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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중도사상의 독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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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6 월 [통권 제14호]  /     /  작성일20-05-29 14:31  /   조회5,45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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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근본은 같은가? 

 

우리는 모든 종교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의 현상은 각기 다르지만 근본은 같다는 것이다. 신학자 레이몬드 파니카의 무지개론은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무지개는 7가지 색을 띠고 있지만 그 실체는 백색 광명이듯이 각 종교의 현상적 모습 이면에 있는 궁극적 실재는 같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말하고, 유한한 현실을 넘어 피안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을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불교사상의 핵심은 중도(中道)라고 했다. 중도사상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는 물론이고 중국의 종파불교를 관통하는 핵심사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나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중도에 해당하는 가르침이 있다면 파니카의 주장이 옳다. 하지만 중도사상이 불교에만 있다면 모든 종교의 근본은 동일하다는 주장은 불교라는 예외를 만나게 된다.

 


불교사상의 핵심이 중도에 있음 강조했던 성철 스님 

 

성철 스님은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예수교나 혹은 헤겔철학이나 칸트철학과 같지 않느냐고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파니카는 종교의 현상적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이 같다고 본 반면, 성철 스님은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근본을 파고들면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사상의 핵심인 중도사상이 다른 종교에는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두 가지 사상전통

 

어떤 학문이나 이론이든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학설일지라도 이미 존재했던 학설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계승하여 좀 더 발전시키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새로운 사상이라도 그것을 잉태한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역시 인도라는 종교적 풍토와 그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사상의 핵심인 중도사상 또한 인도사상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한 것일 뿐 불교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중도사상은 불교 이전에도 없었고, 당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독창적 사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부처님 당시까지 인도의 사상계는 바라문사상과 그것에 반대해 일어난 혁신사문들의 사상으로 양분된다. 인도의 정통사상인 바라문교에서는 존재와 우주의 생성에 대해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했다. 태초에 유일자인 브라흐마(Brahma)가 있었고, 이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전변하여 우주와 만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세계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범아일여(梵我一如)가 강조되었고, 이를 위해 선정에 몰두하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지향했다.

 

반면 육사외도로 대변되는 혁신사문들은 존재의 생성에 대해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했다. 일체 만물은 여러 요소들의 결합과 집적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브라마니즘과 같이 유일무이한 어떤 근원적 실재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는 전변설을 부인했다. 하지만 적취설은 창조주라는 유일신은 인정하지 않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에 빠지기 쉬운 한계를 갖고 있었다. 적취설은 물질과 정신을 이원적으로 보고, 정신은 육체의 욕망에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육체가 가진 욕망으로부터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고행주의를 선택했다.

 

붓다의 종교적 체험과 중도

 

전변설은 모든 존재를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찾는 유신론적(唯神論的) 전통이었던 반면 적취설은 모든 것을 물질적 현상으로 보는 유물론적 가치관에 기반을 둬 있다. 붓다는 몸소 이 두 가지 사상전통을 두루 섭렵하며 그 한계를 넘어섰다.

 

먼저 찾아간 것이 전통사상이었던 브라마니즘이었다. 선정주의를 지향하는 아라라와 웃다카 선인을 찾아가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선정을 닦았다. 붓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선정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궁극적 해탈이 아님을 깨닫고 수정주의를 버렸다.

 

다음으로 적취설을 주장하는 고행주의자들을 찾아갔다. 고행주의의 전통은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추구했기에 온갖 고행이 행해졌다. 붓다 역시 이들의 전통을 따라 6년에 걸쳐 극심한 고행을 했다. 갈비뼈는 앙상하게 드러나고,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해골 같은 몰골이 될 때까지 고행을 했다. 하지만 붓다는 고행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깨닫고 고행도 버렸다. 그리고 강가에 내려가 목욕하고 수자타에게 공양을 받으신 뒤 보리수 아래에 평온하게 앉아서 마침내 정각을 이루었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당시 인도사상의 양대 조류였던 전변설도 아니고 적취설도 아니었다.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로 대변되는 두 가지 수행을 다 버리고 중도의 길을 통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존재는 마치 갈대묶음처럼 서로 의지하여 성립되고,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변설과 적취설에 대비되는 불교만의 독창적 가르침인 연기설이다.

 

성철 스님은 붓다 이전의 인도사상은 중도를 몰랐다고 보았다. 오직 붓다만이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달아 중도사상을 설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에 기반을 둔 중도사상은 인도의 전통적 사상을 계승한 것도 아니며, 당대의 전통이던 혁신사문들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연기설을 기반으로 한중도사상은 오직 붓다에 의해서 설파된 독창적 사상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입장이다.

 

중도와 중용의 차이

 

그렇다면 인도 말고 중국이나 서양에는 중도설에 비교될 수 있는 사상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비교되는 것이 유교의 중용(中庸)이다. 자사(子思)는 중용에 대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노애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중용은 중도와 같은 가르침이라고 설명하지만 성철 스님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깊이가 같은 사상은 아니라고 보았다.

 

주자(朱子)는 “중(中)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것이고, 용(庸)은 변하지 않는 일상생활”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용은 ‘지나침’과 ‘부족함’그리고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나타낸다. 중도사상 또한 이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붓다가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극단적 수행법을 버린 것이나, 거문고의 줄이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소나의 거문고 비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중도는 ‘치우침, 부족함, 넘침이 없는 적당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는 수치적 중립이나 계량적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도는 진제와 속제, 부처와 중생, 나와 남으로 나타나는 두 극단을 철저히 부정하는 동시에 두 극단을 철저히 드러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쌍차쌍조(雙遮雙照) 또는 쌍민쌍존(雙泯雙存)으로 표현되는 중도의 특징이다. 나와 남을 철저히 막아서〔雙遮〕둘 다 완전히 부정하는 동시에 나와 남을 모두 비추어〔雙照〕둘 다 철저하게 긍정하는 것이 중도이다. 이와 같은 중도사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창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도가 이렇게 독창적 사상이라면 중도는 다른 종교나 사상과 타협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고립적인 가르침일까? 만약 중도를 모르면 유교는 유교, 불교는 불교, 철학은 철학 등 차별과 경계가 분명해진다. 하지만 중도를 바로 알면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一切法皆是佛法〕”임을 깨닫게 된다. 중도는 나와 남을 함께 부정하는 쌍차(雙遮)이므로 중도에 입각해 보면 다른 종교와 불교라는 개념적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나와 남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쌍조(雙照)이므로 중도에 입각해 보면 불교와 다른 종교 모두가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철저히 중도에 입각해 보면 불교라는 틀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불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일체만법을 통해서 불교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중도를 바로 알고자 한다면 부처나 마구니, 불교와 타종교라는 인식을 함께 버려야 한다. 나와 남이 있다면 이미 양변에 사로잡혀 있는 변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바세계는 끝없이 극단을 지향하며, 모순과 상극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고 끝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을 넘어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중도의 자각이다. 따라서 중도가 최고의 가르침이며, 중도는 불교에만 있다는 독창성이 독단적 사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자기중심적 울타리를 해체하고 전체성을 자각하고 조화와 공존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중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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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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