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맏상좌 천제스님, 김광식 부천대 교수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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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29 조회17,472회 댓글0건본문
성철스님 맏상좌 천제스님, 김광식 부천대 교수 특별대담
“부처님 팔지 마라” 가르침 실천되고 있는지…
‘공주규약’통한 불교개혁…정화운동 이념 모태
2년만에 중단되었지만 제2 제3의 결사로 전파
불조교법 복구위한 철저한 수행정신 본받아야
불교의 중흥과 올곧은 수행에 대한 강렬한 정신에서 비롯된 1947년 봉암사 결사. 한국전쟁으로 2년만에 중도하차한 봉암사 결사는,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정신만은 오롯이 남아있다. 봉암사 결사가 미완성으로 끝난 뒤, 결사의 주체인 성철스님은 그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공주규약에서 제시한 불조교법의 복구를 위해 끊임없이 수행정진하며 대중들에게 설법했다. 본지는 봉암사 결사 이후 성철스님을 시봉했던 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를 만나, ‘봉암사 결사의 전개의 성격’을 주제로 논문을 쓴 김광식 부천대 교수와 함께 봉암사 결사의 의미와 관련 대담을 나눴다. 천제스님과 김 교수의 대담은 지난 2월28일 부산 해월정사에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천제스님: 1950년대 초반 열다섯살 나이로 큰스님(성철스님)을 모시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결사’다. 처음엔 ‘결사(決死)’로 알고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정진하라는 가르침으로 들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결사(結社)’라는 뜻으로 봉암사 정해년 결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스님은 복을 달라면서 절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도 늘 ‘업장이 소멸돼야 복이 온다’며 108참회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언제나 결사가 실천으로 이어져야 불교가 새모습으로 산다고 강조하셨다.
김광식: 천제스님께서는 당시 경남 통영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은 시봉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성철스님이 봉암사 결사 이후 고성 문수암, 부산 관음사 등 제반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천제굴로 거처를 옮기신 것으로 알고 있다.
스님: 고성 문수암에서 통영 방면으로 20리 정도 가면 백방산 안정사가 있다. 큰스님은 안정사 운부암에서 주석하셨고 이후 마산 성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셨다. 큰스님은 성주사에 머물면서 49재를 올리고 제비를 받고 산신각에서 불공을 하는 등 봉암사 결사에 위배되는 삿된 풍광을 목격하고 그 길로 보따리를 싸서 천제굴까지 오게 됐다. 천제굴은 처음엔 남루한 초가에 불과했다.
김: 봉암사 결사는 불조의 교법을 복구시키려는 원력에 의한 공주규약으로 대변된다. 공주규약은 부처님의 계법을 따르고 자급자족의 원칙수호 등의 자주성을 되찾고 의식을 재정비함으로써 승풍과 선풍을 회복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같은 규약의 이행은 철저한 수행의식을 다짐하고 있다. 특히 결사를 주동한 성철스님을 비롯한 많은 수좌스님들의 현실 극복의 정신이 주목된다. 또한 결사를 전개함에 있어 자주성이 유별하였고 수행의 청정성으로서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의 자립성과 계율의 준수 등은 고불고조의 유칙ㆍ교법이라는 분명한 구도 안에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다.
스님: 큰스님이 봉암사 결사 이후 남기신 메모를 보면 공주규약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큰스님이 메모한 친필에 따르면 ‘부처님을 팔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불법파멸의 근본적인 폐단이니, 복과 명을 구하는 무당들을 축원하는 행위는 단연코 일소하는 것이 과제고 목적’이라는 구절이 있다. 삼엄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닦아 원만 달성하라는 문구 역시 봉암사 결사에 이어서 큰스님이 늘상 강조하신 덕목이다.
김: 봉암사 결사는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큰스님 뿐만 아니라 결사에 참여한 많은 스님들에 의해 이어져왔다. 김룡사 해인사 등지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법회를 열고, 1960년대 중반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함께 연 실달학원 역시 인재결사를 시도한 좋은 예다.
스님: 큰스님은 봉암사 결사 이후에도 여러 차례 봉암사를 방문하셨다. 또 1967년 겨울 불교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법회를 연 이른바 백일법문을 비롯해서 백련암 바윗돌에서 시작한 일명 산상법회 등 결사의 정신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식민지불교를 극복하고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을 추진했던 봉암사 결사는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현대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봉암사 결사가 태동되기 시작한 당시에 청담스님은 종정인 한암스님을 찾아가 종단 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식민지 불교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앙 차원의 종단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성철스님은 종단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것 같다. 봉암사 결사의 주역 상당수가 정화운동에 가담했고 이후 종정이나 총무원장 율사 등도 정화의 주체이자 계승자인 것도 이와 상통한다. 다만 성철스님은 운동권적 정화에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스님: 폭력이 개입되는 정화는 종교적으로 맞지 않다고 본다. 이를 두고 큰스님은 생전에 ‘새 도적이 묵은 도적을 밀어내는 결과’라고 표현하셨다. 큰스님은 또 ‘지조를 지키지 않는 중은 기녀만 못하다’며 부처님의 일을 장사하듯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 봉암사 결사 역시 수행을 목적으로 정진하라는 내재적 의미가 핵심이다.
김: 봉암사 결사가 1947년 갑자기 시작되어 2년만에 끝났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성철스님은 이미 출가 이전부터 불교적 사상에 천착했고, 출가 후 3년만에 깨달음을 얻고 법납 10년만에 봉암사 결사를 꾸린 것이다. 이미 도반들과 공동수행의 원력을 다지면서 결사정신을 싹틔운지 오래고 결사는 봉암사에서 외부에 의해 중단됐을 뿐, 이미 제2 제3의 결사는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님: 그렇다. 큰스님은 공주규약에 명시된 내용을 수도없이 반복적으로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설법을 통해 제시했다. 무당행위 하지 말라 부처님 파는 사람도 사기꾼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언제나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이 지났지만 큰스님이 전해주신 정신은 남아있되, 현실에서 실천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60년이 흐른 지금, 전국의 사찰들이 자급자족의 원칙, 특별보시 거부, 축원 금지 등의 공주규약을 얼마나 수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선방 역시 규칙적인 노동 정규적인 포살 등의 규약이 지켜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김: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재해석하고 체득해서 그 정신을 밀고 나가야 한다. 결사 정신은 간데 없고 참선만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서 올곧은 수행의 터전과 향기를 남겨서 고유의 전통으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불교의 근본을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정리=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천제스님은…
15세에 성철스님 문하…봉훈관 불사 진행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5.6대 중앙종회의원과 종정예경실장 등을 역임했다. 15살 때인 지난 1953년 경남 통영 천제굴에서 정진중인 성철스님을 만나면서부터 스님의 제자가 되어 이후 수십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온 제자 중 한명인 스님은 지난 2004년부터 조계종 법규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는 부산 해월정사 주지로 있으며,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의 봉훈관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광식 교수는…
한국불교 연구서 여러권…만해평전도 펴내
건국대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수료, 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ㆍ전시부장 역임. 현재 부천대 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는 〈고려무인정권과 불교계〉 〈한국근현대불교사 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우리가 살아온 한국불교 100년〉 〈새불교운동의 전개〉 〈용성〉 〈만해 한용운 평전-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등이 있다.
[불교신문 2307호/ 3월7일자]
2007-03-03 오전 11:25:32 / 송고
“부처님 팔지 마라” 가르침 실천되고 있는지…
‘공주규약’통한 불교개혁…정화운동 이념 모태
2년만에 중단되었지만 제2 제3의 결사로 전파
불조교법 복구위한 철저한 수행정신 본받아야
불교의 중흥과 올곧은 수행에 대한 강렬한 정신에서 비롯된 1947년 봉암사 결사. 한국전쟁으로 2년만에 중도하차한 봉암사 결사는,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정신만은 오롯이 남아있다. 봉암사 결사가 미완성으로 끝난 뒤, 결사의 주체인 성철스님은 그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공주규약에서 제시한 불조교법의 복구를 위해 끊임없이 수행정진하며 대중들에게 설법했다. 본지는 봉암사 결사 이후 성철스님을 시봉했던 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를 만나, ‘봉암사 결사의 전개의 성격’을 주제로 논문을 쓴 김광식 부천대 교수와 함께 봉암사 결사의 의미와 관련 대담을 나눴다. 천제스님과 김 교수의 대담은 지난 2월28일 부산 해월정사에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천제스님: 1950년대 초반 열다섯살 나이로 큰스님(성철스님)을 모시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결사’다. 처음엔 ‘결사(決死)’로 알고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정진하라는 가르침으로 들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결사(結社)’라는 뜻으로 봉암사 정해년 결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스님은 복을 달라면서 절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도 늘 ‘업장이 소멸돼야 복이 온다’며 108참회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언제나 결사가 실천으로 이어져야 불교가 새모습으로 산다고 강조하셨다.
김광식: 천제스님께서는 당시 경남 통영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은 시봉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성철스님이 봉암사 결사 이후 고성 문수암, 부산 관음사 등 제반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천제굴로 거처를 옮기신 것으로 알고 있다.
스님: 고성 문수암에서 통영 방면으로 20리 정도 가면 백방산 안정사가 있다. 큰스님은 안정사 운부암에서 주석하셨고 이후 마산 성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셨다. 큰스님은 성주사에 머물면서 49재를 올리고 제비를 받고 산신각에서 불공을 하는 등 봉암사 결사에 위배되는 삿된 풍광을 목격하고 그 길로 보따리를 싸서 천제굴까지 오게 됐다. 천제굴은 처음엔 남루한 초가에 불과했다.
김: 봉암사 결사는 불조의 교법을 복구시키려는 원력에 의한 공주규약으로 대변된다. 공주규약은 부처님의 계법을 따르고 자급자족의 원칙수호 등의 자주성을 되찾고 의식을 재정비함으로써 승풍과 선풍을 회복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같은 규약의 이행은 철저한 수행의식을 다짐하고 있다. 특히 결사를 주동한 성철스님을 비롯한 많은 수좌스님들의 현실 극복의 정신이 주목된다. 또한 결사를 전개함에 있어 자주성이 유별하였고 수행의 청정성으로서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의 자립성과 계율의 준수 등은 고불고조의 유칙ㆍ교법이라는 분명한 구도 안에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다.
스님: 큰스님이 봉암사 결사 이후 남기신 메모를 보면 공주규약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큰스님이 메모한 친필에 따르면 ‘부처님을 팔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불법파멸의 근본적인 폐단이니, 복과 명을 구하는 무당들을 축원하는 행위는 단연코 일소하는 것이 과제고 목적’이라는 구절이 있다. 삼엄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닦아 원만 달성하라는 문구 역시 봉암사 결사에 이어서 큰스님이 늘상 강조하신 덕목이다.
김: 봉암사 결사는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큰스님 뿐만 아니라 결사에 참여한 많은 스님들에 의해 이어져왔다. 김룡사 해인사 등지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법회를 열고, 1960년대 중반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함께 연 실달학원 역시 인재결사를 시도한 좋은 예다.
스님: 큰스님은 봉암사 결사 이후에도 여러 차례 봉암사를 방문하셨다. 또 1967년 겨울 불교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법회를 연 이른바 백일법문을 비롯해서 백련암 바윗돌에서 시작한 일명 산상법회 등 결사의 정신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식민지불교를 극복하고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을 추진했던 봉암사 결사는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현대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봉암사 결사가 태동되기 시작한 당시에 청담스님은 종정인 한암스님을 찾아가 종단 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식민지 불교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앙 차원의 종단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성철스님은 종단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것 같다. 봉암사 결사의 주역 상당수가 정화운동에 가담했고 이후 종정이나 총무원장 율사 등도 정화의 주체이자 계승자인 것도 이와 상통한다. 다만 성철스님은 운동권적 정화에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스님: 폭력이 개입되는 정화는 종교적으로 맞지 않다고 본다. 이를 두고 큰스님은 생전에 ‘새 도적이 묵은 도적을 밀어내는 결과’라고 표현하셨다. 큰스님은 또 ‘지조를 지키지 않는 중은 기녀만 못하다’며 부처님의 일을 장사하듯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 봉암사 결사 역시 수행을 목적으로 정진하라는 내재적 의미가 핵심이다.
김: 봉암사 결사가 1947년 갑자기 시작되어 2년만에 끝났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성철스님은 이미 출가 이전부터 불교적 사상에 천착했고, 출가 후 3년만에 깨달음을 얻고 법납 10년만에 봉암사 결사를 꾸린 것이다. 이미 도반들과 공동수행의 원력을 다지면서 결사정신을 싹틔운지 오래고 결사는 봉암사에서 외부에 의해 중단됐을 뿐, 이미 제2 제3의 결사는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님: 그렇다. 큰스님은 공주규약에 명시된 내용을 수도없이 반복적으로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설법을 통해 제시했다. 무당행위 하지 말라 부처님 파는 사람도 사기꾼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언제나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이 지났지만 큰스님이 전해주신 정신은 남아있되, 현실에서 실천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60년이 흐른 지금, 전국의 사찰들이 자급자족의 원칙, 특별보시 거부, 축원 금지 등의 공주규약을 얼마나 수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선방 역시 규칙적인 노동 정규적인 포살 등의 규약이 지켜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김: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재해석하고 체득해서 그 정신을 밀고 나가야 한다. 결사 정신은 간데 없고 참선만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서 올곧은 수행의 터전과 향기를 남겨서 고유의 전통으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불교의 근본을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정리=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천제스님은…
15세에 성철스님 문하…봉훈관 불사 진행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5.6대 중앙종회의원과 종정예경실장 등을 역임했다. 15살 때인 지난 1953년 경남 통영 천제굴에서 정진중인 성철스님을 만나면서부터 스님의 제자가 되어 이후 수십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온 제자 중 한명인 스님은 지난 2004년부터 조계종 법규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는 부산 해월정사 주지로 있으며,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의 봉훈관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광식 교수는…
한국불교 연구서 여러권…만해평전도 펴내
건국대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수료, 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ㆍ전시부장 역임. 현재 부천대 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는 〈고려무인정권과 불교계〉 〈한국근현대불교사 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우리가 살아온 한국불교 100년〉 〈새불교운동의 전개〉 〈용성〉 〈만해 한용운 평전-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등이 있다.
[불교신문 2307호/ 3월7일자]
2007-03-03 오전 11:25:32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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