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손가락 사이]
진짜 내 글씨 한 줄
페이지 정보
최재목 / 2019 년 8 월 [통권 제76호] / / 작성일20-05-29 10:31 / 조회5,191회 / 댓글0건본문
시·그림 최재목 |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진짜 내 글씨 한 줄
진짜 내 글씨 한 줄
삐뚤삐뚤 써댄다
해우소 변기에는
죽을 힘 다해 피고
온 생명 다 바쳐서 지는
山, 山, 조각의 문자가
더러더러 있다
뜨뜻하게 허공을 머물다 가는,
무명풍
그런 헛소리
부모미생이전의 문자를
누구나 여기 오면
한 획 한 획, 애써 꺾어댄다
진짜 목숨 걸고 새긴 글씨
그런 맹세는
내가 눈 똥오줌 속에서만
헛소리처럼
들어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흙을 파서 고운 이랑을 만들고
들깨 씨를 묻었다
이만하면 올해도 한 밭 가득 심으리라 확신하며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을 다 되어도
싹은커녕 잡초만 무성했다
아무래도 새들이 다 먹어치운 듯 했다
허탈하여 며칠 밭가를 맴돌며
섭섭한 마음으로 새들이 날아간 하늘만 쳐다보았다
이 맘쯤 푸른 들깨 싹들이 구름 고랑을 따라
푸릇푸릇 자라나겠지…,
언젠가는 들깨 알들이 주룩 주룩 지상에 쏟아지겠지…,
새들이 키울 하늘의 밭 모습이 궁금해져, 나는
밤마다 하늘로 올라갔다
거기, 들깨 싹들은 보이지 않고
내가 버려둔 지상의 빈 밭고랑만 즐비했다
꿈이 더 괴로워, 할 수 없이
시장에 가 들깨 모종을 사서
장마가 시작된 날 다 심어 놓고 내려왔다
그동안 새들이 나를 얼마나 놀려댔을까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싹터오지 않는 땅을 무작정 믿고 기다렸던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정직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인간은 울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천년 고도 교토에는 수많은 정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료안지龍安寺나 다이토쿠지大德寺처럼 사찰의 방장 정원이거나, 가쓰라리큐桂離宮, 슈가쿠인리큐修學院離宮처럼 황실 정원입니다. 정원에 가더라도 거기 있…
서종택 /
-
팔순八旬에 다시 보이는 성철 큰스님 유필
아마도 우리 세대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말을 젊은 날부터 귀가 따갑게 들으며 살아왔고, 소납도 70살까지 살면 다행이다 하…
원택스님 /
-
말법시대 불명참회와 53불신앙
지난 호에서 살펴본 윈강 11굴 태화 7년(483) 명문과 석경산 뇌음동의 참회의식은 당시 수행자가 말법시대를 대비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 때 조성된 윈강 11굴…
고혜련 /
-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연꽃은 불교를 선명하게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진흙탕 안에서도 고아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은근히 드러내지만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아니한다. 연은 잎에서부터 뿌리며 씨앗까지 인간 삶에 어느 하나 …
김세리 /
-
불교에서 유래한 고려시대 대표과자 유밀과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벚꽃의 향연은 막을 내리고 연둣빛이 선연히 짙어가는 5월입니다. 마치 차례로 줄을 서서 4월이 밀어 올린 기운을 받아 5월은 더욱 찬란하게 되는 느낌입니다. 장미꽃의 붉은 향기는…
박성희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