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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극단을 떠나 중도를 보는 것이 정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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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10 월 [통권 제18호]  /     /  작성일20-05-29 14:37  /   조회5,13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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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견, 세상을 지배하는 이분법적 사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아직도 상처받은 유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있다. 참상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물론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은 입장 차이로 표류하고 있다. 더구나 어린 생명들의 희생에 대한 추모와 가족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위로 대신 그들을 조롱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 앞에서 피자파티를 벌이는 소위 폭식투쟁까지 벌어졌다. 우리사회가 어쩌다 타인의 고통 앞에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고 유족들의 상처가 덧나는 것은 정치권의 리더십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사안마다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 못 할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태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각자가 속한 진영논리에 따라 해석하고 반목해 왔다. 보듬고 치유해야할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진영논리로 바라보는 순간 그들은 철저하게 타자화 되고, 안타까운 사연은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는 현상을 보면 이념, 젠더, 종교, 계급, 지역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피해자와 가해자, 사업주와 노동자 등으로 양분된 이분법적 세계관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세상의 모든 대립과 갈등의 뿌리는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그 두 가지가 근본”이라고 했다. ‘유(有)’와 ‘무(無)’라는 이분법적 사유가 모든 대립적 사유를 대변하는 분열의 뿌리라는 것이다.

 

유무로 대변되는 대립적 사유는 나와 남, 진보와 보수처럼 자기와 타자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세상을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그 두 진영 중 어느 한 편으로 편입되어 자신의 견해를 행동으로 옮기며 대립을 공고화한다. 이처럼 세상을 양변으로 구분 짓고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쳐가는 견해를 불교에서는 ‘변견(邊見)’이라고 부른다. ‘변(邊)’이란 ‘끝’, ‘가장자리’라는 뜻이므로 중간과 절충이 없는 극단적 견해와 대립적 사유를 말한다. 변견은 전체적 관점에서 보고,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치우친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편견(偏見)’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 대해 성철 스님은 “유와 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상대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답했다. 남성과 여성, 남과 북,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등 다양한 모습으로 대립양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 그 뿌리는 이분법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 시선을 고쳐야만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분열과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량분별, 변견을 만드는 원인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와 같이 차별의 코드를 만들어내고, 어느 한쪽에 광적으로 매달리며, 나와 남이라는 협소한 경계를 고집할까? 그 이유에 대해 『백일법문』은 “이리저리 헤아리고 이것저것 구별하는 사량분별(思量分別)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사량분별은 나와 남을 구분 짓고, 타자와 구별된 자아(自我)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내 것〔我所〕에 집착하게 만든다. 사량분별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변견을 만들어냄으로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대립과 갈등의 양상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가전연경』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그와 같은 두 가지 극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즉, “일체는 있다〔有〕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의 극단이다. 일체는 없다〔無〕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의 극단이다.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에 의해서 법을 설하느니라.”

 


 

 

사량분별은 있음과 없음, 나와 남이라는 대립적인 사유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마음에 그려진 그와 같은 차별을 따라 현실의 다양성을 두 진영으로 단순화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현실은 왜곡되고, 나는 협소한 인식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문제는 변견으로 인해 나 하나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유를 사회적으로는 확산하고, 내면에서 비롯된 고통을 보편화한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진영화가 바로 그 결과들이다.

 

그래서 경전은 “여래는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했다. 사량분별에 의해 만들어진 나다 남이다, 보수다 진보다는 이분법적 사유를 해체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다. 중도는 내면에 존재하는 선입견과 사유의 프리즘으로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다. 성철 스님은 이를 “집착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사로잡히거나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중도는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 마음〔無分別心〕’이며, 그렇게 분별된 협소한 인식에 ‘머무름이 없는 마음〔無住心〕’이다.

 

이처럼 무주심은 나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이고, 너라는 차별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선입견에 머물지 않는 마음이며, 인식의 갈래를 따라 구획되지 않는 하나의 마음(一心)이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낸다〔應無所住而生其心〕’라고 설했다. 분별심으로 대립 갈등하는 마음이 사라진 마음이 무주심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너라는 경계가 소멸된 이 경지를 선에서는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무심의 경지는 어떤 사물을 대하든 자기중심적으로 취하지 않고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며, 차별과 변견에서 벗어난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무심은 차별에 물들고, 나와 남이라는 생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마음이므로 그것이 곧 깨끗한 마음이다. 성철 스님은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마음이 청정한 것〔心淸淨〕이고 진공(眞空)”이라고 했다. 분별심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보는 것이 맑고 깨끗한 마음이며, 지혜로 밝게 빛나는 마음〔心光明〕이다.

 

정견, 중도를 바로 보는 눈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사유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해탈과 평화는 물론 이분법적 사유 속에서 분열되고 갈등하는 세상을 치유하는 첫출발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사량분별에 의해 초래된 분별심을 내려놓고, 그 분별심으로 분리된 ‘나’와 ‘나의 견해’, ‘나의소유’에 대한 집착을해체해야 한다. 『가전연경』에서는 그런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거룩한 제자들은 이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我我所〕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나온다. 가전연아, 이와 같음이 정견이니라.”

 

중생의 눈은 분별심의 눈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나는 또 다른 진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이며, 대립하고 투쟁하는 존재이다. 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눈으로 바라본다. 괴로움이 발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한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집착은 사라지고, 자기중심적 분별심에서 발생하는 논란과 분쟁은 가라앉는다. 여기서 삶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서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도 생겨난다.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인식의 굴레에 속박당하지 않고 사실대로 보는 것이 곧 지혜이고 정견이기 때문이다.

 

정견은 삼법인 사성제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왜곡되게 보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깊게 바라보면 그것은 내 속에 존재하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세상을 왜곡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분별과 극단에 미혹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바른 지혜가 생겨나는데 그런 안목이 바로 정견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내용을 종합하면 정견이란 두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로 세상을 보지 않고 중도에 입각해서 보는 것이다. 중도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라는 분별심을 버려야 하고, 그와 같은 인식에서 비롯되는 편견과 고집을 버려야 한다.

 

둘째, 고가 발생하면 발생한다고 보고, 고가 소멸하면 소멸한다고 보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 선입견에 의해 해석된 현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하는 것이 정견이다. 분별심으로 보는 것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정견이란 나의 왜곡된 인식이 투영되기 전의 존재 그 자체를 보는 눈이다. 그런 눈을 가질 때 대립은 해소되고, 공존의 지평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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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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