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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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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9 년 11 월 [통권 제7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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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 스님 : 발행인

 

강화도 연등국제선원의 선방 건물인 서래원을 새롭게 짓느라 주지 혜달 스님이 요즈음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 한 번씩 강화도에 들러 불사를 보곤 합니다. 마침 연등국제선원 창건과 모스크바 달마사 건립에 깊은 인연이 있는 대지심 보살님이 대한불교조계종 국제포교사회 회장이 되어 연등국제선원을 찾는 등 국제포교사 회원들과 더불어 서래원 불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10월 5일 모스크바 달마사에서 법문 후 러시아 불자들과 찍은 사진. 앞 줄 가운데 원택 스님, 왼쪽은 원타 스님. 오른쪽은 일봉 스님

 

 

그런 가운데 “10월 4일-10일 국제포교사회가 모스크바로 문화탐방을 가는데, 스님과 원타 스님 등 몇 분이 함께 가셔서 원명 스님이 이루어놓은 모스크바 달마사 신도님들과 친면을 쌓고, 달마사와 연등국제선원의 발전책을 논의해 보시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사람이 좋더라』는 원명 스님 추모집을 다시 읽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달마사를 위해 그동안 애써주신 여러 신도님들을 대하니 원명 스님을 새로 만난 듯 반갑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원명 스님은 33년의 출가 이력 가운데 20여 년의 세월을 해외포교를 위해 보내셨습니다. 싱가포르의 연화사,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의 해인사, 도네츠크 슬라뱌노고르스크의 정각사, 우크라이나의 불심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의 정각사, 키르기르스탄 비쉬켁의 보리사, 방글라데시 원명사, 네팔 붇다부미, 러시아 모스크바의 달마사 등 많은 포교당을 건립하거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기록을 보니 원명 스님은 1997년 모스크바 불자 5가족 모임을 시작으로 2000년에 달마사 법당을 개원하고, 2003년에 학생회까지 설립하여 달마사를 정식 개원하는 등 많은 노력을 펼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원명 스님이 2003년 9월23일 해인사 청량사에서 53세로 세연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동남아와 러시아 지역에 한국불교의 싹이 틀 즈음 이런 슬픔을 맞아 신도님들은 신도님들대로 힘드셨고, 국제포교를 기대하던 성철스님문도들과 도반들 역시 크나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17여 년의 시간이 지나 이뤄진 오늘(10월 5일)의 이 만남이 모스크바 달마사 신도님들과 성철스님문도들이 함께 러시아에 한국불교를 전파한다는 원명 스님의 원력을 마음에 다시금 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들의 큰 스승인 성철 큰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처다. 마음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말라. 오직 자기 마음을 알고 마음을 깨쳐야한다. ‘내 마음이 부처다’는 이 근본을 놓쳐버리면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을 잘 개발하라는 가르침이다. 내 마음을 바로 깨치는 가르침이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속에 바로 무진장한 자성의 광맥이 있으니 그것을 계발하라. 자기 마음속의 광맥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인데 그것을 계발하기 위해 3천배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참선하는 화두 곡괭이를 얻어 각자의 광맥을 스스로 캘 수 있다. 마음이 부처라는 이것만이 오직 부처님의 깨침이고 불교의 정신이란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깨치고 성불하는 것이 불교에 있어 영원한 철칙이다.”

 

성철 큰스님은 특히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我有一卷經

 종이나 먹 글씨로 만든 것이 아니네. 不因紙黑成.

 펼치면 한 글자도 없는데 展開無一子

 항상 큰 광명을 쏟아내네.” 常放大光明.”

 

라는 글을 보시고 무척 호기심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명 그럴 것이다. 종이에 그려 놓은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니라, 진정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쏟아내는 그런 한권의 경이 있을 것이다. 펼치면 글자 하나 없는 이 경을 어떻게 하면 읽을 수 있을까 하고 많이 생각했다. 그 뒤에 불교를 알아가면서 항상 큰 광명을 쏟아내는 경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찾아본다고 참선을 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철 큰스님은 20세가 되기까지는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의 책들과 서양철학 서적들을 두루 보았지만 불교는 전혀 접한 적은 없었습니다. 20세가 지난 후 비로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고, 24세 후반에 지리산 탑전에서 스스로 화두를 들고 용맹 정진하여 40여 일만에 동정일여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참선수행에 크게 환희심을 일으켜 25세인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혜일 큰스님을 만나 성철性徹이라는 법명을 받고 마침내 수행의 길로 매진하게 됩니다. 29세 때인 1940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존재의 실상을 깨치고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그 후에도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도심을 탁마 하였습니다. 

 

1947년 가을 봉암사에서 “청정 독신과 계율정신을 으뜸으로 하여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도반들과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고, 44세 되던 1955년 가을 파계사 성전암 주위에 철망을 두르고 “내가 세상을 가두고 산다.”며 10년 동안 동구불출 하셨습니다. 56세 되던 1967년 7월에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추대되시어 선종 전통수행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70세인 1981년 1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었습니다. 당시 큰스님은 “영원한 진리라고 하면 불교가 가장 수승한 것 같다. 나는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또 다시 진리를 찾아 나서겠다.”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큰스님의 일생은 영원한 진리를 위해 초연히 고독한 발걸음을 옮긴 생애였습니다. 큰스님의 “마음이 부처다. 내 마음을 깨쳐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을 철직을 삼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동시에 원명 스님의 못다한 원력을 이루기 위해 모스크바 달마사 사부대중들이 부처님 지혜의 눈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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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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