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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행行(saṅkhāra)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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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3:05  /   조회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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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 설법에서 말하는 ‘무명–행–식’의 ‘상호 조건적 발생과 소멸’(연기)이 지니는 의미를 몇 회에 걸쳐 음미한다. ‘지금 여기의 삶과 세상’에 입각하여 행行(saṅkhāra)의 의미를 성찰하여 열반과 깨달음에 대한 시선을 조율해 보려는 것이다. 그 길라잡이로서, 12연기에서 설하는 〈‘무명–행–식’의 상호 조건적 발생·소멸〉과 〈팔정도 정견·정사〉의 상호연관 구조를 먼저 확인한다. 

 

길라잡이 : 12연기의 ‘무명-행-식’과 팔정도의 상호연관 구조

 

사성제는 두 항씩 상반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삶의 괴로움에 관한 진리’(고제苦諦)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진리’(멸제滅諦)〉가 한 쌍이고, 〈‘괴로움의 발생 원인에 관한 진리’(집제集諦)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도제道諦)〉가 다른 한 쌍이다. 즉 ‘삶의 괴로움[苦]’에 대한 치유적 대안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滅]’이고, ‘괴로움의 발생 원인[集]’에 대한 치유적 대안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인 팔정도다.

 

‘괴로움의 발생 원인에 관한 진리[集諦]’인 12연기 설법에서는, 무명을 ‘사성제에 대한 무지(aññāṇa)’(주1)라고 하면서, “무명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을 조건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발생하고 …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고,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을 조건으로 삼는) 알음알이[識]가 소멸하고 …”(주2)라고 설한다. 그런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道諦]’인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正見(sammā diṭṭhi) 설법에서는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참된 앎(ñāṇaṁ)’(주3)이라고 설한다. 또한 팔정도의 두 번째인 정사正思(samma saṅkappa)에서 말하는 ‘saṅkappa’는 ‘의도’를 지칭하고 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aññāṇa)인 무명’은 팔정도 정견正見(sammā diṭṭhi)으로,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行, saṅkhāra)’은 팔정도 정사正思(samma saṅkappa)로 치유하여 대체하고 있다.

 

사진 1. 부처님의 사리를 얻지 못하고 텅 빈 코끼를 타고 가는 사람들. 사진: 서재영(수투파의 숲).

 

〈붓다는 모든 이해와 의도 및 사유를 부정 및 소멸의 대상으로 설하는 것이 아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관점·이해(aññāṇa)’를 ‘지혜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관점·이해(正見)’로, ‘무명에 매인 관점·이해에 의거한 의도(行, saṅkhāra)’를 ‘지혜로운 관점·이해에 의거한 의도(正思)’로, ‘무명에 매인 이해·관점에 의한 의도에 따라 펼치는 사유(分別識, 不如理作意)’를 ‘지혜로운 이해·관점에 의한 의도에 따라 펼치는 사유(無分別識, 如理作意)’로 바꾸라는 것이다.〉 - 사성제를 비롯한 붓다의 설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목要目이다. 이하의 글들을 읽을 때 염두에 두시길 바란다. ‘관점과 이해’·‘의도 작용’·‘사유와 인식’의 발생 조건을,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근본 무지’(무명)에서 ‘사실 그대로 보는 지혜’로 바꾸어, 이 세 가지가 상호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 해탈 수행의 요목이다. ‘괄호치고 빠져나와, 갇히지 않고 만나는 마음 국면(正知, sampajānāti)’을 수립하는 수행(팔정도 정념 수행)은 그 근원적 역할을 담당한다.(주4)

 

saṅkhāra(行)는 ‘무명에 매인 중생의 의도 작용’이다

 

행行의 원어인 saṅkhāra라는 용어는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말을 한역漢譯할 때 ‘행行’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때의 ‘행行’은 한국어 한자에서 통용되는 〈간다,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한다, 하다〉의 뜻이다. 중국어에서의 원래 의미도 그러하다. 이때 saṁ(함께)이라는 접두사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kṛ(행하다)의 내용이 결정된다. 이에 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지만, ‘중생의 의도 작용(saṅkhāra)’을 지칭하는 경우, saṁ(함께)이라는 접두사는 ‘근본무지와 함께’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식(識/識別, 식에 의한 개념적 구별)은, 대상에 대한 인지·판단·비교·평가·기억·예상·추론 등을 수행하는 ‘사유 작용’이다. 인간 특유의 언어능력은 감관을 통해 만나는 모든 대상을 언어 그릇에 담아 개념으로 인지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의 사유 작용은 ‘개념을 통한 인식 작용’이다. 니까야를 비롯한 경론에서는 이 ‘개념을 통한 인식 작용’을 식별識別이라 일컫는다. ‘식에 의한 개념적 구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유는 ‘다양한 내용을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작용’이다. 그렇다면 사유 작용은 어떻게 다양한 내용을 형성하는 것일까?

 

식識은 상대방에 대해 〈좋은 사람이다〉라 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다〉라 할 수도 있다. 식이 이러한 판단·평가의 사유 작용을 하려면, ‘판단 및 평가와 관련된 여러 요소’ 가운데 〈좋다〉거나 〈나쁘다〉라는 판단·평가를 생겨나게 하는 요소들에 마음 시선을 기울여 ‘선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개인적 잣대, 자기 이익과의 관련, 사회적 인습, 상대에 대한 과거의 기억 등 여러 요인 가운데,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판단·평가할 수 있는 조건들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선택해야 한다. 

 

이처럼 사유 작용에는 ‘사유 내용을 결정하는 조건들의 선택’이 선행된다. ‘사유의 구체적 내용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을 선택하는 마음 작용’이 선행하는 것이다. 이 마음 작용이 ‘의도’다. 〈특정한 사유 내용을 성립하는 조건들을 선택하는 ‘마음의 초점 맞추기’〉가 ‘의도 작용’이다. 특정한 조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선택하는 의도 작용은 순식간에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선 수행을 하면 물에 비친 영상처럼 감지된다.

 

12연기에서는 “(무명에 매인) 행을 조건으로 식이 발생한다.”라고 한다. 중생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은 행行(saṅkhāra)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行은 ‘무명에 매인 중생의 의도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식 현상을 발생시키는 조건에 대한 성찰’, 즉 ‘식에 관한 연기적 성찰’에 부합한다.

 

식 작용이 구체적 내용을 형성하려면 의도 작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의도는 식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하는 ‘조건 선택 작용’이다. 인간 인식 작용의 중심축은 식識이고, 식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의도 작용이다. 어떤 의도 작용으로 어떤 내용의 식識을 가꾸어 가느냐에 따라, 인간과 세상의 내용 및 전망이 갈라진다. 해탈 인간과 중생 인간의 차이도, 의도 작용과 식識 내용의 차이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의도’를 지칭하는 붓다의 다양한 언어 용법 - 연기적 사유의 언어적 적용

 

붓다는 ‘중생의 의도 작용’도 그 작용의 매개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한다. ‘몸을 매개로 삼는 의도 작용[身行]’, ‘말을 매개로 삼는 의도 작용[口行]’, ‘마음을 매개로 삼는 의도 작용[意行]’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의도 작용들[行]인가? 비구들이여, 세 가지 의도 작용이 있나니, 몸의 의도 작용, 말의 의도 작용, 마음의 의도 작용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의도 작용들이라 한다.”(주5)

 

니까야에서는 ‘saṅkhāra(行)’와 ‘cetanā’(한역에서는 思) 및 ‘saṅkappa’(한역에서는 思)라는 용어들이 모두 ‘의도’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 용어는 모두 ‘의도와 관련한 현상’을 지칭하지만, 설법의 내용과 맥락에 따라 다른 표현이 채택되고 있다. ‘무명에 매인 중생의 의도 작용’을 지칭하는 saṅkhāra(行)는 ⅰ) 12연기에서 ‘무명-행-식의 연기적 발생과 소멸’을 설하는 경우, ⅱ) 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ṅkhārā aniccā)·제행개고諸行皆苦(一切皆苦, sabbe saṅkhārā dukkhā) 설법의 경우, ⅲ) 오온 가운데 행온行蘊(saṅkhāra-kkhandha), ⅳ) 신행身行·구행口行·의행意行의 경우가 대표적 용례다.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의 ‘saṅkhāra(行)’를 ‘의도와 무관한 모든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많지만, 필자는 이 역시 ‘의도와 관련되어 생겨난 현상’으로 본다. 인간에게 무상無常과 고苦는 결국 감관에 올려진 현상에 관한 것이며, 감관을 매개로 한 인간의 모든 경험은 예외 없이 ‘의도’에 연루되어 있다. ‘제행무상과 제행개고’, ‘유위법(saṅkhata-dhamma)과 무위법(asaṅkhata-dhamma)’에서 ‘중생의 의도 작용(行, saṅkhāra)’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중생의 세계 경험이 ‘무명에 매인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식에 의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진 2. 선정에 든 수행자(AI로 구현한 가상 이미지).

 

만약 ‘saṅkhāra(行)’를 ‘의도와 무관한 모든 형성된 것’으로 본다면, 괴로움[苦]에서의 출구를 ‘변하는 모든 형성의 그침’에서 구하려는 것이 된다. 이런 시선은 염세와 허무주의의 덫에 걸려들기 쉽다. 생명과 우주는 그 자체가 ‘관계와 변화 속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행行의 그침을 ‘형성된 모든 것의 그침’으로 간주하면, 붓다가 경고하는 ‘아무것도 없음에 기우는 견해(斷見)’가 된다.

 

〈모든 것의 형성을 그쳐 윤회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성취한다〉라고 말한다면, 듣기에는 거창한 목표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단견 허무주의의 공허한 무지다. 이는 상견常見(항상 있음에 기우는 견해) 불멸주의와 한 쌍인 무지로서, ‘현상에 대한 연기적 이해(緣起觀)’가 아니다. 연기적 사유는, ‘어떤 조건에 따라 생겨나는 의도 작용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行, saṅkhāra)’라면, 그에 따라 이루어진 식이 경험하는 변화의 세계는 괴로움[苦]을 일으킨다. ‘무명을 조건으로 삼는 의도’, 다시 말해 ‘동일성 관념에 매인 의도’(주6)로써 식 작용을 일으켜 변화를 대하면, 고통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一切皆苦) 설법의 핵심 의미라고 생각한다.

 

‘saṅkappa’는 팔정도 수행의 두 번째 항목인 정사正思(samma saṅkappa)에서 사용된다. 따라서 ‘해탈 수행 맥락에서의 의도’를 지칭하고 있다. ‘무명에 매인 의도 작용들’을 치유하여 ‘지혜와 함께하는 의도 작용들’로 바꾸는 맥락에서 ‘의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의도는 그 내용을 생겨나게 하는 조건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라는 연기적 사유에 따라, 같은 ‘의도’라는 말도 ‘무지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는 ‘saṅkhāra’,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는 ‘saṅkappa’라고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니까야 경전에서 이 saṅkappa는 vitakka(尋, 일으킨 생각)와 동의어로 나타난다. 이 점은 〈‘지혜를 조건으로 삼는 의도’(samma saṅkappa, vitakka)와 사유(vicāra, 伺, 識)의 상호 관계〉 및 선 수행, 특히 사선四禪의 내용을 음미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한다.(주7)

 

붓다는 같은 뜻의 용어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같은 뜻의 용어라도 맥락에 따라 달리 표현하고, 다양한 접두사를 붙여 의미맥락에 접근하는 문을 열어주고 있다. ‘연기적 사유의 언어적 적용’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따라서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조건들’ 및 ‘조건과 현상의 인과적 연관’을 성찰하라.〉 - 누차 언급하지만, 필자는 연기법이 설하는 ‘연기적 사유의 핵심’을 이렇게 이해한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적 사유를 그의 언어와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설법과 행보를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간과했던 의미들이 속속 포착된다. 붓다의 위대함, 붓다 교설의 가치가 새롭게 읽힌다. 

 

<각주>

(주1) 『상윳따 니까야』 「분석 경(Vibhaṅga-sutta)」(S12:2)/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10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무명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aññāṇa),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에 대한 무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명이라 한다.”

(주2) 『상윳따 니까야』 「연기 경(Paṭiccasamuppāda-sutta)(S12:1)/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85〜91; 「분석 경(Vibhaṅga-sutta)」(S12:2)/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2권, pp.92〜103. 필자가 번역문의 ‘의도적 행위들[行]’을 ‘의도 작용들[行]’로 고치고 괄호 내용을 삽입하였다.

(주3)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D22).

(주4) 이 문제는 ‘붓다의 선’을 다루는 글에서 상세히 거론할 것이다.

(주5) 『상윳따 니까야』 「분석 경(Vibhaṅga-sutta)」(S12:2)/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2권, pp.100〜101. 번역문의 ‘의도적 행위들[行]’을 필자가 ‘의도 작용들[行]’로 수정하였다.

(주6) 필자는 무명을 ‘동일성 관념에 의거한 관점 무지들’이라고 본다. 다른 글에서 다시 상론한다. 

(주7) ‘선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룰 때 자세히 음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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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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