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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 아니었으면 이 물건이 어떻게 됐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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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6 월 [통권 제14호]  /     /  작성일20-05-29 14:29  /   조회7,08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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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이(보덕화·普德華) 보살님 

 

 


 

 

 5월, 불자들에겐 가장 기분 좋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 남녀노소 모두에게 좋은 날이 많긴 하지만 역시 부처님오신날이 있어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시기가 바로 5월이다. 거리 곳곳에 내걸린 연등을 보며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신심(信心)을 다시 한 번 다지는 때이기도 하다. 5월의 기운이 일 년 내내 계속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고경」이 진행한 성철 스님 상좌스님들의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자료를 뒤적이다 우연히 화두가 적힌 사진을 보게 됐다.

“問: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答: 삼서근(麻三斤)이니라.”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사진 파일명은 ‘보덕화 보살 화두’였다. 보덕화 보살이 누구인지, 화두를 준 스님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두 번째 질문은 쉽게 풀렸다. 성철 스님이 보덕화 보살님에게 준 화두였다.

 

첫 번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보덕화 보살님은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고 있었다. 백련암을 고리로 ‘모녀(母女) 인연’을 맺은 여여심 보살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사실 보덕화 보살님과의 인터뷰는 몇 차례 연기된 뒤 성사됐다. 올해 98세이다 보니 약속을 잡았다가도 건강 상황에 따라 부득이하게 미뤄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도 백련암의 ‘맏언니’라고 할 수 있는 보살님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고 흥미로웠다.

 

보살님의 첫인상은 ‘곱다’는 것이었다. 세월의 흔적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보살님은 고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정했다.

 

화두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 “백련암에서 삼천배를 하고 큰스님께 받았다. 나중에 죽을 때 내 관에 넣어달라고 했는데, 이것도 자료가 되겠다 싶어 여여심 보살을 통해 백련불교문화재단에

드렸다.”고 한다.

 

근황이 궁금하다고 하자 “별거있냐?”며 웃는다. “책도 보고 집안일도 좀 하고 그럽니다. 밥도 지어 먹어야 하고 밥을 안 먹으면 빵이라도 구워 먹습니다. 또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 받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갑니다.”

 

보덕화 보살님은 안방에 성철 스님 진영을 모셔놓고 지금도 매일 오전 10시 30분에 참배를 한다. “나이가 들어 108배는 못하니 그저 향을 사르고 큰스님의 육성이 담긴 ‘전경(轉經)’을 듣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입니다.”

 

자연스럽게 기억을 60년 전으로 되돌렸다. 보살님의 ‘증언’이 다시 역사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던 ‘도인’

 

“저에게는 언니가 있습니다. 백련화(白蓮華) 보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신심(信心) 있는 불자였습니다. 젊은 시절 백련화 보살은 성철 큰스님 만나기를 서원(誓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댁 동서가 큰스님께서 통영 천제굴에 계시다며 같이 가자고 해 처음 뵈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지근거리에서 큰스님을 모셨습니다. 언니가 저와 동생 대법화(大法華) 보살을 이끌어줘 세 자매가 함께 큰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매일 오전 성철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은 보살님의 중요한 일과다 

 

제가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제 나이 39살, 부산에 살 때였습니다. 거의 60년 전이네요. 그때가 아마 일요일이었습니다. 애들 밥도 해주고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데 백련화 보살이 저한테 성철 큰스님이 부산에 오셨다며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고 했습니다. 전부터 큰스님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어 궁금하긴 했는데 집안 일 때문에 잠시 고민을 했어요. 그래도 좋은 기회다 싶어 언니를 따라 갔습니다.”

 

보덕화 보살님은 오래전부터 언니 백련화 보살님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성철 스님은 도인”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덕화 보살님은 성철 스님을 “신선같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부산의 병원에 왔다가 한 신도 집에 잠깐 머물고 있었다.

“지금의 부산시청 근처 어디였던 것 같아요. 2층짜리 주택이었습니다. 언니를 따라 큰스님이 계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큰방 안쪽에 계신지 다른 신도님들이 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방 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문 앞에 다가서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얼굴의 바짝 마른 스님이 앉아 계셨어요. 성철 큰스님이셨죠. 처음 생각하던 신선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하… 큰스님을 뵙고 많이 놀랐는데 그것을 진정시킬 시간도 없이 백련화 보살이 제 옷을 잡아당기며 절을 하라고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우리 둘의 모습을 보시더니 ‘괜찮다. 앉아라’그러셨습니다. 엉겁결에 절을 하긴 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보덕화 보살님에게 내려준 화두 

 

그렇게 보덕화 보살님은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났다. 그 후 보덕화 보살님은 얼마간 성철 스님을 친견하지 못했다. “아이들 공부시킨다고 바빠지면서 한 동안은 뵙지를 못했다.”고 한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성전암 시절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성철 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 주석하고 있을 때 다시 인연이 찾아왔다. 성철 스님은 1955년부터 성전암에서 정진했다. 통영 천제굴에 있던 스님은 조계종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해인사 주지로 임명하자 그에 응하지 않고 성전암으로 갔다. 이곳에서 스님은 성전암 주변에 울타리와 철조망을 둘러 스스로를 외부 세계와 단절시켰다. “세상을 가두니 나 스스로는 자유로웠다.”고 했던 시기다. 스님의 서슬퍼런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스님은 이 기간 동안 불교의 교리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 당시 세계불교학계를 이끌고 있던 일본 유명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한문 대장경과 조사어록들을 두루 섭렵했고 불교 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물리학, 열역학, 위상기하학, 수학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성철 스님은 설이나 추석, 안거 결제나 해제를 전후한 시기에 신도들이 날짜를 정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 해인사 백련암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비라기도’의 시초인 셈이다. 다만 큰절인 파계사에 폐가 되지 않도록 대구지역 신도들은 그 기간에 일절 만나지 않았고 부산이나 창원 등 비교적 먼 지역의 신도를 만났는데, 그 숫자도 소수에 불과했다. 보덕화 보살님 역시 이 시기를 이용해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이때도 백련화 보살님과 함께였다.

 

“언니 백련화 보살한테서 큰스님께서 성전암에 계신다는 얘기는 들었었습니다. 그러다 안거 결제와 해제를 전후한 시기에 몇몇 신도들이 성전암에서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를 따라서 올라갔습니다. 지금은 성전암 가는 길이 많이 넓어져 다니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만 그때만 해도 파계사를 넘어 산등성이를 타고 성전암에 가야 해서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보덕화 보살님이 42살 때였다고 한다. 그때 보살님은 성전암에서 처음으로 108배를 했다.

“108배를 하고 다리가 너무 아파 거꾸로 기어서 돌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저 아래서 큰스님과 백련화 보살이 저를 보고 막 웃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에는 108배는 물론 3000배도 잘하게 됐습니다만. 하하.”

 

보덕화 보살님은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에게 법명(法名)을 바꾸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30대 초반에 자운 스님에게서 받은 ‘보덕화’법명보다 성철 스님이 내려 준 법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듣게 된 성철 스님은 ‘보덕화’법명을 그대로 쓰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스님과 자운 큰스님이 엄청 가까운 도반이셨습니다. 도반이 지어 준 법명이어서인지 좋다고 계속 쓰라고 하셨습니다.”

 


동생 대법화 보살님과 함께 한 보덕화 보살님 

 

보덕화 보살님은 성전암에 다니면서 기억나는 일이 몇 가지 있다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첫 번째, 정해진 날이 아니면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성전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성철 스님이 성전암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구, 비구니스님은 물론 전국에서 신도들이 찾아왔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문 밖에 서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다 돌아간 스님이 부지기수였다.

 

두 번째, 평생 성철 스님이 보였던 절약 습관은 성전암에서부터 이미 철저했다. 당시 성전암에서 기도를 하면 동참한 신도들이 각자 소임을 맡아 공양이나 청소를 했다. 한번은 보살님들이 밥을 하고 있는데 쌀이 떠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성철 스님이 보게 됐다. 이를 본 스님은 호통을 치며 쌀을 달라고 했다. 스님의 성정을 아는 신도들이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먹겠습니다.”라고 해도 성철 스님은 “내 손에 올려라.”하며 그 자리에서 쌀을 먹었다고 한다. 그 일 이후 쌀 한 톨도 허투루 쓰는 일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세 번째, 성철 스님은 성전암에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에게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은 절대 땅에 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도들은 공양물을 가지고 성전암에 올라갈 때 잠시 쉬면서도 공양물을 땅에 놓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쉬었다고 한다. 정말 신심(信心)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네 번째는 ‘돈’이었다. 성철 스님은 당신 앞에서 절대 돈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평생 돈을 워낙 멀리했기 때문에 신도들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전암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았던 신도들은 할 수 없이 성철 스님 몰래 시봉하는 스님들에게 시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섯 번째는 해우소 풍경. 워낙 깊은 산중의 암자이다 보니 해우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찰생활이 쉽지 않았다. 보덕화 보살님은 그 중에서도 해우소에 가서 깜짝 놀랐다. 해우소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마른 풀잎이 소쿠리에 한가득 있었다고 한다. ‘일’을 보고 그 잎으로 뒤처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른 잎으로 일을 마치고 나왔고 그 후로는 성전암에 갈 때 휴지를 꼭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처음 갔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까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큰스님은 물론이고 큰스님을 시봉하던 천제 스님, 만수 스님 등이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1970년대 초반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모시고 자리를 같이 한 보덕화 보살님의 가족들.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보덕화 보살님이다 

 

보덕화 보살님은 “기도할 때가 돼 신도들이 성전암에 오면 큰스님께서는 큰방에 있던 천제 스님, 만수 스님에게 ‘주인왔다. 나가 보라’고 했다.”며 “큰스님께서는 절의 주인은 신도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전하기도 했다.

 

‘인과의 법칙’을 깨우쳐 준 큰스님

 

보덕화 보살님은 성철 스님이 성전암에서 나와 김룡사를 거쳐 백련암에 주석할 때도 가르침을 계속 받았다. 그러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보덕화 보살님은 백련화 보살님, 대법화 보살님을 비롯한 여러 신도들과 힘을 모아 하남 정심사 건립불사를 시작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큰스님께서 서울에 오시면 마땅히 계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련화 보살을 비롯한 여러 신도들이 공기 좋은 곳에 작은 토굴이라도 하나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큰스님께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전에도 여러 신도님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그 인연으로 저와 백련화 보살, 대법화 보살, 원오행 보살, 진각화 보살, 이이석 거사 등이 힘을 모아 지금의 정심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보덕화 보살님은 본격적으로 수행과 기도를 하면서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에는 자신의 기도와 수행은 물론 가족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담겼다고 한다. 특히 성철 스님과 백련암에 대한 내용도 많이 있었지만 몇 번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소각해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일기에는 제가 평소에 꿈꾸던 것이나 제가 생각했던 것과 실제 생활이 다른 것들을 어떻게 풀지에 대해 많이 적었습니다. 뚜렷한 해결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기를 쓰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 말씀이나 가르침도 나름대로 열심히 적어 두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하. 또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일기에 많이 털어놨습니다. 기록들이 다 없어져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보덕화 보살님에게 ‘삼서근’화두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공부가 어떠한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보살님은 “처음에는 열심히 해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지금은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다.”며 웃었다.

 

성철 스님에게 받은 가르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인과(因果)의 도리를 알게 해준 것”이라고 답했다.

“큰스님께서는 모든 일은 과거에 자기가 저질렀기 때문에 나중에 꼭 다시 받게 된다고 하셨어요. 내가 예전에 누군가를 괴롭혔기 때문에 다시 나에게 그 괴로움이 오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인과(因果)만큼 명확한 것이 없어요. 인과를 생각하면 모든 생활이 부드러워집니다. 화도 안 납니다. 겁나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성철 스님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무섭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아주 자상한 분이셨다. 또 ‘아닌 것은 아닌 분’이었다. 아주 똑 바르게만 가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큰스님 아니었으면 이 물건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며 정신을 바로 차리고 사는 것은 큰스님의 바른 지도 덕분이라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인터뷰가 길어졌지만 백수를 앞둔 노(老)보살님의 표정은 여전히 즐거웠다. 마무리를 하겠다고 하자 보덕화 보살님은 “‘부처님께 절 많이 해라’, ‘남 모르게 남을 도와라’, ‘한 달에 한 번씩 방생을 하며 살라’고 하시던 말씀과 큰스님의 큰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빛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으면 좋겠다.”며 작은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보덕화 보살님을 하남 정심사에서 다시 만났다. 대법화 보살님, 원오행 보살님, 진각행 보살님을 비롯한 정심사의 ‘원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침 보름법회가 있는 날이어서인지 절은 신도들로 붐볐다. 법회가 끝나고 보덕화 보살님이 절에 왔다는 얘기에 신도들은 앞 다투어 보살님과 인사를 나눴다. 성철 스님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도반들이 함께 웃으며 즐기는 모습이 5월 봄햇살처럼 따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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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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