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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5 - 막스 뮐러와 난조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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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5 월 [통권 제85호]  /     /  작성일20-06-01 17:08  /   조회6,17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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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일본 근대기의 불교는 불교가 사회에 도움되는 중요한 종교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다. 근대 초기 불어 닥친 ‘폐불훼석’이라는 탄압은 불교계에 큰 상처를 입혔지만, 자력으로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했다. 제종동덕회맹의 결성을 비롯 대교원의 설립요청 및 탈퇴운동 등의 노력을 통해 불교계는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유학생 파견

노력의 결과 갓 설립된 도쿄대학에 불교강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고, 불교강좌는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후 오랫동안 불교학을 대표하는 학문영역으로 존속하게 된다. 도쿄 대학의 인도철학 연구는 불교학의 위상을 높이고 학문적 개척이 이루어지는, 근대불교학의 실질적인 출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근대불교학의 역할로 일본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서구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배야排耶라고 일컬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종교의 유입을 차단하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이지만 더불어 불교정신을 새롭게 자각하는 기회도 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 초기 불교의 전개 내지 근대불교학의 출발은 불교의 가치를 일본 내에 각인시키려는 노력의 과정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력의 과정에서 실제 불교학의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통적인 한문경전에 의거한 불교의 정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적 토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불교학적 방법론, 즉 산스크리트어나 · 팔리어 · 티베트어 등 불교 원전어를 통한 문헌 고찰 방법론을 도입해 기존의 한문불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서구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계기로 서양에 유학하는 불교인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근대 초기 서양으로 유학한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여기에는 종단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서구사회에 눈을 돌려 서구문물을 이해하고자 시찰단을 보낸 종단이 생겨났고, 이들 종단들은 시찰단의 귀국 이후 서구로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서구의 문물과 종교적인 사정을 알기 위해 근대기 일본 불교계에서 최초로 시찰단을 파견한 곳은 정토진종 본원사파(서본원사파)로, 1872년 1월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아카마츠 렌죠赤松連城 등이 유럽으로 시찰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진종대곡파(동본원사파)에서 겐뇨 법사現如法嗣, 이시카와 슌타이石川舜台 등이 서구로 출발하여 시찰을 마치고 1873년 7월 귀국한다. 이들 양 종단은 해외시찰로부터 귀국한 이후 종단의 개혁에 착수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본원사파가 설립하는 교사교교敎師敎校와 육영교교育英敎校라 할 수 있다. 1875년 12월 새롭게 출발한 교사교교는 종단에서 건립한 학교의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이며, 육영교교는 종단의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이렇게 각각의 종단들은 종정宗政을 새롭게 개혁하는 가운데 서구에 종단의 인재를 유학시켰다. 

 


막스 뮐러

 

한편 서본원사에서는 1875년에 이마다테 토스이今立吐醉를 미국에, 1881년 기타바타케 도류北畠道龍를 구미에, 1882년에는 후지에다 타쿠츠藤枝澤通와 후지시마 료온藤島了穩을 프랑스로, 스가 료호管了法를 영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동본원사에서는 1876년 난조분유(南條文雄, 사진 1)와 가사하라 켄쥬笠原硏壽를 영국에 파견하였다. 근대 초기 이들 정토진종의 양兩 본원사는 경쟁적으로 서구의 시찰 및 유학생 등의 파견을 실행에 옮겼고, 이러한 노력들은 불교계의 위상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 다른 종단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 종단에서 파견한 유학승 가운데 일본에 돌아와 최초로 도쿄대학에서 범어를 가르치며 불교계 위상 증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1927 이하 난조로 표기)이다. 

 

난조는 1849년 현재의 기후현岐阜縣에 해당하는 미노美濃의 오가키大垣에 있는 진종대곡파의 절에서 태어났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던 1868년에는 대곡파의 교육기관인 고창학료高倉學寮에 입학하여 우수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우수한 능력으로 인해 당시 유명한 종학자 난조신코南條神興의 양자養子가 되어 양부養父와 함께 각지에서 강설과 설법을 하였다. 1872년 5월 대곡파의 본산 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여기에서 후에 영국으로 함께 유학한 가사하라 켄주도 만나게 된다. 1873년 7월 그 전년 서구로 시찰을 떠난 겐뇨 법사 일행이 귀국하여 종단의 새로운 개혁을 이루고 그것의 구체적인 결실로서 1875년 12월 교사교교와 육영교교가 설립되었다. 1876년 6월 난조와 가사하라는 종단의 명으로 영국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영국에 도착하여 영어를 배운 뒤 1879년 2월 당시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 인도학, 범문학, 종교학 등에 있어 서구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던 막스 뮐러(Max Müller, 1828-1900, 사진 2)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난조가 막스 뮐러 교수의 제자가 된 1879년경 서구에서는 새로운 학문으로서 인도학 및 불교학이 영국을 비롯해 유럽전역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막스 뮐러 교수를 비롯해 팔리어 학자로 팔리불전협회를 설립한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 등이 활약하고 있었고, 독일에서는 인도의 자이교를 중심으로 산스크리트학 연구를 진행한 에른스트 로이만Ernst Leumann, 인도학과 팔리학의 대가로 우파니샤드를 번역한 폴 도이센Paul Deussen, 팔리어불전 연구로 이름 높았던 헤르만 올덴버그Hermann Oldenberg 등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산스크리트어 판본의 발견에 크게 기여한 실벵 레비Sylvain Levi, 러시아에는 산스크리트경전의 출간에 열정을 쏟은 세르게이 올덴부르그Sergey Fyodorovich Oldenburg, 벨기에에서도 한문에도 능통했던 산스크리트학자인 루이 드라 발레 뿌셍Luois de La Vallée Poussin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렇게 유럽전역에서 인도학과 불교학, 범어학이 성행하던 시기에 난조는 영국에 유학하였고, 막스 뮐러교수 밑에서 범어학에 연구의 열정을 쏟고 일명 ‘난조 카탈로그’로 불리는 「대명삼장성교목록大明三藏聖敎目錄」의 완성으로 학위를 받고 1884년 5월 귀국하였다.

 

난조는 막스 뮐러 교수 밑에서 연구에 임하는 동안 교수와 함께 범어학 연구에 매진해 다수의 산스크리트 문헌을 출간하였고 아울러 일본에서 전승되고 있던 폐엽사본에 서사된 실담문자 형태의 산스크리트 문헌을 전해 받아 교수와 함께 연구해 그 결과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명 ‘난조 카탈로그’로 불리는 「대명삼장성교목록」은 당시 영국의 인도사무국에 있던 황벽판黃檗版 대장경의 목록으로, 전체적 내용이 흐트러져 있던 것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황벽판 대장경은 명나라 만력판萬曆版 대장경을 일본의 황벽종 본산인 우지宇治의 만복사萬福寺 스님 철안鐵眼이 완성시킨 총 6,950권에 달하는 일대총서로, 이 대장경은 1872년 이와쿠라견외사절단이 영국에 갔을 때 기증을 요청받은 것으로, 1875년 일본이 영국에 기증한 것이 혼란스러운 채 남아있었던 것이다. 난조는 이것을 3년에 걸쳐 정리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당시 동양의 불교전적이 거의 없던 서양에서는 중요한 자료이자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목록의 출간으로 난조는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았고, 귀국한 뒤에는 일본 불교계 최초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도쿄 대학에서 범어 강의

귀국한 다음해인 1885년 2월 난조는 도쿄대학에 범어학 강사로 위촉되어 강의를 한다. 범어梵語 즉 산스크리트를 강의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최초의 일이지만, 산스크리트 문자에 해당하는 전통적인 실담문자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곧 진언종의 개조인 공해(空海, 774-835)가 중국에서 『실담자기悉曇字記』를 가지고 와 실담학悉曇學이 뿌리내린 이후 일본의 각 종단에서는 각종 불교의 의례나 의식에 실담문자를 서사하고 독송하는 전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산스크리트가 불교 의례, 의식의 영역을 뛰어넘어 불교경전에 대한 연구로서 전통적인 한문경전과 비교 대조하여 그 차이점 등을 밝히는 불교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것은 난조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 문헌에 의거해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정착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난조는 도쿄대학 외에도 종문宗門의 대학이나 여타 불교계의 대학에서도 범어와 영어를 가르치며, 불교학에 있어 산스크리트를 비롯해 팔리어, 티베트어 등의 원전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난조의 주장은 당시 난조의 강의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불교학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불교 원전어에 능통한 다수의 연구자들이 나타나 불교경전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풍토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난조는 일본 불교학계에서 서구의 문헌학적 방법론을 한문불교에 접목시켜 불교의 사상적 철학적 의의를 폭넓게 만든 최초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조는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을 일본에 전한 것은 물론 일본의 불교전통을 서양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일본의 불교전통을 서양에 알린다는 것은 동양의 불교를 국제화시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동서양의 종교가 교류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달리 말하면 동양불교의 국제화,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기초가 형성된 것으로, 이것은 후에 ‘시카고 종교회의’에 일본 불교종단이 초대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근대기 불교의 학문적 방법론을 일신一新시키고 동양의 불교를 서양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난조분유는 메이지 시기(1868-1912) 일본 불교계가 만들어낸 총아寵兒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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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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