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함께 하는 인생이야기]
나의 스승,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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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자 / 2019 년 6 월 [통권 제74호] / / 작성일20-05-29 11:27 / 조회6,292회 / 댓글0건본문
박원자 | 불교 전문 작가
온갖 생명들이 활짝 기지개를 편 아름다운 계절이어서 일까? 5월에는 유난히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처님오신날이 들어 있다. 며칠 전 어버이날, 두 딸들이 저녁자리를 마련해서 남편과 함께 밥을 먹었다. 며칠 있으면 다가올 스승의 날을 생각해보면서 친정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래, 그날은 어머니 묘소에 가서 꽃 한 송이 올려야겠다. 생각해보니 나의 어머니보다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스승은 없다 싶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는 분”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아, 이제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만큼 조건 없는 사랑을, 무한한 사랑을 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몇 해가 지났어도 그건 분명한 사실로 남아있다. 둘째 아들과 함께 사셨던 어머니는 매일 오후 4시에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에겐 일종의 의식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딱 그 시간이면 전화를 하셔서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날이 선선한데 옷은 따뜻하게 입고 나갔니? 요즘 쑥이 좋던데 된장국 한번 끓여 먹지 그러니? 쌀 다 먹어가지 않니?”
농사지어서 보내주시는 쌀이 떨어질 때쯤이면 어머닌 정확히 아시고 전화를 주셨다. 날마다 빠짐없이 행해졌던 어머니의 전화는 여든아홉에 돌아가시기 보름 전까지 계속되었다. 때로 바쁠 때 전화를 받으면 무성의하게 전화를 받았던 일이 가슴 쓰린 후회로 남아있다. 이제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전화를 돌아가시고 얼마 후 꿈속에서 받았다. 생전에 전화를 자주 주셨기 때문일까, 그날도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오셨다. 너무 반가워서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뭐라고 입은 여시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큰딸아이에게 꿈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어디 계실까?” 했더니 아이가 상큼하게 바로 대답했다.
“엄마, 걱정 마, 할머니는 지금 파리에서 태어나셨을 거야. 그리고 아마 할머닌 패션디자이너가 되실 거야.”
비교적 건강하게 말년을 보내셨던 어머니는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일 년 전쯤부터 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하셨다. 그렇게 삶을 마무리하시는가보다 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다음 생애에는 무얼 하고 싶어요?”
“사업가가 되어보고 싶어.”
젊었을 적 아버지 농사를 도와주시면서도 시내에 나가면 꼭 단골 포목점이며, 양장점을 들르면서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셨던 어머니다. 내생은 그만두고 이번 생에도 아마 그런 일을 했으면 아주 잘했을 텐데, 그 시절엔 여성이 밖으로 나와 사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동생에게 ‘엄마가 사업을 했으면 엄청 성공하셨을 거야’ 했더니 ‘우리가 힘들었겠지, 엄마가 집에 안계셨으면.’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재능은 자식들을 안정적으로 키우는 데 쓰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언제나 멋쟁이였다. 시장에 나가서도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잘 골라 입었고,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한번은 바바리코트를 맵시 있게 입으셨기에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니 ‘양장점에서 맞추었어. 이제 바바리코트는 마지막일 것 같아서.’ 하셨다. 칠십이 넘었을 때일 것 같은데, 어머니는 그 후로도 바바리코트를 한두 번 더 사 입으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옷을 새로 사 입으면 노인정 할머니들의 스타일이 바뀌곤 했다. 똑같은 것으로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할머니들의 심부름을 종종 했던 어머니다. 심지어 반지 하나, 팔찌 하나를 사도 다들 똑같은 것을 사기를 원했다고 하니, 어머니는 동네 패션의 리더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인지 내가 젊어서 애들을 키울 때 옷에 신경을 못 쓰고 사는 걸 안쓰러워했다. 서울 우리 집에 오시면 늘 마트에 들러 옷을 한두 벌 사주곤 하셨다. 어느 해 겨울, 두터운 코트를 하나 사주시곤 ‘얘, 세상이 다 따뜻해진 것 같다.’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작은 아이를 낳고 나자, 피부를 잘 가꾸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영양크림을 사 오셨던 어머니다.
젊은 시절, 내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 한참 동안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낸 적이 있다. 무심코 어머니와 통화중에 ‘사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네, 엄마.’라고 했는데, 자식을 키워보니 어머니가 그때 얼마나 마음이 쓰리셨을까 싶다. 자식이 행복해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걸 자식을 키워보고 나서야 알았으니, 이제 와서야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머니는 일흔 전 까지는 고추장, 된장, 간장을 직접 담가서 보내주셨고, 가을이면 맛이 기가 막힌 청국장을 띄워서 보내주셨다. 여행을 가셔서는 이것저것 예쁜 그릇이나 생필품 등을 골라오셨다. 눈썰미가 얼마나 좋은지 그 많은 물건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쁜 걸 골라오는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머니가 종종 하셨던 말씀이다. 학교를 보내도 될 만큼 넉넉한 집에서 성장한 어머니는 ‘여자가 학교에 가서 뭐하누?’ 하셨던 외할아버지의 고루한 생각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시집온 걸 무척이나 아쉬워하셨던 분이다. 외할아버지 몰래 동네 야학에 나가 한글을 깨우쳤다는 어머니는 ‘할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할머니는 왜 나를 안 가르쳤던 거니? 나라면 도망이라도 시켜서 배우게 했을 텐데.’ 하시며 외할머니를 원망했다. ‘그 시절엔 다 그랬지 뭐’ 하고 어머니의 울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머니의 고향인 예산에 모시고 갔을 때 어머니의 그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어려서 살았던 마을을 걷던 어머니가 극장 앞에서 멈추더니, ‘너희 아버지에게 시집오기 전에 선을 봤는데, 그 사람이 다음에 여기 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안 나갔지.’ 하시는 게 아닌가.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왜 안 나가?”
“그 사람은 중학교를 나와서 어느 큰 가게 점원으로 있었거든.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무학이라 그게 자존심 상해서 안 나갔어.”
‘엄마가 그 때 극장 앞에 나갔으면 우린 없었겠네’, 하면서 같이 갔던 언니와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어머니의 콤플렉스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컸던 것 같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일이 또 하나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우리 집 식구들 이름을 한자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즈음 어머니는 어느 절 신도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남들을 보니 축원카드에 한자로 이름을 쓰더라는 것이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엄마, 한글로 써도 돼’라고 하는 나에게 기어코 한자이름을 받아냈다. 지금 같으면 백 번 친절하게 한자이름을 써드리는 건 물론, 반야심경도 함께 읽고 했을 텐데, 정말이지 마음 아픈 일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현명하고 재주 많았던 어머니가 살면서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을까 싶다.
‘현재’를 활발하게 사셨던 어머니
열아홉에 시집을 온 어머니는 그래도 지혜롭고 씩씩하게 사셨다. 남의 집 농사를 짓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가질 만큼 성실하게 아버지를 보필하며 집안을 일으켰고, 오빠 언니를 비롯해 우리 오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재주가 많아서 남의 잔치에 가면 항상 진두지휘를 했고, 볏가리를 동네에서 제일 솜씨 있게 쌓아서 이 집 저 집 불려 다녔던 어머니다. 그뿐인가, 장 담그는 솜씨가 뛰어나 봄이면 밥 맛 없다고 동네어른들이 우리 집으로 장을 얻으러 왔고, 동네 어귀에 있던 우리 집엔 늘 사람들로 붐볐다. 동네에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 집으로 와서 어머니의 말을 듣곤 화해를 해서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던 할머니가 나를 보면 ‘동네에서 너희 엄마에게 변호사 사무실 하나 차려주어야 하는데.’ 하곤 했다. 어머니의 설득에도 화해가 안 되면 어머니는 그들을 데리고 경찰서로 가곤 했는데, 당시 우리 오 남매는 그렇게 늘 오지랖 넓어서 바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어느 정당에 가입해서 부녀분과위원장인가를 맡아서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1박2일 연수에 다녀오더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이 교육이 끝나고 치른 시험에서 일등을 했다고 자랑하셨다. 칭찬은 고사하고 왜 저런 일을 하시나 하고 외면했던 자식들에게 서운했던지 내가 결혼하고 얼마 후, 남편을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더니 그때 받은 상장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셨단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어머니의 유일한 사회생활이자 자긍심이었을 텐데, 칭찬해드리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쉽고 죄송하다.
어머니는 삶도 잘 마무리하셨다. 연세가 드시자 자식들에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지혜를 발휘했고, 자신을 모신 자식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인사를 자주 하셨고, 크게 편찮지 않고 잘 가셨다. 안양월이란 법명을 가지셨으니 편안한 곳으로 다시 오셨으리라 믿고 싶다.
“단결에 해라.” 어머니가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무엇에도 분별함이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현재를 늘 활발하게 사셨던 어머니의 삶에서 나온 지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삶은 지금 여기뿐인 것을 깨달아 ‘행복하니 불행하니, 좋으니 싫으니’ 하는 분별없이 ‘지금 여기’를 사셨던 어머니가 ‘다음에 할게’를 입에 달고 살았던 나를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셨을까 싶다. 그래도 나무라지 않고 ‘너는 많이 배웠으니 훌륭하다’고 여겨주며 응원해주셨던 어머니께 스승의 날을 맞아 고백해본다.
“나의 스승이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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