를 받아 1868년 1월17일 왕정복고를 선언하며 메이지 정부가 출범했다.

 

270여 년간 지속된 에도 시대(1603-1867)는 막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쇼군 중심의 ‘봉건적 사회구조’가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적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로 바뀌기 시작했다.(주: 1868년 3월13일 내려진 태정관포교령의 일부 : “금번의 왕정복고는 진무창업의 시원에 바탕 하여 이루어진바, 제정일치의 제도를 회복하게 됨에 있어 ….”) 자유·인권 등에 기반을 둔 근대국가가 아니라 ‘제정일치적 왕정복고王政復古’라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정치체제를 위한 ‘쿠데타’가 ‘메이지 유신’이었다. 

 

그럼에도 ‘혁명적 왕정복고’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에도 시대 국교의 지위를 누렸던 일본 불교계에 가장 먼저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덴노를 우상화하고 토착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화國敎化하기 위한 ‘첫 수手’가 불교탄압이었다. 혁명정부는 1868년 3월17일과 3월28일 그동안 관습처럼 이뤄져왔던 신불습합神佛習合 대신 불교와 신도의 분리[神佛分離]를 명령하고, 신사神社의 불상과 불구佛具를 없애고 출가자들을 환속시키라는 ‘신기사무국 공표문 165호’와 ‘태정관령 196호’를 각각 발표 했다. 이후 ‘불상을 뒤엎고 불교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이 일본 전역을 강타했다.(주: 폐불훼석의 구체적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야스마루 요시오 지음·이원범 옮김,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종교변혁』, 서울:소화, 2002, pp.143-187을 참조하라.) 신도 국교화 작업도 착착 진행됐다. 

 

 

  막부타도파들은 왜 신도를 국교화하고자 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덴노를 앞세운 정권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덴노의 신권적 절대성을 강조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었다. 둘째는 ‘신도神道 제일주의第一主義’라는 사상적 목적을 위해서였다. 막부타도와 문명개화를 내세웠던 메이지 정부는 서양문물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개국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자연히 기독교(천주교)가 널리 전파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기독교에 대항할 민족적 규모의 의식 통합이 필요했다. 대안으로 신도 국교주의적인 체제가 제기됐다.(주: 야스마루 요시오 지음·이원범 옮김,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종교변혁』, 서울:소화, 2002, p.25.) 그런데 정치적 사상적 측면에서 추진되던 ‘신도 국교화’에 대한 큰 장애가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고 메이지 정부의 학자들과 관료들은 파악했다. 에도 시대 이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불교가 그것이었다.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폐불훼석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조치였다.

 

불교계는 그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불교계 지도자들은 ‘태풍’이 몰고 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했다. 불안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머리를 맞댔다. 노력의 결과 1868년 12월 교토 흥정사에서 여러 종파의 연합체인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이하 회맹으로 약칭)이 출범했다. 회맹은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교리를 연구해 그것을 배척하자, 불교·유교·신도가 (가르침이) 일치하는 것을 분명히 하자, 각 종단이 스스로 과거의 폐해를 고치자, 인재를 등용하자, 새 시대에 걸 맞는 교육기관을 운영하자, 각 지역에서 불교를 올바르게 가르치자 등의 ‘8대 과제’를 선정했다.  

 

8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13개의 세부규칙도 확정했다.(주: 이태승 지음,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파주:올리브그린, 2020, pp.82-83.) 교토 회맹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1869년 4월25일엔 도쿄에서, 1869년 5월엔 오사카에서도 불교계 대표들이 모였다. 도쿄 회맹 역시 교토 회맹처럼 팔대 과제와 13가지 세칙을 제시하며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했다.(주: 이태승 지음,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파주:올리브그린, 2020, pp.110-113.) 

 

 

  교육기관 운영, 인재양성 등을 추진한 회맹의 노력으로 당시 여러 종단의 출가자들이 도쿄의 정해진 곳에 모여 법회도 보고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다 제종공동으로 ‘제종총횡諸宗總黌’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1870년 3월 개교했다. 이후 종단연합으로 혹은 종단별로 학교를 건립했다. 도쿄의 이케가미池上 학료學寮, 에치젠의 가학료假學寮 등이 대표적인 예다. 나아가 조동종은 1882년 조동종 대학림[1905년 조동종 대학, 1925년 고마자와 대학駒澤大學으로 개칭], 일련종은 릿쿄 대학立正大學, 진종 대곡파는 오타니 대학大谷大學, 진종 본원사파는 류코쿠 대학龍谷大學, 임제종은 하나조나 대학花園大學, 진언종은 고야산 대학高野山大學, 천태·밀교는 다이쇼 대학大正大學 등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립했다.

 

  동시에 동본원사는 산스크리트어 학습을 위해 1876년 난조분유(南條文雄)와 가사하라 겐쥬(笠原硏壽)를 영국에 보냈다. 서본원사는 1875년 이마타테 도스이(今立吐醉)를 미국에, 1881년 가타바타케 도류(北畠道龍)를 구미에, 후지시마 료온(藤枝澤通)을 1882년 프랑스로 보내 공부시켰다. 다른 종단들도 영향을 받아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역사적으로 대처적對妻的 분위기가 강했던 정토종 계열은 신도와 사찰을 연결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와 장의불교葬儀佛敎 등으로 다져진 경제적 능력을 일찍부터 학교 건립과 유학생 파견에 십분 활용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는 1872년 ‘출세간의 출가자’들도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고기 먹는 것[食肉], 결혼하는 것[帶妻], 머리 기르는 것[蓄髮] 등을 공식적으로 출가자들에게 허가했다. ‘출세간의 존재를 세간의 개체로 다시금 확실하게 환속還俗’시킨 것이다. 이후 대처帶妻가 일본 불교계의 주류가 되고 중심이 되었다. 비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비구는 적어도 비주류로 전락되고 말았다. 대처화된 교단의 수뇌부들이 자기 자제들을 유학 보내고 교육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은 자명한 이치, 수행 보다는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어 하는 ‘승적僧籍 있는 2세대·3세대 유발학생有髮學生’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일, 종단별로 설립한 교육기관이 있으니 공부하고 온 것을 풀어낼 자리마저 있는 셈. 일본의 불교는 유례없는 속도로 세속화되고, 불교학은 성장할 탄탄한 토대를 구축하던 역사적 구간이 메이지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덴노 숭배’와 ‘신도 국교화’를 추진하던 메이지 정부 관료들이 치우기 힘든 걸림돌이 있었다. 서양문명을 등에 업은 천주교 즉 기독교(혹은 전파)였다. 덴노 제도와 기독교는 구조적 사상적으로 함께 하기 힘들다. ‘만세일계萬世一系를 강조하는 덴노’와 ‘인격적人格的 유일 신앙’의 만남은 양립보다는 충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는 불문가지다. 그런데 정령숭배나 샤머니즘과 비슷한 체계를 가진 신도가 기독교를 사상적·논리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덴노 제도’나 ‘신도 국교화’에는 근대적 비판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논리가 부족했다.(주: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이태승 등 옮김, 『근대 일본과 불교』, 서울:그린비, 2009, p.18.) 반면 사상적 철학적 체계가 확실하고 분명한 불교는 이를 논리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신도는 논리가 너무나 취약하며, 또한 정치적인 덴노 숭배를 넘어서지 못한다. 유교는 전근대의 봉건적 위계질서의 연속성이 너무나 강하다. 그 가운데 전통적인 전근대의 사상이며, 게다가 근대적 비판을 견딜 수 있는 사상으로 변형 가능하며, 해석 가능한 유일한 사상이 불교였다.”(주: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이태승 등 옮김, 『근대 일본과 불교』, 서울:그린비, 2009, p.19.) 

 

 

 

회맹의 대표들은 불교 존립의 새로운 돌파구를 ‘바로 이 점’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연구해 그것을 배척하자.”는 과제를 내걸었을 수 있다. 물론 불교세력을 유지하자는 목표도 내재됐을 것이다. 아무튼 1877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관립 도쿄 대학에 신도학神道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과科’가 없고, ‘불서 강의’라는 과목이 설립 2년만인 1879년 도쿄 대학에 개설된 점도 ‘신도 국교주의’를 추지하던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이뤄진 일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이색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본 근대 신도학의 시조로 추앙받아 마땅한”(주: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제점숙 옮김,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서울:논형, 2016, p.379.) 다나카 요시에(田中義能, 1872-1946)가 도쿄 대학에 재학할 당시[1903년 7월 졸업], 철학과 교수였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1855-1944)가 신도사 강의를 담당하고 있었다.(주: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제점숙 옮김,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서울:논형, 2016, p.380.)


이노우에는 1882년 3월 도쿄 대학 문학부 조교수 임명, 1884년 2월 독일 유학, 1890년 10월 귀국, 귀국 후 도쿄 대학 문과대학 교수 승진 등의 코스를 밟은 인물. 따라서 1879년 당시 도교 대학엔 신도 관련 강의가 없었던 것이다.(주: 도쿄제국 대학 신도 강좌는 1920년에 설치됐고, 다나카 요시에는 1921년 4월 도쿄제국 대학 문학부 신도 강좌의 조교수로 부임한다. 도쿄제국 대학의 신도 강좌는 1923년에 연구실로 승격되고, 다나카는 1938년 60세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실질적인 주임교관으로 역할을 했다. 한편, 신도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1917년경에 새롭게 만들어진 조어造語였기에 1920년 설치된 도쿄제국 대학의 신도 강좌, 1923년 설치된 연구실이 ‘신도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처음 신도학이라는 명칭을 표방한 연구단체인 신도학회가 발족한 것은 1926년 9월이었다. ‘근대 일본 신도학의 성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제점숙 옮김,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서울:논형, 2016, pp.379-422를 참조하라.)

 

한편, 1549년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첫발을 딛고 종교행위를 시작하며 일본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나름대로 교세를 확장하던 기독교는 1872년 3월 요코하마에 근대기 최초의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까지 이른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J.에드킨스(Joseph Edkins, 중국명 埃德金斯, 1823-1905)가 펴낸 불교비판서 『석교정류釋敎正謬』 (주: 에드킨스가 1857년에 쓴 이 책은 1868년 홍콩 영화인서원英華印書院에서 인쇄·출판됐다. 1848년 중국에 온 에드킨스는 1905년 상해에서 타계했다. )를 논박한 책들이 일본에서 다수 출판되며 기독교에 대한 불교계의 사상적 논리적 공격이 본격화됐다.(주: 당시 일본 불교계의 기독교 비판과 출판물에 대해서는 이태승 지음,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파주:올리브그린, 2020, pp.270-281을 참조.) 불교계의 기독교 비판을 보며 메이지 정부는 불교존립의 이유를 발견했을 수 있다. 아니 적어도 ‘이 비판’이 불교의 존재가치를 메이지 정부에 새롭게 이해시키는 계기는 됐을 것으로 보인다.(주: 이태승 지음,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파주:올리브그린, 2020, p.122.) 메이지 정부가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기 힘들고, 국교로 추진되던 신도의 체계로는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힘들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기관 설립·인재양성·건백서 제출 등 일본 불교계의 노력, 불교의 활용가치에 눈뜬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메이지 정부 관료들의 암묵적 동의(주: 이태승 지음,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파주:올리브그린, 2020, p.161.), 무엇보다 “왕법과 불법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 회맹의 함성 등이 어우러지자 폐불훼석 정책은 점차 힘을 잃었다. 1877년 1월 주무부서인 교부성이 폐지되고, 1884년 8월 사원주지 임면任免 등이 각 종파 관장에게 일임되며 폐불훼석은 소멸되고 만다. 

 

 

 

이후 ‘가장 세속화된 종교’이자 ‘왕법에 충실한 불법’, 그리고 ‘덴노 제도의 불교’로 재탄생된 메이지 시대의 일본불교(계)는 국가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하부기구로 변한 채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에 ‘근대’와 ‘문명개화’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1877년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에스이平野惠粹가 부산에 설립한 동본원사 부산별원(지금의 중구 신창동 대각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종교(불교)를 컨트롤하는 경험과 요령을 자세히 습득한 ‘제국주의’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후, 일본과 조선의 일체화를 위해 ‘조선불교’를 일본식의 ‘대처帶妻가 주류인 불교’로 바꾸고자 정책적으로 노력·추진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 간 대다수 학승들이 귀국 전후로 결혼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근대’로 치장治粧하고, 국내에 있던 친일승親日僧들이 점차 혼인하기 시작하자 조선에서 비구승의 숫자는 차츰 줄어들었다. 일제의 통치 연수年數가 쌓임에 따라 출가자의 결혼과 대처는 어느 새 ‘파계破戒’가 아닌 ‘일상’이자 ‘자랑 거리’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식민지 근대’의 한반도 불교를 일본식의 ‘대처승 중심 불교’로 만든 근대기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부족하다 못해 공백에 가까운 결핍 상태다. 근대 일본의 불교·불교정책에 대한 이해와 천착이 빠진 일제 하 한반도 불교 연구는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 최근 위덕대 이태승 교수가 출간한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파주:올리브그린, 2020, 사진 1)은 근대기 ‘일본불교의 정책’, ‘일본불교의 변화 과정’, ‘일본의 불교학이 강해지게 된 배경’ 등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책과 함께 『근대 일본과 불교』(서울:그린비, 2009, 사진 2), 『식민지근대라는 경험-식민지 조선과 일본 근대불교』(일어판, 교토:法藏館, 2018, 사진 3), 『근대 일본의 종교담론과 계보』(서울:논형, 2016, 사진 4), 『불교파시즘』(서울:교양인, 2013, 사진 5), 『전쟁과 선』(경기 고양:인간사랑, 2009, 사진 6),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종교변혁』(서울:소화, 2002, 사진 7), 『근대 일본인의 종교의식』(서울:소화, 2009, 사진 8), 『일본종교사』(서울:논형, 2009),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파주:창비, 2009), 『제국대학의 조센징』(서울:휴머니스트, 2019), 『근대 일본의 천황제』(서울:이산, 1998), 『근대 일본』(서울:을유문화사, 2004) 등도 틈틈이 독파하면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근대의 종교정책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 펼친 불교·종교 정책도 문득 문득 이해가 된다. 식민지 시대 그들이 시행한 정책의 여진餘塵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불교에 적지 않게 남아있음을 고려하면 ‘근대기 일본의 불교·불교정책’을 세밀하게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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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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