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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 회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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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2 월 [통권 제82호]  /     /  작성일20-06-12 16:16  /   조회5,4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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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일본 근대의 출발로서 메이지유신은 이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근세를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에도막부의 쇼군將軍 중심의 정치체제를 천황 중심의 체제로 돌리고,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중심이 되었던 사회체제를 신도중심의 체제로 바꾸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종교형태상 오랜 기간 전통으로 간주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문화를 부정하여 신불분리에 의한 신도 우위를 강제하고자 한 것이 근대초기의 종교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에 의한 정치적, 종교적 강제가 시행됨에 따라 생겨난 불교에 대한 억압이 소위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이 폐불훼석의 풍조는 일본 전역을 강타해 불교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천황을 정치적 정점에 둔 신도국교화 정책에 의거한 종교정책의 시행에 있어 불교계는 탄압과 억압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근대의 칼바람 속에서도 불법(佛法)에 확고한 의지를 가진 불교인들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불교계를 만들기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렇게 근대 초기 뜻있는 불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불교가 폐불훼석의 탄압으로부터 회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의 결성과 대교원(大敎院)의 성립과 폐지의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제종동덕회맹(이하 회맹으로 약칭)은 1868년 12월에 여러 종단의 승려가 중심이 되어 만든 불교연합체로서, 3월 신불분리령이 포고된 시점에서는 반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상황에서 결성되었다. 근세의 에도막부에서는 불교계의 종단들이 횡적으로 교류하거나 연합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정부 내에 불교계를 담당하는 부서조차 없는 상황으로 사실 신도 중심의 종교정책에서 불교는 철저하게 배척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불교배척의 상태에서 각 종단의 뜻있는 불교인들은 불교탄압의 종교정책을 막고 불교경시의 풍조를 바로잡을 단체에 대한 공감을 가지고 만든 것이 회맹이었던 것이다. 

 

이 회맹은 처음에는 교토(京都)에서 결성되어 수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회합을 거듭함에 따라 참여 인원도 급속도로 불어났다. 교토에서의 회합은 오사카(大阪), 도쿄(東京)로 점차 퍼져나가게 되고, 도쿄에서 모임이 결성됨에 따라 불교계의 단합된 힘의 양상은 일본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도쿄에서 거행된 회맹의 모임에서는 당시 회맹이 목표로 하였던 과업을 여덟 가지의 문제(問題)란 이름으로 정리하여 드러내었다. 이것은 회맹에 참여한 전 불교인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임은 당연하였지만, 불교계로서 불교가 사회에 대처해야 할 당시의 과제를 정리하여 보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덟 가지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왕법과 불법은 분리할 수 없다는 논(王法佛法不離之論)

2. 기독교를 깊이 연구해 비판 배척한다는 논(邪敎硏窮毁斥之論)

3. 자기 종파의 교학을 잘 연구한다는 논(自宗敎書硏覈之論)

4. 불교, 유교, 신도의 정립을 위해 잘 연구해야 한다는 논(三道鼎立練磨之論)

5. 자기 종파의 폐단을 없앤다는 논(自宗舊弊一洗之論)

6. 새로이 학교를 세워 운영한다는 논(新規學校營繕之論)

7. 각 종파의 인재를 등용한다는 논(宗宗人才登庸之論)

8. 각 지역의 사람들을 잘 가르친다는 논(諸州民間敎諭之論)

 

이 여덟 가지의 논의의 핵심이 되는 문제를 보면 당시 불교계가 일본 사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곧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의 종교적 정책에 의거한 왕법이 불법과 다르지 않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사교 즉 기독교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각 종파별로 구폐를 쇄신하고 새로운 사회에 맞는 정책이나 인재등용 등을 과제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학교를 세워 운영한다는 것이나 인재등용 등과 같은 논의는 당시 서구의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는 풍조 속에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불교인을 양성하자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도쿄의 회맹에서는 각 종단이 연합해 1870년 3월 ‘제종총횡(諸宗總黌)’이라는 학교를 만들었고, 후에 도쿄대학의 최초의 강사였던 하라 탄잔(原坦山)도 이 학교의 강사로서 활약하였다. 

 


시마지 모쿠라이

 

이처럼 회맹은 폐불훼석의 강풍이 본격적으로 몰아치던 근대 초기 결성되어, 그 역할을 수행하고 불교계에 대한 억압이 한풀 꺾인 1872년경에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 1872년은 불교나 신도의 종교를 담당하는 정부의 관청으로 교부성(敎部省)이 설립되는 시점으로, 이 교부성의 설립으로 불교계는 하나의 종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근대 초기 불교계를 관리하는 부서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부단하게 불교계는 담당부서의 설립을 요청하였고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 교부성의 설립이다. 따라서 교부성은 당시 신도나 불교를 종교로서 동등하게 담당하는 정부의 종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초기 신도국교화 정책에 의거해 신도 일변도의 종교정책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의도한대로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신도도 불교와 같은 종교로서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는 정부차원의 무시와 도외시가 다반사로 이루어지지만, 회맹의 활약이나 불교인의 노력으로 신도와 동일한 종교로서 인정받게 되고, 그 결실로서 나타난 것이 교부성인 것이다. 교부성이 설치되고나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정책으로 14등급의 교도직(敎導職)이 정해지고, 각각의 교도직은 ‘3조 교칙’이라 불리는 다음의 세 가지의 내용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국민을 교도할 것을 명하였다. 

 

1. 경신애국(敬神愛國)의 뜻을 근본으로 할 것.

2. 천리인도(天理人道)를 분명히 할 것.

3. 황상(皇上)을 봉대(奉戴)하고 조정(朝廷)의 뜻을 준수(遵守)할 것.

 

곧 ‘3조 교칙’은 교도직으로 정해진 신도와 불교의 사람들이 기본이념으로 간직할 내용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국민교화에 임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3조 교칙’ 외에도 교부성에서는 ‘겸제(兼題)’라고 하여 교도직들이 제출해야 할 과제 등을 제시해 국민교화에 힘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3조 교칙’이나 ‘겸제’라 불리는 과제는 불교의 교도직에겐 상당히 낯선 과제로서 교부성의 명령을 따르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불교계가 제안한 것이 국민 교육기관의 성격을 갖는 대교원이었다. 

 

대교원은 불교계의 입장에서 불교적 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기관의 설립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교부성은 이 기관의 설립을 수용하였다. 이 대교원의 설립과 함께 각각의 지역에 중교원・소교원이 설치되었고, 대교원의 교육내용이 실제 중・소교원에도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교원은 불교측의 요청에 의해 설립된 것이지만, 실제 운영은 신도와 불교가 종교적인 모습으로 뒤섞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특히 대교원의 출범을 알리는 개원식(開院式)에서 신도와 불교가 함께 의식을 혼용하는 입장에서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신도와 불교가 동일한 종교의 입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종교형태를 보이던 중 불교계에서는 이 대교원으로부터 탈퇴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본격적인 탈퇴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탈퇴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크게 활약한 사람이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로서, 그는 앞서 교부성의 ‘3조 교칙’에 대한 비판의 건백서도 제출하고 또 이 대교원의 탈퇴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러한 불교계의 입장이 반영되어 교부성은 후에 폐지되어 신도와 불교는 각각의 길을 걸으며, 불교의 각 교도직은 종파별로 최고의 수장으로서 관장(管長)이 관활하게 된다.

 

근대 초기 폐불훼석의 탄압 속에서 불교의 회생을 위해 중요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 회맹의 성립으로, 이 회맹의 성립으로 인해 불교계는 단결하여 정부의 방침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회맹은 비록 불교탄압의 풍조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인 불법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가르침으로서 왕법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당시 서구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오는 사회적 풍조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수용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회맹의 입장은 각각의 종단에도 영향을 미쳐, 불교 각 종단의 개혁이나 교육기관의 설립, 인재등용 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인재등용의 연장선에서 인재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일찍부터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진종 대곡파(大谷派)의 승려로서 영국에 유학하여 후에 도쿄대학에서 최초로 산스크리트를 강의한 난조 분유(南條文雄)도 이러한 인재양성의 결과로서 나타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회맹의 활동을 비롯해 불교계의 노력으로 교부성이나 대교원이 설립되는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 이외에는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 정책을 펼쳤지만, 신도국교화 정책의 부진과 불교계의 요구로 신도와 불교를 동등한 종교로 간주하고 다루는 교부성을 설립하고 또한 불교계의 대교원 설립요구도 수용하였다. 물론 불교계는 대교원 설립의 요구는 물론 그 폐지에도 적극 나서게 되는데, 여기에는 신도와 공동의 종교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것에 연유한다. 

 

그렇지만 불교계가 대교원 폐지를 요구하는 1873년 시점에서는 이전의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상황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서, 불교 역시 일본 사회에 중요한 종교인 것이 인정되었다. 이렇게 불교계가 중요한 종교로서 인정받는 데는 회맹의 활동이나 대교원의 활동 등에서 보듯 많은 불교인들의 확고한 불법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불교인의 노력이 더욱 빛을 발하여 도쿄대학에서 ‘불서 강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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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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