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백천명 가운데 누가 진짜 내 아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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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6 년 6 월 [통권 제3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144회 / 댓글0건본문
학을 제자로 거느리다
해인사 큰법당 바깥쪽 벽화그림 속에서 학륵나존자를 처음 만났다. 5백 마리 학(鶴)을 제자 삼아 정진했다는 특이한 장면을 묘사했다. 허공세계에서 축생의 몸을 가진 학마저도 구제했노라고 관광객 안내를 위한 책자인 『벽화 이야기』에 적혀 있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날짐승까지 교화할 수 있는 법력의 소유자로 칭송한 것이다. 전체 불교역사 속에서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성인 가운데 그렇게 유명하다고 할 순 없지만 ‘학’이 주는 이미지가 이름에 중첩된 흔치 않은 법명을 가진 인물이라 하겠다. 선종 역사책에서 문자로 만나기 전에 먼저 그림으로 만난 셈이다.
학륵나 존자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
선종 제23조로 자리매김한 학륵나 존자의 태몽이야기도 『보림전』에 수록되어 있다. 수미산 위에서 한 동자가 손에 옥가락지를 쥐고서 “제가 올 것입니다.”(『보림전』 권5)라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전한다. 뭔가 남보다 다른 사람은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난다고 했다. 강릉 오죽헌의 몽룡실(夢龍室)은 신사임당 꿈에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품에 안기면서 율곡선생을 낳았다는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자장 율사나 원효 스님도 별이 모친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승들의 비문행장에는 태몽이 빠지지 않는다고 이능화 선생은 『조선여속고』에서 기술했다. 원조고승인 부처님의 탄생에도 꿈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오는’ 꿈이다.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이라는 팔상도의 제1번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교태몽의 역사는 부처님 역사와 궤를 함께 하고 있다.
꽃과 전단향을 바치다
『보림전』에는 학에 대한 『벽화이야기』 설명처럼 장황한 이야기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의 무리가 감동하여 꽃을 물고 와서 존자께 바쳤다는 짤막한 서술만 남겼다. 새가 꽃을 공양한 것은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8) 선사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감화력의 근원은 수행력과 함께 복력도 한 몫 했다. 어릴 때 존자는 전단향을 잘 캐는 소년이었다. 어느 날 절에서 일만금의 대규모 종을 주조하였다. 그런데 그 종을 칠 수 있는 망치가 준비되지 않았다. 아무리 크고 잘 생긴 종이라고 할지라도 두드릴 망치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맷돌의 손잡이인 어처구니가 없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관용어로 굳어질 만큼 황당한 경우를 대변한다. 소년은 자기가 힘들게 얻은 전단향 나무로 아낌없이 종 망치를 만들어 보시했다. 적지 않은 복을 지은 것이다.
자비심으로 백천의 몸을 나투다
태몽 후 학륵나 존자는 열 달 만에 태어났다. 한낮인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에서 황금이 솟아나 길 위에 가득했다. 이런 신비한 현상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결국 왕궁까지 전해졌다. 왕은 나라의 보배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궁궐로 데리고 왔다. 평범한 집안출신의 입장에선 신분 상승이라는 축복이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 부모와 생이별하는 고통이기도 했다.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궁녀에게 맡겨졌다. 궁녀의 숫자는 백천 명이었다. 아이를 본 궁녀마다 자기가 기르겠다고 서로 고집을 피우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심지어 왕마저도 말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동시에 모두 달려들어 아이의 팔다리를 각각 잡아당기는 바람에 사지가 갈기갈기 찢길 판이었다.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신통력을 부렸다. 백천 명의 화신이 되어 모든 궁녀가 두루 한 명씩 안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궁녀들은 좋아하며 각자 아이를 안고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진짜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며칠 후 왕이 아이를 찾았다. 그런데 궁녀 백천 인이 각각 한명씩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왕은 깜짝 놀라 말했다.
“같은 아이가 백천 명인데, 도대체 나는 누구를 데리고 왔는가?(此諸子等 都有百千 我將來者 爲復何是. 『보림전』 권5)”
화두가 될 만한 질문이 던져졌다. 모든 궁녀가 서로 “저요! 저요!”라고 손을 들면서 자기아이가 진짜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왕도 헷갈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진짜인 것일까? 어른머리로 헤아리면 해답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정답은 아이답게 지극히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동자의 화신(化身)은 궁궐의 백천 명 궁녀가 각각 안고 있지만 본래 몸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품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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