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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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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4 월 [통권 제12호]  /     /  작성일20-05-29 14:25  /   조회6,93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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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할(棒喝)의 지도법 

 

부모가 자식을 훈육할 때 더러 큰 소리로 야단을 치거나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좋은 말로 된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아이를 위해서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흥미롭게도 선승이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큰소리로 야단치거나 회초리를 드는 훈육에 비유되는 지도법이 있으니 바로 방(棒)과 할(喝)이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일 뿐이며 아이를 훈육할 때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다듬고 쪼아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잘 쪼면 그릇을 만들 수 있기에 재료적 가치는 있지만 다듬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존재라고 본다. 혜능 스님은『단경』의 첫 머리에서 ‘중생의 자성이 본래 깨끗하다’고 했다. 갈고 닦아서 만들어 가야할 존재가 아니기에 선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를 바로 보는 견성(見性)이다.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견성은 말과 논리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역대 종장들은 경전을 놓고 글자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는 교육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릇은 이미 완성되어 있음으로 자성을 깨치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말끝에 바로 깨닫는 언하변오(言下便悟)를 지향했고, 선의 종장들은 저마다 독창적인 지도법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할과 방이다. 할이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러 깨우침을 얻게 하는 것이고, 방이란 몽둥이로 학인을 때려주는 것이다.

 

할과 방의 유래에 대해서는 임제 스님과 덕산 스님의 고화가 유명하다. 성철 스님은『백일법문』에서 할과 방이 유래된 사연을 설명하고 “우리도 참선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도록 노력합시다.”라며 학인들을 독려한다. 스님이 몽둥이로 학인들을 지도한 것은 아니지만 격외도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임제의 할(喝)

 

임제종의 가풍을 세운 임제(臨濟) 스님은 황벽(黃檗) 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황벽은『전심법요』와『완릉록』이라는 어록을 남긴 조사이기도 하다. 당시 황벽문하에는 목주(睦州) 스님이 수좌(首座)를 맡고 있었는데, 수행에 임하는 임제의 성실한 태도에 감탄했다. 어느 날 목주 스님은 임제가 온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승에게 법을 물어보지 못했음을 알았다. 임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목주는 황벽 스님을 찾아가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인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임제는 스승을 찾아 가 그렇게 물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 스님이 몽둥이로 다짜고짜 스무 대나 때리는 거였다. 스승에게 매를 맞고 쫓겨 나온 임제를 향해 목주 스님은 다시 찾아가 물으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황벽은 임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아무 말도 없이 몽둥이로 때릴 뿐 이었다. 그렇게 세 번이나 몽둥이로 맞은 임제는 황벽과는 법연이 닿지 않음을 느끼고 떠나기로 작정했다.

 

하직 인사를 드리기 위해 스님을 찾아가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고안(高安) 개울가에 있는 대우(大愚) 스님을 찾아가라고 했다. 대우 스님을 찾아간 임제는 세 번 법을 물었지만 그때마다 몽둥이만 맞고 쫓겨 난 사연을 토로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은 “그렇게도 간절한 노파심으로 철저히 가르쳤건만 너는 여기 와서 스승의 허물을 논하느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임제는 그 말끝에 홀연히 깨닫고는 “황벽의 불법이 별것 없구나!”라고 말했다. 대우 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어떤 도리를 알았는지 어서 말해 보라!”고 다그쳤다. 임제가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쿡쿡 쥐어박으니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임제가 그 길로 다시 황벽문하로 돌아오자 황벽 스님은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성취가 있었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대우 스님과의 문답 내용을 아뢰자 “이놈이 오면 몽둥이로 스무 대 때려 주리라.”고 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기다릴 것 없습니다. 당장 맞아 보십시오.”라고 하며 황벽 스님의 뺨을 후려치고는 쩌렁쩌렁한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 후 임제 스님은 화북(華北) 지방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학인들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런 이유로 ‘임제의 법은 우레와 같이 고함을 친다’는 평을 받았고, ‘임제할’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덕산의 방(棒)

 

황벽처럼 제자들을 지도할 때 몽둥이를 쓴 분이 또 있으니 바로 덕산(德山) 스님이다. 덕산은 본래 교리에 조예가 깊은 학승이었다. 특히 오랫동안『금강경』을 연구하여 ‘주금강(周金剛)’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속성(俗姓)이 주(周) 씨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지만 ‘금강경에 두루 정통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별칭이다.

 


 

 

불법의 핵심은 경전에 있다고 믿었던 덕산은 당시 남방에서 교세를 떨치던 선종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경전과 교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성품을 보면〔見性〕곧 성불(成佛)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산은 평생 심혈을 쏟아 연구한 소초(疏鈔)들을 짊어지고 선종을 논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떡 파는 한 노파를 만났다. 배가 고팠던 덕산은 노파에게 점심(點心)할 수 있도록 떡을 좀 달라고 했다. 그러자 노파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면 떡을 주겠다고 했다.

노파는 덕산의 바랑 속에 든 것이『금강경』주석서라는 말을 듣고는 “『금강경』에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덕산은 노파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다. 평생『금강경』을 연구하고, 교학에 관한 것이라면 달통했다고 자신했는데 떡장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허기진 배로 용담을 찾아간 덕산은 숭신 선사를 보고 “용담(龍潭)이라고 들었는데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먼요.”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숭신은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먼.”하고 인자하게 받아주었다. 그 말에 덕산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덕산은 숭신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문을 나서는데 밖이 너무 어두웠다. 그때 숭신 스님이 촛불을 밝혀 건네주었다. 덕산이 그 촛불을 받으려는 찰나에 숭신은 훅 불어서 꺼버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덕산은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날 덕산은 자신이 평생 집필한『금강경소초』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후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방안을 뒤져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살라버리곤 했다.

 

이 후 덕산은 후학들을 지도할 때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몽둥이〔棒〕로 때리는 방법을 썼다. 그래서 ‘덕산이 법 쓰는 것은 비 오듯 몽둥이로 때린다’는 평을 받았고, ‘덕산방’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새가 알을 쪼듯이

 

덕산은 몽둥이질로 무엇을 일깨웠으며, 그것이 신체적 고통을 줄 만큼 아프게 때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임제도 고함으로 어떤 가르침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은 학인들을 일깨우고 자성을 보게 하는 조사선의 지도법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방과 같은 과격한 지도법은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전등록』을 살펴보면 실제로 몽둥이로 때리는 대신 “너는 방 20대”와 같이 상징적 경책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법상에 오른 방장이 주장자로 법상을 쿵쿵 내려친 뒤에 게송을 읊고 큰 소리로 할을 토하는 형식으로만 남아 있다. 교외별전의 소식을 전하는 지도법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대중들은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근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 못 알아듣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의 근기를 따라서 지도해야지 지도법에 사람을 맞출 수는 없다. 근기가 달라졌다면 지도법도 달라져야 하는 것이 순리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치열한 문답이 오가면서 제자의 의식이 고양되고, 적확한 때를 알아서 사용하는 할과 방에는 긴장감이 살아 있다. 그것은 마치 장전된 총알을 격발하는 것처럼 폭발적인 인식의 각성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주장자를 내리치고, 천둥 같은 할을 한들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한 소식 깨닫고, 진여(眞如)에 계합하는 학인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특히 일반 신도들에게는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이 느껴질 뿐이다.

 

줄탁동시(口卒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알이 다 부화되어 새끼가 밖으로 나오려고 안에서 껍질을 톡톡 쪼는 그 순간에 어미가 밖에서 한 번 탁 쪼아주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과정을 통해 제자의 의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에 가장 절정의 순간에 할과 방이 가해진다면 무명의 껍데기를 깨고 지혜의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된 할과 방은 비록 조사문중의 전통이라고 할지라도 형식적 의례일 뿐이다. 전통을 계승하되 현재 상황에 맞는 지도방법이 요구되는 것은 선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깨우침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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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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