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땅에서 넘어지다 땅을 짚고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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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5 년 4 월 [통권 제2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79회 / 댓글0건본문
선종은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에 열광하다
서울 안암동 개운사의 대원암에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인연으로 인하여 자주 들르게 된다. 마당 한편에 ‘탄허(呑虛, 1913~1983) 스님께서 『화엄경합론』을 번역하신 곳’이라는 글씨가 스테인레스로 만든 사각형 말목에 적혀 있다. 『화엄경합론』은 『화엄경』 원문에 징관(澄觀, 738~839) 스님의 소(疏)와 통현(通玄, 634~730) 장자의 논(論)을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편집한 역작이다.
징관 스님의 화엄설법은 청량한 바람처럼 시원하다고 하여 ‘청량(淸凉) 대사’로 칭했고, 통현 장자는 10여 년 동안 대추와 잣만을 발우에 담아 먹으면서 이 책을 저술한 인연으로 ‘조백(棗栢) 대사’로 불렸다. 선가에서는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이 더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양이 만만찮은지라 고려의 지눌(知訥, 1158~1210) 선사는 이 책을 추려 『화엄론절요』를 펴내기도 했다.
지눌 선사는 『신화엄론』을 좋아하다
지눌 선사는 1190년 ‘정혜결사문’을 남겼다. 그 글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첫 구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언이다. 이 문장을 대중화시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공문(恭聞)하노니
인(人)이 인지이도자(因地而倒者)는 인지이기(因地而起)라 하니
이지구기(離地求起)는 무유시처야(無有是處也)로다
공손히 듣자오니
사람은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는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땅을 떠나서 일어나길 구한다는 것은 옳지 않도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하늘아래 새것이란 없다. 서두의 ‘공손히 듣자오니’에서 보듯 인용한 글이다.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 권14(대정장36 p812b)에 나온다. 『화엄경』 권12 「여래명호품」에 대한 논(論)이다. 그 원문은 아래와 같다
여인(如人) 인지이도(因地而倒) 인지이기(因地而起)
사람이 땅으로 인하여 넘어졌으니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야 하는 것과 같다
『보림전』에도 인용되다
혜거(慧炬) 스님이 801년 편집한 『보림전』 권2 ‘우바국다’조(條)에서 비슷한 게송을 발견했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정혜결사문’을 떠올렸고 ‘정혜결사문’을 찾다보니 『신화엄론』까지 추적하게 된 것이다. “공부하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하며 회심의 미소를 덤으로 얻었다.
약인지도(若因地倒) 환인지기(還因地起)
약무기지(若無其地) 종무소리(終無所履)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리라.
만일 그 땅이 없다면 마침내 발 디딜 곳도 없으리니.
장남 만한 차남은 없다
문헌의 성립 순서대로 “땅에서 넘어지다. 땅을 짚고 일어나다.”는 원문을 열거해 보겠다. 통현 장자는 “인지이도(因地而倒) 인지이기(因地而起)”라 했다. 혜거 스님은 “약인지도(若因地倒) 환인지기(還因地起)”라고 변용했다. 지눌 스님은 “인지이도자(因地而倒者) 인지이기(因地而起)”라고 바꾸었다. 가장 좋은 문장은 가장 간결한 문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통현 장자 글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게다가 원조다.
그래서 장남 만한 차남은 없다고 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넘어진 것도 내가 넘어진 것이고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일어나는 것이다. 땅은 아무 잘못이 없다. 땅은 넘어지라고 하거나 혹은 일어나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생은 늘 핑계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괜히 애꿎은 땅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무엇이건 원인을 제대로 찾아내야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대로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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