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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19 년 10 월 [통권 제78호]  /     /  작성일20-05-29 10:06  /   조회5,3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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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 대한불교조계종 제6 · 7대 종정 

 

1. 초전법륜

 

지금까지 이야기한 ‘불생불멸’이라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무애법계’라고 하는 이론들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의 뜻을 전하는 화엄 및 법화사상은 대승경전의 말씀들인데, 이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수백 년이 지나서 편집된 것이므로 더러 잘못된 것이 없나 하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설령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무렵에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더러 잘못 듣거나 잘못 기록하여 오전誤傳이 있을 수가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백 년 뒤에 편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경 매화산 정상에서 상좌들과 함께한 성철 스님(앞줄 가운데). 성철 스님 왼쪽이 원택 스님, 오른쪽이 원명 스님, 뒷줄 오른쪽 두번째는 원해 스님

 

 

 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결과, 한때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설直說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신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곧 성립된 경전인 <아함경>에서 부처님의 사상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과연 <아함경>을 열심히 연구해 보니 처음에는 이 경전에서 표현된 부처님의 사상이 대승불교의 사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듯이 보였습니다. <아함경>을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그 <아함경>에서 발달된 사상일 뿐이지 실제의 부처님 사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뒤에 연구를 거듭해 나가 보니 <아함경>에도 부처님의 친설親說이 아닌 것이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권위자들이 더욱 깊이 연구를 한 결과, 원시 경전인 팔리어 경전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를 가진 초기의 법문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돌무더기 속에서 금이나 옥을 발견해낸 것과 같았습니다. <아함경> 중에서도 <잡아함경> 같은 데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은, 당시 인도의 여러 사상을 종합해 볼 때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부처님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율장에서 그에 대한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부처님께서 맨 처음으로 법문하신 것인데,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동시에 교단을 조직하신 그 출발점부터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혼자만 좋은 법을 알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 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좋은 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서 그들도 함께 깨닫고 자신과 같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수행하던 중에 고행이 결코 도道가 아님을 알고 방향을 전환하였을 때에 부처님을 떠나 버린 다섯 비구를 맨 처음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그들 다섯 비구는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을 찾아오고 있는 부처님에게 인사도 하지 말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처님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스스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대법大法을 성취한 만덕종사萬德宗師이신 부처님께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곧 온몸을 땅바닥에 대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을 자리에 모셔 놓고 “어찌하여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것을 맨 먼저 그들에게 소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무엇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그 제일성第一聲을 토하셨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하며,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善과 악惡의 상대, 시是와 비非의 상대, 유有와 무無의 상대, 고苦와 낙樂의 상대 등, 이렇듯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현실 세계는 그 전체가 상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이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상대의 세계 곧 양변의 세계에서는 전체가 모순덩어리인 동시에 투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계는 불행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고 투쟁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양변,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是非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이른바 사바고해娑婆苦海인 까닭에 그 양변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정등각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변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악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면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으로 보면, 유有 무無가 가장 큰 대립입니다. 중도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니,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납니다[역유역무亦有亦無]. 그 뜻을 새겨 보면 이러합니다. 곧 3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無合故名爲中道].”

 

불생불멸의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有卽是無, 無卽是有]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그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짧은 시일 안에 곧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초전법륜입니다. 이렇듯이 초전법륜의 근본 골자는 중도에 있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융통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는 있고 없음이 분명히 상대가 되어 존재하지만, 눈을 뜨고 보면 유와 무, 곧 있고 없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동시에 유와 무가 완전히 융합해서 통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도의 세계란 유․무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양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불교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고 대승불교 사상도 여기에 입각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一切卽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 사상도 중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변입니다. 하나와 일체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며 곧 불교 전체의 사상인 것입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은 모두 중도에 입각해 있는 사상입니다.

 

대승경전이 시대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몇 백 년 뒤에 성문화된 것이라고 하여도 그 근본은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인 것입니다. 대승경전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거나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이, 화엄과 법화 또한 중도를 그대로 전개시킨 것이니, 그것이 곧 초전법륜이 되는 것입니다.

 

2. 대승불교 운동

 

대승경전이 성립되기 전에 소승경전이 많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부파部派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부처님의 중도 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순전히 유와 무, 곧 양변의 유 · 무 사상을 가지고 싸움을 일삼았습니다. 어떤 파는 유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라고 하고, 어떤 파는 무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라고 주장하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들 각 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편집할 때 자기들이 본 대로, 자기들의 주장대로 부처님 경전을 편집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소승불교의 근본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중도 사상이 오히려 망각되고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대승경전보다 앞서 성립되었다는 팔리어로 씌어진 소승경전은 유․· 무에 입각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완전히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전체가 중도 사상에 입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그것은 소승불교에서 발달된 사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아니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중도대승中道大乘, 중도일승中道一乘에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 사상은 부처님 사상을 그대로 전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 운동은 부처님의 근본불교 복구운동이라고 합니다. 근본불교를 복구시킨다 함은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디의 말씀대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의 복구운동임을 밝히는 데에서 가장 앞선 선구자가 바로 용수 보살입니다. 용수 보살은 많은 저술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이 있습니다. <대지도론> 100권은 그 사상을 자세하게 펼친 것이고 <중론>은 간략하게 요약한 것인데,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특히 <중론>은 내용이 요약되어 그 사상의 골수를 잘 드러내 보이는데 이름을 ‘중론’이라 한 까닭은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오직 중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파불교 시대에 불교가 잘못 전해져, 유다 무다, 생이다 멸이다 하면서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그러한 싸움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근본 사상인 중도를 바로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해서 저술한 책이 바로 <중론>입니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중도 사상을 바로 세우고 널리 펼치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완전히 복구시킬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사상이 지금까지 불교를 지배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는 어떤 학자든지 대승불교가 근본불교―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복구한 운동―이지 결코 뒤에 변질되거나 새롭게 발전시킨 사상이 아님을 총결론으로써 의심 없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의심을 일으켜 의논이 분분하였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전법륜에서 중도만을 말씀하셨지 진여眞如라거나 연기緣起라거나 법계法界라는 것은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전법륜에서 중도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잡아함경>과 같은 조그만 경전이 편집되면서 중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곧 그곳에서는 중도가 바로 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여라고 하는 것은 절대입니다.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여는 양변을 여읜 절대의 세계입니다. 동시에 진여는 법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여법계眞如法界는 일체연기법一切緣起法에 의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도, 진여, 법계, 연기 이 네 가지는 대승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이들을 빼버리면 대승불교의 사상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실 때는 간단히 중도라 하여 양변을 버린 것이라고 말했지만, 뒤에 가서 부연하여 중도를 다양하게 설하셨습니다. 중도를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연기가 따라오고, 법계가 따라오고, 진여가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진여, 법계, 중도, 연기 이것을 버리고 불교를 찾으려 함은 마치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중도라는 것이 과연 부처님께서 최초로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인도 사상에서 이미 있었던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인도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대개의 학자들이 그것은 부처님의 독창적인 깨달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곧 부처님의 중도 사상은 시대적 연관 위에서 성립된 것이지 부처님의 독창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이전과 그 당시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본 결과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사상은 다른 데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중도 사상은 부처님의 새로운 발견이며 독창적인 새 출발이라고 학자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도 사상을 총괄하여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심唯心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唯物사상입니다. 유심사상은 전변설轉變說로 되어 있고, 유물사상은 적집설積集說로 되어 있습니다. 전변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 나가고 적집설은 고행주의로 나가는데, 유심과 유물, 전변설과 적집설, 수정주의와 고행주의 들이, 말하자면 부처님 이전에 인도 사상을 통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유심도 유물도 버리고, 전변론도 적집론도 버리고, 수정주의도 고행주의도 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지로 수행하여 유심과 유물을 버려야만 중도를 정등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도 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깨달으신 새 발견인 동시에 불교만의 독창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3. 중용과 변증법

 

중국에는 <중용中庸>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중도와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유교 사상에서의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음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은 지나쳐 버리기 쉽고 모르는 사람은 너무 미치지 못하므로, 과過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中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중中’은 단순한 중간의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이 일찍이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변을 완전히 버리고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 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 사상과 비슷해 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辨證法 사상입니다. 정正 · 반反 · 합合,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보기를 들어 정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이것에 모순이 생기면 다시 반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것이 서로서로 종합이 되어서 합合이라는 사상이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정 · 반 · 합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 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정과 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것은 양변이 모두 모순인 것을 갖고 만든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 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 사상을 떠나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한 반역反逆인 것입니다.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의 그 진위眞僞를 가리려면 중도논리中道論理, 중도정의中道定義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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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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