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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마음의 작용 단계와 인식 대상의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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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12 월 [통권 제8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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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입동을 지나면서 북한산의 단풍 이 날마다 마을로 내려온다. 만산홍엽으로 곱게 물든 계절이지만 가을을 맞이하는 사람의 태도는 제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까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잿빛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동일한 대상인데 왜 사람들은 제각기 대상을 받아들이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감성이 달라지는 것일까?

 

마음 작용의 네 단계[四分說]

 

이처럼 마음은 어떤 단계를 거쳐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우리가 인식한 대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밝히는 교설이 유식의 사분설四分說과 삼류경설三類境說이다. 일반적으로 유식唯識하면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하는 팔식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유식을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에서 절반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반학半學은 팔식설이 아닌 사분설과 삼류경설이다.

 

먼저 사분설은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해 설명한 교설이다. 유식에서 마음이란 심心과 심소心所로 구분된다. 심心이란 제6식이나 제8식 같은 마음작용의 근간을 말한다. 이들 여덟 개의 식은 마음의 왕이라는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 부른다. 반면 심소란 달리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줄인 말로 ‘마음이 소유하고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심소는 마음[心王]이 작동할 때 동원되는 것이므로 마음이 ‘거느리고 있는 무리[眷屬]’이자 마음을 왕으로 섬기는 신하臣下로 이해된다.

 

사분설은 심왕과 심소에 의한 마음의 작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는 네 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와 같은 사분설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무착無着과 난타難陀는 대상이 되는 상분과 그것을 인식하는 견분만 설명하는 이분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진나陳那는 여기에 자증분을 더하여 3분설을 주장했고, 최종적으로 호법護法은 증자증분을 더하여 사분설을 완성했다.

 

첫째 상분相分이란 마음작용[심과 심소]이 일어날 때 대상이 되는 객관의 경계境界를 말한다. 마음작용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능연能緣이라면 상분은 수동적 대상이 되는 소연所緣이 된다. 단풍을 보면 기쁘거나 우울해지듯이 마음작용은 주관과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데 안근眼根에 드리워지는 단풍과 같은 객관의 이미지가 상분相分이다.

 

둘째 견분見分이란 객관대상인 상분을 받아들이는 주관의 작용을 말한다. 눈이라는 안근에 맺힌 이미지를 붉은 단풍으로 이해하는 것이 견분의 작용이다. 견분은 단순히 상분의 이미지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잘 비추어 보는[見照] 작용을 겸하고 있다.

 

셋째 자증분自證分은 인식 주관인 견분이 지각한 내용을 검증하여 아는 작용을 말한다. 여기서 자自는 대상을 보는 주체인 견분을 말하고, 증證은 정보를 체득해 아는 증지證智의 뜻이다. 상분이 단풍이라는 객관 대상이라면 견분은 그것을 반영하는 안근의 작용이다. 그 때 자증분은 안근에 맺힌 정보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단풍에 대한 상像을 찾아내 두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하여 단풍으로 인식하는 것이 자증분의 역할이다.

 

넷째 증자증분證自證分은 자증분의 활동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 여기서 증은 증지이고, 자증은 자증분이므로 자증분의 작용을 거듭 인지하는 것이다. 증자증분은 견분이 이해한 정보와 자증분에 저장된 정보를 비교하고 점검하여 최종적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증자증분의 단계를 거치면서 단풍은 기쁨도 슬픔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조락의 계절을 느끼거나 우수에 젖는 정신적 작용이 나타난다. 그러나 증자증분은 학자들에 따라서 필요 없다는 입장과 필요하다는 입장 등으로 나눠진다. 자증분과 증자증분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의 사분설에서 상분은 소연所緣이 되는 객관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음의 주관적 작용이 되는 능연能緣이다. 이렇게 보면 단풍과 낙엽을 보고 느끼는 감상은 단지 어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마음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상은 소재일 뿐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주관의 작용이다.

 

대상의 세 가지 성질[三類境說]

 

사분설이 인식작용을 구분한 교설이라면 삼류경설三類境說은 사분설 가운데 객관대상인 상분相分의 성격을 세 가지로 분류한 교설이다. 삼류경설에 대한 내용은 현장이 번역한 『성유식론』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규기窺基나 혜소慧沼의 논소 등에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첫째 성경性境은 객관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여 왜곡 없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경은 실재성을 갖고 있는 상분을 의미한다. 규기는 ‘성경은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性境不隨心)’고 했다. 성경은 주관인 마음이 대상이 되는 법法을 왜곡 없이 인식할 뿐 주관에 의해 조작되지 않는다. 전5식과 제6의식이 바깥 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대상이라는 종자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선악 등과 같이 주관의 성질에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독영경獨影境은 실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 견분이 ‘혼자 그려낸 허구적 이미지’를 말한다. 그래서 규기는 ‘독영경은 견분만을 따른다(獨影唯從見)’고 했다. 객관대상을 사실대로 반영하지 않고 견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낸 허구적 이미지[相]이기 때문이다. 마치 눈병난 사람이 헛것을 보는 것처럼 견분의 분별에 의해 나타난 환영이 독영경이다.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 같이 마음이 자가발전 하여 실재하는 것을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독영경이다. 따라서 독영경은 허상이자 실재성을 갖지 못한 허구적 인식(幻覺)을 말한다.

 

셋째 대질경帶質境은 객관의 상분도 존재하고, 주관의 견분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규기는 ‘대질경은 심정과 본질에 통한다(帶質通情本)’고 했다. 문제는 실재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본질을 그대로 반연하지 않고 견분에 의해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대질경이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오인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새끼줄이라는 객관의 상분도 실재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인식작용인 견분도 작동한다. 하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한 것이므로 대질경은 착각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상과 같은 삼류경설은 인도 유식학에는 찾아볼 수 없는 법상종의 고유한 교설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장이 스승 계현戒賢으로부터 전수받아 정리하거나 스스로 창안한 학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유식학에서는 성경, 독영경, 대질경 같은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비록 그런 명칭은 없었지만 삼류경설에 해당하는 기본개념은 인도의 논사들에 의해 이미 논의되었다고 지적한다. 유식학의 교의에 따르면 식체識體가 변하여 주관인 견분과 대상인 상분으로 현현한다. 여기서 견분과 상분이 같은 종자에서 생겨나는지, 다른 종자에서 생겨나는지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등장하게 된다. 첫째 상견별종설相見別種說로 상분과 견분이 서로 다른 종자에서 생겨난다는 설이고, 둘째 상견동종설相見同種說로 주관과 객관이 같은 종자에서 생겨난다는 설이고, 셋째 상견혹동혹이설相見或同或異說로 상분과 견분이 어떤 때는 같은 종자에서 어떤 때는 다른 종자에서 생겨난다는 설이다.

 

이런 세 학설을 삼류경설과 대비하면 맥락이 일치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 주관과 객관이라는 서로 다른 종자로부터 생기는 상분은 성경이고, 주관이라는 같은 종자에 의해 생기는 상분은 독영경이며, 대상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대질경은 혹은 같은 종자에서 혹은 다른 종자에서 생기는 상분에 각각 해당한다. 삼류경설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해야할 것인지, 어떤 인식이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가짜뉴스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주장함으로 독영경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있는 사실이지만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의미를 왜곡하고 변질시킨 정보는 대질경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독영경과 대질경에 의해 마음이 오염되어 여실지견하지 못하고 미망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성경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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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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