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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강물에 일렁이는 달빛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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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5 월 [통권 제37호]  /     /  작성일20-05-29 12:45  /   조회6,05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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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공에 대한 오해

 

불교하면 무아(無我)와 공(空)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가르침 중에 하나가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 ‘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아와 공사상의 요지는 ‘나’라는 존재는 연기적 관계망 속에 있을 뿐 그 어떤 불변적 실체도 없으며, 눈앞에 펼쳐진 객관 대상들 역시 본질적으로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왜 이처럼 무아를 강조하고, 존재의 공성(空性)을 핵심적 교의로 설파할까? 그것은 우리들이 사로잡혀 있는 왜곡된 인식을 정화하고,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집착을 소멸하기 위함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들은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유견(有見)에 빠져 있고, 내가 욕망하는 대상[法]이 실재한다는 확신에 차 있다. 이와 같은 믿음에서 나와 대상에 대한 강고한 집착이 발생하고, 그런 집착으로 인해 번뇌가 치성해지고, 그로 인해 삶 자체가 고통으로 점철된다.

 


 

 

무아와 공은 그와 같은 왜곡된 유론에서 비롯된 집착을 해소함으로써 번뇌를 제멸하고, 중생들의 마음에 평화를 주기 위한 처방전이다. 그러므로 무아와 공을 바르게 받아들이면 자연히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무엇을 소유하고 얻고자 하는 집착의 주체인 내가 존재하지 않으며, 소유하고 누리고 싶은 대상 자체가 공하다면 그것을 향한 갈애는 무의미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질주하는 맹목적 삶도 부질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와 대상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되는 대표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가 바로 ‘수중월(水中月)’과 ‘경중상(鏡中像)’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모든 대상들을 볼 때 ‘물속에 아른거리는 달그림자’처럼 보고, ‘거울 속에 비친 형상’처럼 보라는 것이다.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는 매일 불전을 향해 낭독하는 축원문에도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는 표현으로 들어 있다. 우리들은 흐르는 강물에 일렁이는 달빛그림자와 같은 허상을 좇아 욕망하고 질주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수중월의 비유는 일체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를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과 다름없다. 불교를 이렇게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불교는 염세적 종교가 되고, 불자의 삶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은둔의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또 하나의 극단이자 변견(邊見)이며, 그런 변견으로부터 또 다른 번뇌와 고통이 발생한다.

 

무와 공에 대한 염세적이고 부정적 이해를 ‘낙공(落空)’이라고 한다. 허무주의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며 모든 것을 부정하고, 염세적 삶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낙공의 태도를 갖게 되면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실천도 무의미해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원력도 사라지며, 고통 받는 이웃을 돕고자 하는 자비행의 실천도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우리는 비관이 아니라고 하면 곧바로 낙관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불교가 비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면 낙관주의는 수용할까? 정답은 불교는 염세주의도 부정하지만 맹목적 낙관주의도 배격한다. 염세나 낙관은 존재의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측면만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변견이며 극단이다. 따라서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를 허무주의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는 것이며, 한쪽 측면만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가 담고 있는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원교란 바로 중도를 나타내어 두 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非空非假),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非內非外). 십법계의 중생을 관하기를 거울 속의 모습(鏡中像)이나 물속의 달(水中月)과 같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끝내 실체는 아니지만(畢竟非實) 삼제의 이치가 뚜렷이 구족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은 『백일법문』에 인용된 천태 대사의 『관음현의』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천태와 화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수승한 교설을 원교(圓敎)라고 분류하고, 원교의 핵심을 중도(中道)라고 했다. 원교에 대해 천태 대사는 “중도를 바르게 나타내는 것이며(正顯中道), 두 변이라는 극단을 막는 것(遮於二邊)”이라고 했다. 중도가 곧 원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존재를 중도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물속의 달그림자(水中月)’와 ‘거울 속의 형상(鏡中像)’이라는 비유이다.

 

이들 비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속의 달은 거짓이고, 거울 속의 형상은 환영일 뿐이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흐르는 강물 속에 일렁이는 달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수중월을 그렇게만 이해하면 또 하나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며, 중도의 정신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존재를 ‘공하고 실체가 없다’라고만 바라보면 ‘없다(無)’라는 변견에 치우쳐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천태 대사는 제법의 실상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다(非空非假)’라고 했다. 물속의 달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실제의 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물속의 달은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假)’란 눈앞에 펼쳐진 현상적 존재를 말한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현상은 완전한 실상이 아니라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이미지에 불과함으로 ‘가(假)’로 표현된다.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바라보는 유견에서 집착이 발생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중생은 내가 있다고 집착하고, 내가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하고자 몸부림친다.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의 비유는 그와 같이 유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물속의 달이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므로 ‘비가(非假)’이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없지 않다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거짓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에 달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속에 일렁거리는 달그림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없다고 외면하는 순간 우리들의 삶은 공허에 빠져들고 허무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달그림자라는 비유는 어디까지나 유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는 데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 모든 것이 공하고, 아무 것도 없다고 바라보면 염세라는 극단에 빠지기 때문이다.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는 완전히 없는 절대 무가 아니라 그림자의 형태로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비공(非空)’이다. 영원한 실제로 집착할 대상도 못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강물에 일렁이는 달빛 같이 보는 눈

 

결국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라는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존재는 ‘비공비가(非空非假)’라는 중도적 관점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삼라만상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대로 실재하는 것도 아니지만(非假)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도 아니다(非空). 이것이 모든 존재가 가진 중도적 특징이자 존재의 실상이다. 존재가 가진 이와 같은 두 가지 속성을 함께 꿰뚫어 보는 것이 정견이며, 그렇게 보는 것이 중도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볼 때 물속의 달그림자가 갖는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꿰뚫어보아야 한다. 이것이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가 갖고 있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거울 속의 형상이라는 비유를 중도적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속의 달이라는 비유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허무적 가르침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라만상이 보이는 그대로 실재한다는 가르침도 아니다. 그러므로 물속의 달그림자를 볼 때 아무것도 없다고 보아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보이는 그대로 모두 있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집착하면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변견이 되고, 그런 변견으로부터 무명이 생겨나고, 지혜가 빛을 잃게 된다.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는 ‘거짓 모습[假]’으로 분명이 있지만 그렇다고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천태 대사는 존재의 실상은 물속에 아른거리는 달그림자에 있는 것도 아니며(不在內) 그렇다고 그와 같은 가유를 벗어난 곳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不在外). 모든 존재는 마치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아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빔도 아니고(非空), 물속에 보이는 달그림자가 그대로 실상인 것도 아니다(非假).

 

결론적으로 물속의 달그림자라는 비유는 한편으로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해소하는 공(空)에 대한 가르침이며,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펼쳐져 있는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유(有)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두 개념을 함께 통찰하면 사바세계의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역동적 삶이 펼쳐지게 된다. 그래서 천태 대사는 일체 모든 존재를 볼 때 반드시 ‘거울에 비친 형상(鏡中像)’이나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水中月)’와 같이 중도적 시선으로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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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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