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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록 읽는 일요일]
나무가 산다. 나무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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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20 년 1 월 [통권 제81호]  /     /  작성일20-06-13 17:44  /   조회6,9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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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불교작가 

 

“무엇이 조사(祖師)께서 서쪽으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선문답의 묘미는 ‘하향적下向的’ 뜬금없음에 있다. 질문은 하나같이 거창한데 대답은 한없이 초라하다. 나이어린 제자들은 하늘에서 깨달음을 구하는데, 나이든 스승은 땅만 쳐다보며 깨달음을 찾는다. 땅도 그냥 땅이 아니라 맨땅이거나 진흙탕이다. ‘똥 막대기가 도道’라던 운문 선사처럼, 똥을 파헤쳐 깨달음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묻는 입장에선 매우 허무할 법한데, 그래도 그게 엄연한 진실이니 어쩔 수는 없다. 나이 든다고 반드시 철드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 무조건 철을 들어야 한다. 무거운 짐을 들듯이 노병老病에 비참해지고 쓸쓸해진다. 삶이란 본디 더럽고 치사하고 끙끙 앓는 것임을 절감한다. 그게 단순히 실패했다거나 밀려났다고 해서 나타나는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느낌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실임을 안다. 늙어서 허리가 휘면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 대신 땅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비록 하늘을 이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땅에서 벌어진다. 깨달음을 생각하고 깨달음을 우러러본다고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넘어지고 뒹굴면서 크게 당해봐야만 깨닫는다. 노인들은 멀리 바라보는 대신,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다. 

 


  

뜰 앞의 잣나무는 대표적인 화두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화두다. 대개 절집 근처의 찻집에는 ‘뜰 앞의 잣나무’란 간판이 걸려 있다. 불교공부깨나 한 이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문패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했다. ‘조주’라는 이름난 스님이 진리라며 내놓은 물건이니, 흥미와 관심이 아니 갈 수 없다. 한편으론 산뜻하고 한편으론 신비로운 어감도 유명세에 한몫했을 것이다. 본래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라고 한다. 뜰 앞의 잣나무의 원어原語는 ‘정전백수자庭前栢樹者.’ 여기서 ’백수‘를 잣나무로 잘못 번역했다는 지적이다. 조주 선사가 살았던 중국 백림선사에도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가 심겨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식물에 젬병이어서, 잣나무와 측백나무를 분간하지 못한다. 하긴 구분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어느 나무이든, 열매를 맺고 새에게 집을 내어주며 사람에게 베인다. 

 

점심 먹고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공원에서 혼자 담배를 피운다. 아름드리나무는 아름답기에 앞서 불쌍하다. 도망갈 발이 없고 변명할 입이 없다. 저렇게도 사는데 못 살 것 뭐 있나, 싶기도 하다. 

 

어느 책에 ‘뜰 앞의 잣나무’를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썼다. 제목은 ‘나무가 산다, 나무도 산다.’ 상당히 쓸 만한 독해였다고 이제껏 자부한다. 숲은 웅장하지만 나무 한 그루는 쓸쓸하다. 제아무리 몸통이 거대하더라도 혼자 서 있고 혼자 비 맞아서 쓸쓸하다. 그래서 홀로 감상에 젖거나 시를 쓸 때 좋은 글감이 된다. 남과의 비교는 매우 나쁜 습관이지만 거기에라도 기대야 숨통이 트이는 때가 있다. 나무 한 그루는 나보다 더 고된 것 같아서 위안이 된다. 이동과 방어의 권리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는 아주 사소한 고통이어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변호사도 사지 못한다.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열매를 맺으며, 가지가 꺾이고 잎이 상해도 뿌리는 건재하다. 힘들어도 살고 더러워도 살고 누가 뭐라 해도 산다. 불쌍하다고 해줘도 살고 구세주가 안 와도 산다. 뜰에 있는 나무는 뜰을 이용해 살고, 들에 있는 나무는 들을 파고들며 산다. 어떻게든 산다. 이보다 굳센 정진을 찾기 어렵고 이보다 감동적인 현전現前도 드물다. 잣나무인지 측백나무인지, 조주가 무슨 나무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무를 본 것만은 분명하다. 

 

“스님께서는 경계(境界)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경계란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단편적이고 일시적이다. 총체적이고 장구해야 하는 진리를 설명할 수단으로는 적절치 않다. 도를 구하는 자들은 대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도를 궁금해 하건 말건, 뜰 앞의 잣나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물을 빨아들이고 햇살을 받아들인다. 또 다른 나무가 그렇고 언제 어디나의 나무도 그렇다. 뜰 앞의 잣나무가 목숨을 다해 쓰러진 자리에 그 뜰 앞의 잣나무를 거름삼아 자라나는 뜰 앞의 잣나무도 그렇다. 뜰이 팔려서 건물로 개발되더라도 뜰 앞의 잣나무는 건물 로비의 관상수로 자라거나 주차장 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민들레로 자란다. 뜰 앞의 잣나무는 현상이 아니라 영원인 것이다. 

 

“노승이 90년 전 마조대사 문하에서 80여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모두가 솜씨 좋은 선지식들로서 가지와 넝쿨 위에 또 가지와 넝쿨을 만드는 지금 사람들과는 달랐다. 성인(부처님) 가신 지가 오래되어 한 대代 한 대가 틀리게 나날이 다르다. 남전스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류異類 가운데서 행行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요즈음은 주둥이가 노란 어린 것들이 네거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법을 설하여 널리 밥을 얻어먹고 절을 받으려 하며 300명이고 500명이고 대중을 모아놓고는 ‘나는 선지식이고 너희는 학인이다’고 하는구나.” 

 

백련불교문화재단이 번역해 펴낸 <조주록>을 읽어보니, 뜰 앞의 잣나무 뒤에 제법 긴 설명이 붙어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조주는 평소처럼 시가 아니라 산문을 썼다. 아예 일장연설을 한다. 그답지 않은 부연이긴 한데,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 의미를 좀처럼 알아먹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다. 먼저 ‘90년 전’이란 말에서 120세까지 살았던 조주의 압도적인 장수를 새삼 실감한다. “가지와 넝쿨 위에 또 가지와 넝쿨을 만드는 지금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삶을 영위했던 과거의 선사들에 존경을 표하고 있다. ‘이류異類 가운데서 행行해야 한다(이류중행)’는 건 이런저런 이류들 가운데서 인생을 견디고 버텨야만 인생이 강해지고 참다워진다는 말이다. ‘주둥이가 노란 어린 것들’이 설치고 있긴 하다만, 그것은 가짜이니 연연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썩어문드러진 삶만이 세상의 거름이 될 수 있다. 

 

꼬박꼬박 하루 세 끼를 먹든 다이어트한다고 한 끼를 먹든 먹어야 한다. 호텔에서 뷔페를 먹든 쪽방에서 라면을 먹든 먹어야 한다. 채식주의자라도, 먹어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은 단순히 속담으로 치부될 말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나 싶을 때에도 입에 밥이 들어가더라. 살아있더라. 살아지더라. 이보다 확실한 진리가 어디 있던가. 정의와 종교와 힐링이 이 생멸의 문 앞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그러나 왜 모든 성황당은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나도 산다. 이것들아.’ 

 

소동파蘇東坡는 중국의 고급요리인 동파육의 어원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불교도 많이 공부했다. 진리는 무엇일까 골몰하며 수행에 전념했는데 퍼뜩 답이 오지 않았다. 자연에서 찾아보라는 어느 스님의 권유에 숲길을 걷다가 마침내 눈을 떴다. ‘계곡소리가 부처님의 말씀이요 산의 모습이 부처님의 몸이다(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폭포는 끊임없이 추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상처가 난 산에만 나무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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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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