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다시 불러도 돌아오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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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9 월 [통권 제1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07회 / 댓글0건본문
신통제일 지공화상
세간에 ‘지공(地空) 거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된 어르신을 일컫는 말이다. 절집에는 지공(志公:寶誌, 寶志, 保志) 화상이 있다. 표기된 이름도 3종류이며 출신지도 금성(金城, 섬서성)과 금릉(金陵, 강소성) 두 곳이나 되는 등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가장 유명한 지공 화상은 양무제 당시의 지공 화상이다. 금릉보지(金陵寶誌 418~514) 화상은 『대승찬』을 지어 502년 황제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그 황제가 양무제인지도 애매하고 금릉보지공이 또 그 지공과 동일인물인지도 알쏭달쏭하다. 구전을 문자로 옮기다보니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영희와 철수가 어디 한 두 명인가? 특히 절집의 법명은 선호도가 높은 글자의 조합이므로 겹치기 일쑤이다. 어쨌거나 지공 화상은 『양고승전』 권1에 구체적 행장이 정리되어 있다.
그 지공 화상은 얼마나 유명했던지 고구려 어떤 왕이 그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 은으로 만든 모자를 바쳤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 전해 온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이름이 이미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해인사 창건설화에도 지공 화상은 등장한다.
해인사 자리를 점지하시다
중국 양무제 때 지공 화상은 임종시에 『동국답산기(東國踏山記)』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얼마 후에 신라에서 두 명승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
얼마 후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도착하자 반기면서 연유를 말하고 그 책을 건넸다. 두 스님은 감격하여 지공 화상의 탑묘를 찾아가 “사람에게는 고금이 있을지언정 진리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人有古今 法無遐邇).”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일주일 밤낮으로 기도하며 법문을 청했다. 그러자 탑에서 지공 화상이 모습을 나타내어 두 스님의 구도심을 찬탄하고 가사와 발우를 전하면서 말했다.
해인사 국사단에 지공증점지 편액이 보인다.
“너희 나라의 우두산(현재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곳에 대가람을 창건하거라.”
그 말을 마친 후 다시 탑묘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애장왕 3년(802) 임오년 10월 16일 가야산 해인사가 창건되었다. 사천왕문 바로 옆 국사단(局司壇)에는 ‘지공증점지(誌公曾點地: 일찍이 지공 화상께서 점지해준 자리)’ 편액을 달고서 해인사 창건설화를 역사적 사실화하고 있다.
양무제를 발심하게 하다
지공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다. 그래서 무제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고 여겨 스님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 있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하고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무제는 크게 놀랐다. 참회의 뜻으로 지공 화상을 정중하게 궁중에 모시고서 잔치를 베풀었다.
“스님! 몰랐습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라 대궐로 모시겠습니다. 궁중에 머물면서 법문을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후 지공 화상은 궁궐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또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스님이 살던 절에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다시 알아보니 그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양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임금 자리에 있는 40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다. 그리고 무제가 『금강경』강의를 듣고 싶어 할 때 부대사(傅大士 497~569)를 추천해주기도 했다.(『벽암록』67칙 ‘傅大士揮案’ 참조)
“내 탑이 무너지면 동시에 나라도 망할 것이다.”
지공 스님이 돌아가실 무렵 무제가 물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 때까지.”
지공 스님이 열반하신 이후 무제가 몸소 종림산에 가서 탑묘를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례를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환희했다.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를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목탑을 세우고자 발원하였다. 나무로 지은 탑이 완성될 무렵 갑자기 그 유언이 생각났다.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 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양나라가 망한다고 했었지. 과연 목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그리하여 다시 견고한 석탑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목탑을 헐기 시작할 무렵 후경(喉頸)이 쳐들어왔다. 급기야 양나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법”
선종의 최고저작으로 일컬어지는 『벽암록』의 제1칙 ‘달마불식(達摩不識)’ 공안에 지공 화상이 등장한다. 황제와 서로 코드가 맞지 않음을 확인한 달마 대사가 양자강을 건너 위(魏)땅으로 가버린 이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공이 무제에게 물었다.
“폐하! 달마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그는 관음 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사람입니다.(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이에 무제는 그 일을 후회하면서 다시 모시고자 마음을 고쳐먹으니 지공은 말렸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이 부른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버스 지나간 뒤 손을 흔들어봐야 소용없음을 일깨워 준 것이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보림전』에서 지공이 최초로 등장하다
무엇이건 최초 기록은 중요하다. 달마 대사를 ‘관음대사’라고 칭한 것은 『보림전』이 최초이다. 그리고 달마의 전기에 지공이 등장하는 것도 『보림전』 권8이 최초이다. 내용은 『벽암록』 1칙과 같다. 다만 최초 원문은 “그는 불심을 전한 대사이며 관음성인입니다.(此是傳佛心大士 乃觀音聖人乎)”라고 하여 『벽암록』과는 앞뒤로 문장배치를 달리하고 있다. 달마에게 파견하고자 했던 사신의 직위와 이름이 중사(中使) 조광문(趙光文)이라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또 머물렀던 절 이름을 고좌사(高座寺)라고 명시했다. 초기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성과 엄밀성을 갖추기 위하여 무척 고심한 흔적을 곳곳에 역력히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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