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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주인공의 삶]
‘이 뭐꼬?’와 ‘是什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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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3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4:12  /   조회6,55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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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들은 이야기다. 실화다. 불심이 깊은 시누이와 올케가 있었는데 제방의 큰스님을 찾아다니며 법을 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같이 다니다가 나중에는 따로 다녔다고 하는 걸로 미루어 보아 도심(道心)에만 불이 붙은 것이 아니라 경쟁심에도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하루는 둘이 만나서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올케가 어느 큰스님한테 화두를 받았다고 자랑하였다. 시누이가 무슨 화두냐고 물으니 올케가 “시심마(是甚麽)”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누이가 “그래? 나는 어느 큰스님한테서 ‘이 뭐꼬’받았는데.”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듣고 한참을 웃다보니(중국말 ‘시심마’를 경상도 방언으로 번역한 것이 ‘이 뭐꼬’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화두를 받아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내가 웃을 일이 아니라고 느끼면서 그 께름칙함을 한 편에 묻어두었다.

 

얼마 전에 선사상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청을 받고 강의를 하는데 수강생 하나가 질문을 했다. ‘간화선은 인도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냐?’그리고 ‘이 뭐꼬’같은 화두는 중국의 간화선 전통에도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습격을 받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어물어물 대답을 하고 보니 ‘시심마’와 ‘이 뭐꼬’에 얽힌, 그날의 께름칙함이 다시 떠올랐다. 불경서당에서 반장을 하며 후배들 예습을 돕던 시절에 “장님이 장님을 끌고 가는구나.”하며 쯧쯧, 혀를 차고 지나가시던 스승님의 표정도 스쳐갔다.

 

강의한다고 나갔다가 망신을 당하고 집에 와서, ‘이 뭐꼬’가 정말로 중국에는 없는 화두였나 하고 대장경에서 검색을 해보니 ‘是甚麽’가 2,938개 나왔다. 이 화두가 날조된 것은 아니구나, 산술적으로 확인하고 나서도 뭔가 시원하지가 않다. 문헌상의 시작은 마조(馬祖)와 무업(無業)의 만남에서였다. 무업 선사는 경전 공부를 많이 한 분으로, 준수한 외모에 종소리 같은 음성을 가졌다고 한다. 외모와 지성을 겸비한, 아우라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처음 찾아갔을 때 마조의 눈에도 그 범상치 않은 모습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마조는 그에게 “불당(佛堂)은 훤칠하다만 그 안에 부처는 없구나.”라고 하였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좀비나 다름없다는 말을 듣고 기가 꺾였는지 무업이 절을 하고 꿇어 앉은 채 물었다. “제가 경전공부를 골고루 해서 거기 담긴 뜻은 대략이나마 알고 있습니다만, 선문에서는 늘 즉심시불(卽心是佛)을 말하는데 이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마조가 말했다. “모르는 그 마음이 바로 이것이지 다른 건 없다.” “그러면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비밀히 전한 심인(心印)이란 어떤 것입니까?” “거, 스님, 참 시끄럽네. 우선 갔다가 다음에 오거라.” 무업이 나가려는데 마조가 “스님!”하고 불렀다. 무업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가 물었다. “이 뭐꼬(是甚麽)” 무업이 여기서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절을 하자 마조가 말했다. “이런 둔한 놈을 봤나, 절은 멀라 하노?”

 

무업이 물었던 ‘즉심시불’과 ‘조사서래의’는 당시 중국 불교계를 뜨겁게 달궜던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불교를 배운다고 할 때 그 배움의 내용은 계·정·혜 3학이고 무업은 그것을 착실히 익혀서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떤 무리들이 나타나서 문자가 필요 없다니, 그때까지 불교를 제대로 배운 수많은 무업들은 평생의 공부가 헛것이 될 상황이었다. 무업의 질문은 그런 배경과 무게를 가진 것이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주장은 인도의 전통에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런 의혹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마조는 시끄럽다고 꺼지란다. 알아 듣고 절을 하는 무업에게, 절은 뭐하러 하느냐고, 끝까지 탈탈 털어주신다. 이것이 ‘시심마’가 들어 있는 에피소드의 한 예이다.

 

화두를 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심이라고 한다. 위의 이야기 중에 ‘이 뭐꼬?’라는 대목에서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또는 위 이야기와 상관없이 그냥 궁금해서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이 뭐꼬?’할 수도 있다. 이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채 계속 달라붙어 있다면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선사들은 하고 많은 심소 중에서 왜 의심을 선택했을까 궁금하다. 집중하기에 의심이 가장 적합한 심소이기 때문일까. 의처증에 걸린 남편에게는 의심이 내내 달라붙어 있지 않던가, 하고 매우 속된 예를 갖다 붙여 본다.

 

선종이 성행하기 전에 수백 년 동안 중국인들은 인도에서 받아들인 불교를 실습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이 인도 선의 전통을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충분한 실습을 거친 뒤에 연구개발 끝에 창안해낸 것이 중국의 간화선이다. 그리고 간화의 재료가 되는 이야기를 묶은 것이 선문의 족보로 여겨지는 공안집(公案集)이다. 세간의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공안집이라는 족보도 각각의 에피소드가 새롭게 생겨났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1,700가지를 누가 한 번에 지어낸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을 두고 검증을 거쳐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은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하나하나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전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이 뭐꼬’가 공안집에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의심붙이기에 좋은 문제라면 그냥 의심을 일으키면 될 일이다.

 

‘이 뭐꼬?’를 잡았든 ‘시심마’를 잡았든, 의심이 붙으면 그때부터는 아무도 못 말리는 평생의 도구를 얻은 것이다.

화두를 받은 시누이와 올케는 의정(疑情)이 한 덩이가 되었을까. 소주병을 쳐다보기만 한 사람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긴 사람들에게 괜한 궁금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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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불교학을 전공하였고, 봉선사 월운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다. <선림고경총서>편집위원을 역임했고 『승만경』, 『금강경오가해설의』, 『송고백칙』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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