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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세조의 불교 신앙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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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3:01  /   조회1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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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27명의 국왕 가운데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가장 깊었던 임금은 세조라 할 수 있다. 국왕이 되기 전에 이미 김수온과 함께 부처님의 일대기와 설법들을 모아 언해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한 바 있었고, 즉위한 이후에는 『석보상절』에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또 1461년(세조 7)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49종의 한문 불서와 11종의 언해 불서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불교 신앙이 『실록』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세조가 국왕으로서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내린 첫 번째 명령은 즉위 후 1년이 지나서였다. 임금의 허락이나 명령 없이 사찰을 수색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형조에 명하기를, “죄인을 수색 체포할 때에 비록 수행하는 산방山房이나 작은 사찰도 샅샅이 수색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데, 이제부터는 서울의 해당 관청에서 만일 수색하여 체포할 일이 있으면 임금의 허락을 받아 시행하고,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은 임금의 명령 없이는 산사山寺를 수색하는 일을 일체 금지하게 하라.” 하였다. 

- 『세조실록』 2년, 1456년 3월 9일.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이었기에 국가의 주요한 결정을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난을 다스린다’는 뜻의 ‘정난靖難’이라는 이름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즉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집현전의 많은 대신들은 세조의 즉위를 정난이 아니라 ‘왕위 찬탈’이라 여겼다. 이른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이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 환영연이 열리는 날에 거사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세조는 수륙재를 거행하였다.

 

사진 1. 『월인석보』 권7, 8. 사진: 국가유산청.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 내 불행히 둔난屯難의 비운非運을 만나 살육殺戮한 자가 많았는데, 형벌로 죽은 혼들이 기식寄食할 곳이 없이 길이 고도苦途에 빠진 것을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또 온 경내境內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귀신도 또한 많을 것이니, 제도諸道의 깨끗한 곳에다 봄·가을로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궁한 혼魂들을 도액度厄하게 하라.” 하였다. 

- 『세조실록』 2년, 1456년 7월 26일.

 

세조는 즉위 3년에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불교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내놓는다. 그 주된 내용은 승려 도첩, 사찰 잡역, 부녀의 상사上寺 등이었다. 고려시대 이래 사찰은 국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아 토지세를 거두는 권한인 수조권收租權을 받거나 조세를 면제받았지만 공납만큼은 면제받지 못하였다. 사찰에서 생산하는 종이·된장·잣 등을 관아에 납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전丁錢을 납부하고 도첩度牒(승려 자격증)을 받은 승려들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지만 담당 관청이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조는 사찰의 공납을 완화해 주고 승려의 도첩제를 유연하게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승려와 속인에게 이익도 없고 범람汎濫함이 매우 심하니,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부녀들이 절에 올라가서 승려와 만나는 행위가 유교적 가치관으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 부녀婦女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한다. ―. 비구니가 절에 올라가는 것을 허가한다. ―. 관리와 유생은 절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되, 만약 죄를 범한 승려를 조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리가 절에 올라간다. … ―. 정전을 납부하고 도첩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담당 관청이 지체하지 말고 발급하라. ―. 사사寺社의 잡역은 공부貢賦 이외는 일체 면제한다. …”  

- 『세조실록』 3년, 1457년 3월 23일.

 

세조는 불교를 신앙하였지만 태종 대부터 세종 대까지 이루어졌던 여러 억불정책을 복원시키지는 않았다. 가령 태종~세종 대를 거치며 11개 종파가 선종과 교종으로 축소되었으나 그대로 두었고, 세종 대에 폐지된 승록사僧錄司(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중앙관청)를 복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관청에서 사찰이나 승려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없도록 관리하였을 뿐이다. 세조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승려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었던 것 같다. 승려를 정화하는 일에는 단호하였다. 특히 아내가 있는 대처승에 대해서는 회유의 대상이 아니라 환속시켜 국가의 신역에 복무시켜야 할 양민이라 여겼다.

 

선종과 교종의 양종에 명하기를, “승도로서 권선문을 위조하여 가지고 저잣거리와 관청을 다니면서 재물을 요구하면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 어두운 밤중에 민가를 출입하며 아내를 얻어 파계하는 자, 도적들과 작당하여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가 있으면 서울에서는 양종에서 검거하고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해서 추국推鞫하고, 지방에서는 양종에 소속된 사찰에서 문서로 갖추어 고을 관청에 고하여 추국해서 계문하라. …” 하였다. 

- 『세조실록』 4년, 1458년 12월 18일.

 

고려시대 이래 노비들 가운데 출가하는 자가 많았다. 노비로서 살아가기보다 출가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존중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로서는 그들의 출가를 원하는 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비의 출가는 좀 더 엄격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관아에서 일하는 공公노비는 경전을 외울 수 있는지 확인한 후에 출가를 허락하도록 하고, 사私노비는 그 주인의 요청이 있어야 출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방의 공公노비들 가운데 힘든 일을 피하려고 제 마음대로 삭발하여 출가하는 자가 자못 많으니, 이후로는 승려 되기를 원하는 자는 그 스승이 양종에 고하고, 양종에서는 여러 불교 경전으로 시험을 봐서 그들이 경전을 외우고 그 심행心行이 취할 만한지 확인한 후에 사유를 갖추어서 예조에 보고하게 하며, 예조에서 임금께 아뢰고 허락받은 후에 출가를 허락하게 하소서. 사노비의 경우에는 주인의 허락을 따르도록 하소서. 이러한 방식으로 도첩을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조실록』 6년, 1460년 7월 4일.

 

고려 말에 16세 이상 남성에 대해 호패법을 실시하여 이어지다가 조선 태종 대에 폐지된 적이 있었다. 이때 승려에 대해서는 호패를 시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세조 대에 호패법을 부활하면서 승려에 대해서도 호패를 갖추도록 했다. 이 호패법은 성종 대에 다시 폐지되었는데, 당시 세조는 호패제도를 통해 양인의 국역을 파악하고, 또 승려들에게도 일정한 국역을 부과하기 위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 2. 호패. 사진: 국가유산청.

 

임금이 우찬성 구치관과 병조참판 김국광에게 묻기를, “승려의 호패號牌를 자세히 조사하기가 어려우니, 내 생각으로는, 서울에는 양종으로 하여금 출가한 사찰과 승려의 생김새를 기록하여 해당 관청에 보고하게 하고, 지방은 여러 산의 중심이 되는 사찰로 하여금 승려를 기록하여 그 고을에 고하면 고을에서 도장을 찍어 주도록 하고, 만일 도첩에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호패를 주지 말고 가려내어 환속시키려고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 『세조실록』 7년, 1461년 8월 12일.

 

세조는 승려를 정화하기 위해 몇 차례 유시諭示를 내렸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의정부에 다시 문서를 내려 승려 가운데 죄를 지은 이가 있으면 감옥에 가둔 후에 보고하도록 하고, 물건을 훔치거나 아내가 있다는 증거가 분명한 경우에도 먼저 감옥에 가두고 보고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승려를 우대했던 고려시대의 유풍이 남아 있어서 지방 관아에서 함부로 죄를 지은 승려들을 잡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승려가 큰 죄를 지었더라도 다만 붙잡았다가 보증을 받고 석방하였을 뿐이고 감옥에 가둘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승려들이 비록 큰 죄를 지었더라도 거의 대개가 도망하여 죄를 면하고, 주와 현에서 구속할 수가 없었으므로, 평민들이 그들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였었다. 심지어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법을 어길 목적으로 머리를 깎고 나쁜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기를, “승려로서 사람이나 말을 살해한 증거가 나타난 자, 훔친 물건이라는 증거가 드러난 자, 처자를 거느린 증거가 나타난 자, 간통하는 현장에서 체포된 자는 먼저 가두고 임금에게 아뢴 후에 죄를 주라.” 하였다. 이 명령이 내려지자,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으나, 승려들은 오랜 인습에 젖어서 그 형세가 오히려 심해지니, 주와 현에서 겁을 내어 임금의 명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 『세조실록』 10년, 1464년 4월 3일.

 

군역을 피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양인이나 천인이 줄어들지 않았다. 고려시대 이래 출가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들을 제지할 만한 국가적 제도도 아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담당 관청에서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하더라도 승려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여 승려로서의 자격이 없다면 환속시키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보인保人(군인의 경제를 지원하는 사람)이라도 되게 하였다.

 

사진 3. 원각사탑. 사진: 국가유산청.

 

병조에서 군적軍籍을 담당하는 관리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정축년(1457) 10월 이후에 승려가 되고서 1년이 지났어도 도첩이 없는 자는 모두 보인이 되게 하소서. 지금 군적을 조사해 보니 군역을 피하여 승려 된 자가 자못 많습니다. 승려 중에 비록 1년이 되지 못했더라도 심행心行이 있고 경전을 잘 외우는 자 외에는, 청컨대 모두 보인이 되게 하고, 아울러 다른 지역에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조실록』 11년, 1465년 2월 2일.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금강산이나 오대산 등 명산대찰의 수리를 명하는 등 여러 불사를 하였는데, 그런 가운데 원각사 건립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464년(세조 10)에 회암사 원각법회에서 여래 현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도성 내 흥복사터에 원각사를 창건하기로 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1467년 원각사탑이 완성되자 사월초파일에 연등회를 베풀어 낙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3일이 지난 4월 11일에 신하들이 원각사에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세조는 대대적인 방면과 상을 주었다. 

 

백관이 원각사에서 꽃비가 내리고 사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이변이 있었다며 문서를 갖추어 올려 축하하였다. 세조는 비가 내리므로 공사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교지를 내려서 강도·절도 및 남형관리濫刑官吏 외에 유형流刑 이하의 죄를 사면하여 주고, 모반에 연루된 도적과 남형관리 외에 도형徒刑과 유형을 받고 있는 자들을 모두 방면하였으며, 고신告身을 거둔 자는 돌려주게 하고, 자급이 강등된 자는 그 자급을 회복하여 주고, 배[船]를 부서지게 해서 세공稅貢을 흠축낸 것과 목장의 소와 말이 병들어 죽은 것은 징수하지 말게 하며,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1자급씩을 더하여 주게 하였다. 

- 『세조실록』 13년, 1467년 4월 11일.

 

세조의 불교 신앙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위에서 『실록』에 나타난 세조의 불교 관련 주요한 명령들을 살펴보았다. 사찰의 잡역을 감해 주고 수행하는 승려를 보호해 주고자 한 세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승려, 처자를 거느린 승려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태종~세종 대 있었던 억불정책을 되돌리지 않은 것도 확인하였다. 아마도 세조 역시 고려시대처럼 중앙에 불교 권력이 활개치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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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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