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1879년 ‘불서 강의’ 도쿄대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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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3 월 [통권 제83호] / / 작성일20-06-12 11:27 / 조회7,366회 / 댓글0건본문
이테승 | 위덕대 교수
일본 근대불교학의 출발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근대불교학近代佛敎學이란 무엇인지를 간단히 정의해보고자 한다. 근대불교학이란 당연히 ‘근대기의 불교연구’를 의미하겠지만 여기에는 ‘근대적인 불교연구’라는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근대적’이란 봉건적이라거나 구습舊習에 물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 내지는 시대에 맞는 방법을 지칭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불교학이란 이전의 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 내지 방법으로 불교를 연구 내지 탐구한다는 의미로서 근대기의 불교형태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일본에서의 근대기란 사회적인 대전환이 전제되어 있는 까닭에 근대기 불교학의 의미도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다. 즉 불교탄압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을 겪은 입장을 전제로 할 때는 불교가 사회에 큰 의미를 갖는다는 불교정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근대불교학의 내용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시대적인 조류로서 범어梵語 문헌의 해독과 같은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을 받아들여 기존의 한문 문헌에 근거한 전통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그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의미가 근대불교학이란 말에 담겨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더라도 일본에서 이러한 의미의 근대불교학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학문적인 장場인 대학에서 불교에 대한 강좌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생각된다.
강사는 조동종 선승 하라 탄잔
일본에서 최초로 설립되는 관립대학인 도쿄대학東京大學은 1877년[明治 10]에 설립된다. 그리고 이 도쿄대학에서 ‘불서佛書 강의講義’라는 이름의 불교 강좌가 개설되는 것은 개교 2년째인 1879년이다. 이 1879년의 시점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부터는 12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지만, 사실 메이지유신 이후 불교의 역사적 전개를 보면 도쿄대학에서 불교 강좌가 개설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메이지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일어난 폐불훼석의 여파는 불교계로 하여금 일본 사회 속에서 존립의 기반조차 확보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었다. 메이지유신의 근대 이전 에도막부의 근세기에 거의 국교의 지위에 있었던 불교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였지만, 이렇게 급전직하한 위상을 회복하려는 불교계의 노력은 적어도 도쿄대학이 설립되는 1877년 정도에는 상당히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불교탄압이 천황제 건립의 이념적 토대로서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 정책에 의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풍조로서는 도쿄대학에 불교학보다는 신도학神道學의 강좌가 먼저 개설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비판과 논쟁이 난무하는 대학의 학문적인 장에 불교 강좌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교 강좌는 이후 ‘인도및지나철학’에서 ‘인도철학印度哲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교학의 전통을 이어간다. 도쿄대학에서 ‘인도철학’이라는 명칭이 쓰이게 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라 타잔
1877년 출범하는 도쿄대학은 역사적 과정에서 세 개의 학교가 통합되어 등장한다. 곧 에도막부시기의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공식적인 학문기관인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學問所의 전통을 잇는 창평학교昌平學校, 에도막부 말기에 세워져 서양의 문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번서조소蕃書調所의 전통을 잇는 도쿄개성학교東京開成學校, 에도시대 서양의술을 배우고자 세워진 서양의학소의 전통을 잇는 도쿄의학교東京醫學校의 셋이다. 이 셋 중에 창평학교는 1870년 폐지되고 1877년 대학개교에 임해 도쿄개성학교와 도쿄의학교가 합쳐서 도쿄대학이 된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조직은 개교 이전에는 정식으로 국학이나 유학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논의하였다고 하지만, 실제 개교에 임해서는 법과・이과・문과・의과의 네 개학부가 출범한다. 그리고 문과의 학과로서는 제1과에 사학・철학・정치학 제2과에 화한문학과和漢文學科를 두었다. 이 학과의 조직구성은 개교 이후 매년 그 명칭이 바뀌지만, ‘불서 강의’는 개교 2년째인 1879년 제2과인 화한문학과의 교과목으로 개설되고, 1882년[明治 15]에는 철학과 내에서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도쿄대학 전체의 조직이 설립 당초부터 매년 바뀌지만, 그 명칭 중에 특히 의미를 갖는 것은 문과에 철학哲學이라는 이름을 학과명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철학이 도쿄대학의 학과 명칭에 사용된 것은 당시 도쿄대학의 설립이념과도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서양의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사람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니시 아마네(西周, 1829-97)이다. 이 니시 아마네는 도쿄대학의 전신으로서 후에 도쿄개성소가 된 번서조소의 학생으로 입학하여,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개성소開成所의 교수가 된다. 1868년에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번역서를 출간하고, 1874년에는 『백일신론百一新論』을 출간한다. 이 『백일신론』에서 그는 필로소피를 철학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고, 이 말은 이후 일본 사회에 널리 쓰이게 된다. 그리고 이 니시 아마네는 번서조소의 학생시절에 후에 도쿄대학 최초의 문과대학 총리[總理, 總長]가 되는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를 만나 오래 교유하며, 메이지정부 수립 후에는 가토와 함께 대학설립에 참여한다. 이 가토나 니시 등은 당시 폐불훼석을 겪고 있던 불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으로 이해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초로 설립된 도쿄대학에서 ‘불서 강의’의 교과목을 개설하고자 한 가토는 불교를 철학적으로 내지는 서양의 학문적인 입장과 비교해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을 강사로 구하고자 하였고, 이에 등장한 사람이 조동종 선승인 하라 탄잔(原坦山, 1819-1892)이었다.
하라 탄잔은 에도막부의 학문기관인 창평판학문소에서 유학을 배우고 젊은 날에는 의술을 익히고자 노력하였다. 한방의 의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해부학이나 신경생리학 등의 서양의술도 공부하였다. 그렇지만 유학자로서 조동종의 학문기관인 전단료栴檀寮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중 당시 승려들과 유교와 불교의 우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그 논쟁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제자가 된다는 약속에 따라 하라는 불교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하라는 이후 불교도로서 많은 활약을 하며 특히 서양의학의 용어로서 불교의 정신을 밝히고자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담은 『심식론心識論』, 『무명론無明論』 등의 책을 출간하고, 후에 자신의 여러 저술을 합쳐서 만든 『시득초時得抄』 그리고 대표적인 저서로 『심성실험록心性實驗錄』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곧 그는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뇌와 뇌에 집중하는 신경계통의 작용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작동하는 것이라는 등 불교의 다양한 용어를 서양의 의술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실질적이고 개방적인 불교인의 모습으로서 시대에 앞서는 자세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라 탄잔이 실제 도쿄대학의 ‘불서 강의’ 담당의 요청을 받았던 때는 당시 불미스런 일로 조동종의 승적僧籍도 박탈된 상태였다고 하지만 그는 가토의 요청을 수락해 ‘불서 강의’의 과목을 담당하였다.
강독 교재는 『대승기신론』
메이지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세워진 관립 도쿄대학에서 개교 2년 만에 불교 강좌가 개설된 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불교는 구습에 젖은 종교로서 적폐의 대상인 까닭에 폐불과 훼석이 자행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적 풍조 속에 그 탄압을 용인하고 방조하던 메이지정부가 불교 강좌를 허용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아마도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서양의 문물은 받아들이지만 서양 정신의 근간인 기독교의 사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종교적인 논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곧 메이지유신 이후 기독교 해금解禁이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고 논전을 전개한 곳이 불교계였다. 당시 신도국교화의 이념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신도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물밀듯 밀려오는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대응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내의 종교적인 한계성을 갖는 신도의 입장 보다는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단정하고 명확하게 논전을 펼친 불교의 입장을 당시 사회의 지도자나 도쿄대학 설립에 관여한 사람들은 그 뜻을 높이 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불교의 입장을 서양의 의술과 비교하고 대비해 연구하는 개방적인 입장을 가진 불교가로서 하라 탄잔은 당시 철학의 중요성을 인지하던 대학으로서는 시의적절한 인물로서 간주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도쿄 고마자와 대학에 있는 하라 타잔 비.
1879년 ‘불서 강의’의 강좌가 당시 제2과 화한문학과에 개설되고 강사로서는 하라 탄잔이 임명되었다. 이때 하라가 강독한 교재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었고,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사상적 내용은 당시 학생들은 물론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후에 하라는 불교를 심성철학心性哲學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는데, 그 말도 이 『대승기신론』에 근거해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심성철학은 당시 대학의 철학 선호의 입장에도 잘 맞는 말이라 생각되지만, 심성철학을 대변하는 불교는 후에 철학과의 한 강좌로서 ‘인도철학’으로 불리게 된다. 곧 하라는 불교는 인도의 철학으로 이해해야 하고 ‘인도철학’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인도철학’의 명칭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도쿄대학은 물론 일본 전역에서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된다.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도쿄대학에서 ‘불서 강의’의 강좌가 개설됨으로서 시작되고, 이후 ‘인도철학’으로 이어져 오랫동안 학문적 활동이 이루어져 불교학의 토대가 구축된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불교학의 출발은 폐불훼석 등으로 그 위상이 저하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곧 ‘불서 강의’의 개설은 보다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요청되는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 불교의 정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불교학의 출발은 불교의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여 일본 사회 속에 그 가치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된 것으로 곧 불교의 정신을 올바로 알리는 학문적 장치가 설치된 것이다. 이러한 기제장치機制裝置를 바탕으로 불교의 정신을 알리는 다수의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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