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이야기]
반본환원 : 현상학적 환원과 얼마만큼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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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9 년 3 월 [통권 제71호] / / 작성일20-06-17 22:19 / 조회7,483회 / 댓글0건본문
정은해 | 성균관대 초빙교수 · 철학
반본환원返本還源이란 말은 반본과 환원의 결합인데, 그 둘의 관계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이는 반본은 초발심에 의거한 말이고, 환원은 궁극의 원만함에 의거한 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返과 환還에 대한 지적이어서 본本과 원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이는 ‘본원을 회복함은 본심을 회복함을 이른다’(復本源或云復本心)고 하여, 본원을 본심으로 명시하였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십우도十牛圖에서 반본환원이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과 소가 모두 사라짐) 이후의 단계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풀이도 가능하다. 곧 반본환원을 본원本源에로 반환返還함이라고 읽고, 본원을 본래의 세계로 읽는 것이다. 반환은 ‘빼앗거나 빌린 것을 도로 돌려줌’의 의미도 있고, ‘되돌아오거나 되돌아감’의 의미도 있는데, 여기서 뒤쪽의 의미를 취하면, 반본환원은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오거나 되돌아감이란 말이 된다.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감
십우도는 목우도나 심우도라고도 불리는데, 송나라(宋, 10세기~13세기)의 보명普明의 것과 곽암廓庵의 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에 대한 연보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보명은 11세기 사람이고, 곽암은 12세기 사람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송나라 목우도牧牛圖에는 다양한 판본이 있었는데, 대체로 게송과 그림으로 구성되고, 때로는 게송 자체가 간단한 머리말(序)을 포함했다고 한다. 당시 주목된 목우도는 청거清居, 곽암廓庵, 자득自得의 것이었고, 청거의 것은 다섯 개의 장면이고, 곽암의 것은 열 개의 장면이고, 자득의 것은 여섯 개의 장면이었다고 한다.
곽암의 목우도를 해설하는 문헌은 『주정주양산 곽암화상 십우도송住鼎州梁山廓庵和尚十牛圖頌』(주1)이다. ‘정주(지금의 호남성) 양산에 거주하는 곽암 화상(승려)의 십우도 게송’이라는 의미인데, 분량은 A4용지로 5쪽 가량이다. 이 문헌에는 전체적 머리말[序], 그림을 간략히 설명하는 10개의 게송(간단한 머리말이 앞에 위치함), 각각의 게송에 대한 석고이石皷夷 화상의 화답 게송과 괴납련壞衲璉 화상의 화답 게송이 포함되어 있다. 곽암은 전체적인 머리말에서 청거清居의 목우도를 언급하며 그 그림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여 병에 맞추어 방도를 베풀었다고 칭송하였는데, 이는 곽암이 청거에게 영향 받았음을 알려준다.
곽암의 십우도는 그에 앞서 그려진 보명의 십우도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차이 중의 하나는 보명은 소가 온순해지는 것을 소의 몸의 검은 색이 점차 흰색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지만, 곽암의 그림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의 차이는 보명은 곽암의 제8의 인우구망人牛俱忘 단계까지를 열 개의 그림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곽암 의 9) 반본환원返本還源과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시장에 들어서서 손을 드리움)에 해당하는 그림이 보명에게는 없다. 보명에게 없던 이 두 장면을 곽암이 추가한 것은 그가 세간에 들어서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심을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라고들 해석한다.
반본환원에 붙여진 곽암의 4게송은 다음과 같다: “본원에로 돌아오려 이미 많은 공을 들였도다(返本還源已費功). 어찌 즉시와 같겠는가, 장님과 귀머거리와 같도다(爭如直下若盲聾). 암자 속에 앉아 암자 앞의 사물을 보지 않는데도(庵中不見庵前物), 물은 저절로 망망하고[아득하고] 꽃은 저절로 붉도다(水自茫茫花自紅).”
네 개의 게송 중 “어찌 즉시와 같겠는가, 장님과 귀머거리와 같도다”라는 둘째 게송의 의미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데, 『선의 지혜 대전 집』(2011)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참고할 만하다: “반본환원을 말하자면, ‘환’은 즉각 직접 나타나는 것과 같지 않다; 맹인과 같고 귀머거리와 같고, 보아도 보지 않고, 들어도 듣지 않고, 돌이키면서 대단히 많은 힘을 소모한다.”(주2) 여기서는 본래의 세계가 즉각 직접 나타나지 않기에 많은 노력을 들이는 어려운 과정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셋째와 넷째의 게송, 곧 “암자 속에 앉아 암자 앞의 사물을 보지 않는데도, 물은 저절로 망망하고 꽃은 저절로 붉도다”라는 것은 사물을 보지 않는데도 사물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능견(能見, 주관)과 소견(所見, 객관)의 상대적 경계를 벗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물을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사물이 원래대로 자연스럽게 마음에 나타난다는 의미로도 음미될 수 있다.
남송南宋 시대의 일산국사(一山國師, 1247~1317)는 십우도 각각의 이름에 대해 짤막한 평을 남겼는데, 반본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작위함이 없으니 어떤 일이 있겠는가? 눈은 맹인같이 보고 [귀는] 귀머거리같이 듣는다. 산골짜기 물이 [하늘을] 담아서 남색의 옥돌 같고, 산꽃의 개화는 비단실의 붉음 같다”(주3) 여기서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옴 이후의 마음과 경계가 강조되었다.
어쨌거나 반본환원返本還源이란 말은 현상학적 환원(Phenomenological Reduction, 現象學的還元)이라는 말을 환기시켜준다. 환원還源과 환원還元이 표현상 다르고, 근원[源]과 으뜸[元]이 의미상 다르지만, 둘 다 되돌림Reduction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십우도의 열 단계 과정 중에서 어느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학문일까?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학적 방법론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현상학적 환원은 현상학적 방법론의 하나이다. 현상학적 방법론은 크게 형상적 환원과 현상학적 환원으로 나눠진다. 형상적 환원은 철학만이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등 다른 모든 학문들이 원용하고 있고, 현상학적 환원은 현상학에 고유한 방법론으로 남아 있다.
1) 형상적 환원은 대상(사실)에서 형상(본질)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의 3단계로 이뤄진다. ① 첫째는 자유로운 변경이다. 이는 임의의 대상에서 출발하여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다양한 유사한 대상들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예컨대, 삼각형이나 미움을 다양하게 변경시켜보는 것이다. ② 둘째는 계속적 파지(파악하여 유지함)에 의한 종합적 통일이다. 이는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생겨난 다양한 유사한 대상들을 계속적으로 파지하면서, 그것들이 중첩과 합일에 의해 종합적 통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삼각형들이나 다양한 미움들을 계속적으로 파지하면서 그 특징들이 수동적으로 종합되고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다. ③ 셋째는 능동적 직관(이성의 눈으로 봄)으로서의 본질직관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미리 구성된 종합적 통일에 주목하면서, 거기서 드러나는 불변적 일반성을 능동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예컨대 종합적으로 통일된 삼각형으로부터 세 변, 세 각, 내각의 합 (180도) 등 삼각형의 불변적 일반성을 직관하는 것이고, 종합적으로 통일된 미움으로부터 자존심이 무시됨, 선의가 무시됨, 상대에 대한 기대의 지나침 등 미워함의 불변적 일반성을 직관하는 것이다.
2) 현상학적 환원이란 의식 초재적 본질을 의식 내재적 본질로 되게 하는 방법으로 판단중지와 초월론적 환원이라는 두 단계로 이뤄진다. ① 첫째는 판단중지이다. 이것은 사실세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소박한 확신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을 중지하면, 남게 되는 것은 의식체험들의 흐름 내지 흐름으로서의 의식체험들뿐이게 된다. ② 둘째는 초월론적 환원이다. 이것은 판단중지를 통해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어지지 않는 본질을 이제 초월론적(=대상구성적)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로써 본질은 의식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의식 내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후설이 전개한 현상학이란 초월론적 주관의 대상형성 작용 내지 본질구성작용에 대한 연구를 말한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십우도와 얼마만큼 일치하는가? 비교를 위해 십우도의 내용이 잠시 환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를 잃었다는 것은 마음을 잃었다는 것을 비유하는데, 이는 마음이 외부의 대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이 외부의 대상에 빠져 있다는 것은 대상이 나의 외부에 실재한다고 여기고, 마음이 그 대상을 집착하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을 되찾는 일(심우)은 대상이 나의 마음속에 있다고 여기고(견적), 마음 속의 대상을 들여다보는 것(견우)이다. 마음속의 대상(득우)이 멋대로 지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면(목우), 더 이상 마음의 외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기우귀가). 관심이 마음속에만 머무니, 외부 대상은 저절로 무화되고(망우존인), 마음은 저절로 안정된다. 안정된 마음에 대해 무심해지니, 마음도 저절로 무화된다(인우구망). 이렇게 법공과 아공이 실현된 마음에 저절로 산천이 비춰지니, 마음이 지어내기 이전의 본래 모습 그대로이다(반본환원). 일 없는 마음이 할 만한 것은 다른 이들의 마음 찾는 일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입전수수).
진공묘유의 세계
마음을 되찾는 일(심우)은 철학들 중에서 무엇보다 현상학의 일이다. 대상이 나의 마음속에 있다고 여기는 것(견적)은 판단 중지이다. 그렇다면 초월론적 환원은 어느 단계에까지 미치는 것일까? 현상학은 대상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여 대상이 본래 공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짓는자인 주관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으니, 외부 대상이 저절로 무화되든 것(망우존인)까지만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남아 있다. 후설은 자신의 후기 사유에 있어서 초월론적 주관(자아)을 ‘살아있는 현재lebendige Gegenwart’에로, 곧 매 순간의 지금에로 환원하고, 이 ‘살아 있는 현재’가 저절로 ‘파지-현재-예지’의 시간구조를 구성하여 하나의 현재장(ein Gegenwartfeld, 現在場) 내지 ‘하나의 경험장ein Erfahrungsfeld’을 이룩한다고 말한다. 이 경험장은 반성적 분별 이전에 저절로 나타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초월론적 주관을 ‘살아있는 현재’에로 환원하는 것은 대상만이 아니라 마음도 무화하는 것(인우구망)이 아닌가? 반성적 분별 이전의 세계인 하나의 경험장은 반본환원으로 되찾은 본래의 세계가 아닌가? 현상학이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다른 학문에 기여함은 다른 이들의 마음 찾는 일을 도와주는 것(입전수수)이 아닌가?
현상학은 의식구조의 해명만이 아니라 상담치료에도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라는 부문이 그것이다. 불교는 번뇌의 사안이 무상이며 공이라는 것을 알려 번뇌의 사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반면에 현상학에 기반을 둔 질적 연구는 고민의 사안이 무엇을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인지를 밝혀, 그 고민의 본질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는 해소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해결하려 하지만, 마음 찾는 일을 도와주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제기된 물음들은 열린 채로 놓아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물음들은 이미 십우도를 보는 관점을 넓혀주었고,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십우도를 풍부하게 해석할 여지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반본환원을 통해 반환된 본원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 속에서 나타나는 진공묘유의 세계이다. 아직도 추운 날씨지만 추위를 견뎌내며 절에 들르는 등산객들은 신도들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십우도를 기웃거리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 반환된 본원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
1) http://tripitaka.cbeta.org/X64n1269_001
2) 熊述隆, 『禪の智慧大全集』, 新潮社, 2011, p.388: “要說返本還源, 還不如當下直現., 如盲似襲, 視而不見, 聽而不聞, 反而花費許多功夫.”
3) 大正蔵, 『一山國師語録』, T2553_.80.0327b22-b24: 返本還源. 既然無作有何功. 眼見如盲聽 似聾澗水湛如藍色碧. 山花開似錦機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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