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대기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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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4 년 4 월 [통권 제12호] / / 작성일20-05-29 14:27 / 조회6,294회 / 댓글0건본문
안 하자니 게으르고, 하자니 괴롭다. 어찌 남만을 두려워 하랴? 나도 내가 두렵다.
대기만성(大器晩成). 이 한 마디 말이 수많은 용렬한 선비를 죽였다고 옛사람이 말했다. 그 말이 참으로 맞다.
(‘청언소품20칙’, 『고전산문산책』, 안대회, 휴머니스트, 2008. 326쪽.)
조선 후기의 시들시들한 젊은이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쓴 일기다. 입신양명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책 읽고 일기 쓰며 살다가 서른넷에 죽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저 글을 남기고.
대기만성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있다. 기어코 되어야겠다는 강박도 숨어 있다. 되지 못한 사람의 슬픔도 묻어 있다. 그래서 유만주도 대기만성이 수많은 선비를 죽였다는 옛사람의 말에 동감을 표했을 것이다. 대기만성 스트레스는 공부를 업으로 하는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늦게라도 학교에 자리를 잡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늦을수록 그런 행운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많은 수의 고학력자들이 저임금에 여기 저기 품을 팔며 고단하게 산다. 그조차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이들 중에 아주 가끔, 슬픔과 분노 속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한다. 늦게라도 무엇인가를 남겨야 사람들이 그가 ‘대기’였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선종의 역사책에도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선사들도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 예컨대 깨달아서 도인이 되겠다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듯하다. 선종에서 대기만성은 사람의 틀, 근기, 향상을 멈추지 않는 공부인의 자세를 두고 붙이는 찬사다. 나이 80에 행각을 나선 강철 멘탈의 소유자 조주(趙州), 40년 동안 고른 마음을 유지했던 향림(香林), 20년 앉아있는 동안 좌복 7개를 떨어뜨렸다는 장경(章敬) 등에게 이 말이 꼭 따라 붙는다. 후대 선지식들도 법문을 할라치면 이분들의 예를 들면서, ‘너거들은 머했노?’하는 식으로 제자들을 다그치는 데 써먹는 단어가 대기만성이다. 20년, 40년의 뚝심. 다그친다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닐 텐데도.
장경이 영운(靈雲)을 찾아가 불법의 대의를 물었더니 영운이 “나귀의 일이 가지도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다가오는구나〔驢事未去馬事到來〕”라고 대답했다. 장경은 알쏭달쏭한 이 말을 붙들고 해결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는 20년을 보냈다. 얼마나 독하게 앉아 있었으면 방석이 일곱 개나 해졌겠는가. ‘나귀의 일, 말의일…’은, 그냥 늘 만나게 되는 일, 내게 닥쳐오는 일을 뜻한다. 계속해서 정신없이 밀려오는 일, 이를테면 ○○카드 갚고 나니 ☆☆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은 모르겠다. 그걸 안다면 내가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지 않을 테니….
장경은 20년을 분투하던 어느 날, 드리워 있던 발을 걷어 올리는 순간 활짝 깨닫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르구나, 참 달라.
발을 걷고 천하를 보니.
누군가 내게 무슨 종지를 알았느냐 묻는다면
들고 있던 파리채로 입을 한 대 쳐주리라.
이렇게 다른 세상을 본 그는 방석 일곱 개, 대기만성의 전설로 전등사에 자신을 영구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옛사람의 말대로, 깨달음을 구하는 젊은 납자들을 많이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등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장경 스님보다 더 많은 세월 동안 방석을 떨어뜨렸을 무수한 무명의 수좌들을 기억하자. 되든 안 되든 후회 없는 삶을 누렸을 그분들의 공덕 또한 무량하다.
다시 조선의 젊은이 유만주의 일기로 돌아가 보자.
옛날 어떤 사람이 호숫가에 살았는데 몹시 가난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대는 한 이랑의 밭도 없으니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으리요?”라고 물었다. 그의 대꾸는 이랬다. “내게는 호수 삼만 이랑이 있지요. 그걸로 내 마음을 맑게 하기에 괴로움이 있을 수없지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반문했다. “호수가 그래 그대의 소유물인가요?”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려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나요?”이 말이 너무도 시원하여 속됨을 벗어났다.
이런 멘탈이라면 그릇이 크든 작든,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상관없이 살았을 것 같다. 밑 빠진 독이면 또 어떠랴. 공무원 시험에 인생의 목표를 거는 요즘의 젊은이들이 잉여의 선조격인 이
분의 글을 보고 우울과 강박을 잠시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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