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평상심, 남전과 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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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3 년 10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29 14:02 / 조회6,835회 / 댓글0건본문
이인혜
불교에는 도를 표현하는 말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교학의 언어는 정교하고 복잡하다. 경론을 읽으려면 낱낱의 개념을 숙지하고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선사들은, 어디서 왔느냐, 밥은 먹었냐는 식으로 쉬운 말을 쓴다. 때로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거나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도를 표현하기도 한다. 말의 한계를 통감한 끝에 일부러 그런 길을 택한 것이겠지만 역시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일상적인 말이 암호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심심미묘한 표현들 사이로 좀 만만해 보이는 단어가있으니, 바로 ‘평상심’이다. ‘ 평상심이도’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아, 불교가 이런 거였나? 별 거 아니네.”라고 생각했다. 중생의 보통 마음, 일상적인 마음을 뜻한다고 오해하고는, 앞으로 불교도로서 그냥 이렇게 가늘고 길게 살면 되겠구나 싶었다. 불교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나도 임제가 될 뻔하였다. 남전과 조주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평상심이 도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마조 스님이다. 『경덕전등록』권28에는 “도는 닦는 게 아니다.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물든다는 건 어떤 것인가.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마음, 뭔가를 하려는 마음, 지향점이 있는 마음, 이런 것들이다. 그 도를 딱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도이다. 즉 조작과 시비와 취사가 없는 마음이다.”라고 전한다. 이것을 그의 제자인 남전이 조주에게 재활용한 이래 선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명구가 되었다.
남전(748~834)과 조주(778~897)는『전등록』에 실린 선사들 중에 베스트 커플로 꼽힐 만한 사이다. 남전참묘(南泉斬猫)와 조주무자(趙州無字)로 유명한 바로 그분들이다. 이들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가 심상치 않다. 어려서 출가한 조주가 아직 사미였을 때, 행각을 떠나는 은사를 따라 나섰다가 남전의 처소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남전은 누워 있다가 손님을 맞았다. 은사가 남전에게 절을 하자 조주도 따라서 절을 하는데 남전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조주가 대답했다.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그래, 서상은 보았느냐?” “서상은 보지 못했사옵고 면전에 누워 계신 여래가 보입니다.”이 대답을 듣고 놀랐는지 누워 있던 남전이 일어나서 물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 있는 사미입니다.” “그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날씨가 춥습니다. 화상께서는 부디 옥체만강하소서.”남전은 이 기특한 사미에게 대단히 매력을 느꼈나 보다.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나이에, 이미 갈고 닦을 것이 없어 보이는 인간을 대면했던 것이다. 유나를 불러 별도의 처소를 내어주라고 지시한다.
다음날 아침 조주가 남전에게 문제의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다.”
“그것을 향해 가는 일이 필요한가요?”
“향해 가려는 즉시 어긋난다.”
“향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인 줄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도는 안다, 모른다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안다면 그것은 허망한 지각이요, 모른다면 그것은 멍한 상태일 뿐이다. 향해 갈 수 없는 그 도를 통달하면 허공처럼 툭 트일 것이니 거기서는 굳이 시시비비를 따질 것이 없다.”
조주는 이 말에 깨달았다. 그 뒤 숭산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와서 남전과 20년을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평상심을 허공에 비유한 것을 보면 평상심이 중생의 일상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오해하게 된 이유는, ‘평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얕은 이해에 더하여 옷 입고 밥 먹는 그 마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마음이 평상심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전이나 조주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매일같이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평등하다〔平〕는 것은 높고 낮음이 없는 마음, 즉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망상이 없는 마음이다. 항상하다〔常〕는 것은 끊어짐이 없는 마음, 즉 외부의 경계나 인연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게 본다면 평상심은 오히려 무심을 뜻한다. 그 경계를 부산법원(浮山法遠) 스님은 “평상의 도리를 통달하면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인다.”고 하였다.
옷을 입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평상심이었던 남전은, 평상이라는 말에 적합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쳤다. 얼마나 잘 가르쳤던지, 속성이 왕씨였던 남전은 ‘왕선생님〔王老師〕’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조주는 이 스승을 만나서 오랜 동안 평상심을 함께 누린다. 송대의 선사 대혜(宗????)는 남전에 대해 이런 찬사를 남겼다. “요즘 선사들은 도를 표현한다고 별의별 짓을 다 보여주는데 악취만 풍길 뿐이다. 그에 비해 조주의 저 여유를 보라. 남전은 또 어떤가. 그는 할도 방도 쓰지 않는다. 경도 논도 끌어다 대지 않는다. 깊이 있는 담론도 물론 하지 않는다. 옛 분들의 공안을 들먹이지도 않는다. 그저 평상심이 도라고 했을 뿐이다.”
이 찬사를 통해 남전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마조의 입에서 출발한 평상심은 그의 걸출한 제자 남전을 거쳐 조주에게로, 또 한편으로는 중국에 구법하러 갔던 신라의 스님들에게 전해져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는 가풍으로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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