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지금 살아계셨다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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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3-28 16:44 조회19,312회 댓글0건본문
<성철 스님 지금 살아계셨다면...>
상좌 원택 스님에게 듣는 성철 스님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종교인들이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친다며 개입하는데 정치적인 결정을 유도한다는 것 자체가 정교(政敎) 분리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영향력을 갖춰야지 현실에 들어가 개입하는 것은 도리어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현실 정치에 지도해 줄망정 개입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안목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그런 정신을 견지하셨습니다."
종교가 화합과 치유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요인이 되면서 평생을 청빈한 수행자로 살다간 성철 스님(1912-1993)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지난 24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성철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스님의 삶과 사상을 둘러보는 학술포럼이 열렸다. '퇴옹성철의 100년과 한국 불교의 100년'이라는 주제의 이 학술포럼은 올해부터 3년간 열린다.
학술포럼을 주관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이사장이자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인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은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가신 어른"이라면서 "스님이 불교 종단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스님의 삶과 사상을 통해 바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기자와 만난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과 한경직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 계실 때는 한국 종교가 서로 자기의 개성을 살리면서 남의 종교를 배려하는 종교 화합의 좋은 시절을 보냈다"면서 "하지만 요즘 종교 간 화평이 깨지면서 옛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운 시절이 됐다"고 말했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신 1993년은 사회 지도층이 부도덕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던 때였는데 누더기 한 벌과 검정 고무신 하나, 지팡이 하나만 남기고 떠나신 스님의 청빈한 모습이 큰 감동을 줬다"면서 "스님의 큰 마음을 온전히 담아서 세상에 전하지 못한 부족함을 늘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불교의 큰 별 성철 스님. 열반한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그는 불자들 사이에 생생히 살아 있는 스승이다.
"어떻게 남에게 속아보셨는지 늘 '남을 속이면 안된다'고 주의를 많이 주셨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도 속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심하고 3일도 못 지키는 사람은 자기에게 한 약속도 못 지키는 자라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상좌들이 참선하는 모습은 좋아했지만 '본사(本寺) 주지도 안 된다. 말사(末寺) 주지도 안 된다'며 상좌들이 행정직에 앉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셨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처럼 제자들에게 엄격한 스승이었지만 속 정이 깊고 자애로운 분이었다.
"스님의 따님인 불필(不必) 스님이 석남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스님께서 어느 날 절 부르시더니 '석남사에 갔다 와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왜 가야 합니까'라고 여쭸더니 '불필이 아는 스님이 죽었단다'라며 모래를 씻어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광명진언을 108번 외우신 뒤 그 모래를 불필 스님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평소 부인에 대해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을 뿐더러 출가 후에는 부인을 찾아가시지도, 찾아오지도 못하게 하셨는데 부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스님이 무섭기만 한 분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정도 있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택 스님은 또 성철 스님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1981년 6대 종정에 추대됐는데 그해 4월 초파일 법어를 내리시는데 어려운 한문으로 된 법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 법어로 하셔야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자식 건방지다'라고 하시며 화를 내시더니 며칠 뒤 '이러면 됐냐'며 한문 반, 한글 반인 법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머지 반도 한글로 해주시면 얼마나 좋은 법어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그 자식 신경 쓰이게 하는 놈'이라고 야단치시더니 하루 뒤 한글로 된 법어를 던져 주시며 '이제는 됐냐'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생각이 유연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라면 내 주의, 내 주장을 잠시 접고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정신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yunzhen@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3-28 07:25 송고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종교인들이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친다며 개입하는데 정치적인 결정을 유도한다는 것 자체가 정교(政敎) 분리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영향력을 갖춰야지 현실에 들어가 개입하는 것은 도리어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현실 정치에 지도해 줄망정 개입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안목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그런 정신을 견지하셨습니다."
종교가 화합과 치유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요인이 되면서 평생을 청빈한 수행자로 살다간 성철 스님(1912-1993)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지난 24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성철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스님의 삶과 사상을 둘러보는 학술포럼이 열렸다. '퇴옹성철의 100년과 한국 불교의 100년'이라는 주제의 이 학술포럼은 올해부터 3년간 열린다.
학술포럼을 주관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이사장이자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인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은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가신 어른"이라면서 "스님이 불교 종단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스님의 삶과 사상을 통해 바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기자와 만난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과 한경직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 계실 때는 한국 종교가 서로 자기의 개성을 살리면서 남의 종교를 배려하는 종교 화합의 좋은 시절을 보냈다"면서 "하지만 요즘 종교 간 화평이 깨지면서 옛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운 시절이 됐다"고 말했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신 1993년은 사회 지도층이 부도덕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던 때였는데 누더기 한 벌과 검정 고무신 하나, 지팡이 하나만 남기고 떠나신 스님의 청빈한 모습이 큰 감동을 줬다"면서 "스님의 큰 마음을 온전히 담아서 세상에 전하지 못한 부족함을 늘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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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큰 별 성철 스님. 열반한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그는 불자들 사이에 생생히 살아 있는 스승이다.
"어떻게 남에게 속아보셨는지 늘 '남을 속이면 안된다'고 주의를 많이 주셨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도 속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심하고 3일도 못 지키는 사람은 자기에게 한 약속도 못 지키는 자라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상좌들이 참선하는 모습은 좋아했지만 '본사(本寺) 주지도 안 된다. 말사(末寺) 주지도 안 된다'며 상좌들이 행정직에 앉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셨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처럼 제자들에게 엄격한 스승이었지만 속 정이 깊고 자애로운 분이었다.
"스님의 따님인 불필(不必) 스님이 석남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스님께서 어느 날 절 부르시더니 '석남사에 갔다 와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왜 가야 합니까'라고 여쭸더니 '불필이 아는 스님이 죽었단다'라며 모래를 씻어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광명진언을 108번 외우신 뒤 그 모래를 불필 스님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평소 부인에 대해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을 뿐더러 출가 후에는 부인을 찾아가시지도, 찾아오지도 못하게 하셨는데 부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스님이 무섭기만 한 분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정도 있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택 스님은 또 성철 스님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1981년 6대 종정에 추대됐는데 그해 4월 초파일 법어를 내리시는데 어려운 한문으로 된 법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 법어로 하셔야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자식 건방지다'라고 하시며 화를 내시더니 며칠 뒤 '이러면 됐냐'며 한문 반, 한글 반인 법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머지 반도 한글로 해주시면 얼마나 좋은 법어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더니 '그 자식 신경 쓰이게 하는 놈'이라고 야단치시더니 하루 뒤 한글로 된 법어를 던져 주시며 '이제는 됐냐' 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생각이 유연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라면 내 주의, 내 주장을 잠시 접고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정신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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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zh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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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3-28 07: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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