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왜 28명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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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3 년 9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16회 / 댓글0건본문
아름다운 포기로 우애를 살리다
고려 말 한강하류 지방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의좋은 형제가 함께 길을 걷다가 금덩이 두 개를 주웠다.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선 강을 건너야 했다. 나룻배를 탔다. 배가 강심(江心)을 지날 무렵이다. 물을 바라보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동생은 갑자기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뭔가 결심하듯 주섬주섬 봇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덩이를 끄집어내더니 냅다 강물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형은 깜짝 놀라면서 그 연유를 물었다.
“형이 없었으면 금덩이를 둘 다 차지했을 텐데…. 잠시 그 생각을 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 그랬습니다.”
그 말은 들은 형 역시 아우와 똑같은 욕심을 부린 것이 미안해서 이내 자기 몫의 금덩이마저 버렸다. 우연히 얻은 금이 필요이상의 욕심을 일으켰고 급기야 그것이 형제간의 인륜마저 저버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 결행한 아름다운 포기였다.
금을 버린 포구라는 의미의 ‘투금포(投金浦)’가 현재 경기도 김포의 옛 지명이라고 한다.
삼(麻)을 지고 가느라고 금을 버리다.
금을 과감하게 버린 결단은 때로는 지혜로운 삶을 상징한다. 하지만 반대로 금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를 비유할 때도 있다.
삼(麻)을 짊어지고 두 사람이 길을 달리하여 은산(銀山)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삼을 버리고 은을 가진다. 다른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이왕 삼을 지고 있다. 삼을 버리고 은을 가질 수는 없다.”
다시 이번에는 금산(金山)에 이르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은을 버리고 금을 가진다.
다른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 이왕 삼을 지고 있다. 삼을 버리고 금을 가질 수는 없다.”
- 『초기선종사Ⅱ』, p95, 김영사, 1990.
수 백리를 지고 온 삼이 너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탓에 결국 더 값어치가 있는 금을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담마기금(擔麻棄金)’의 출전은 초기선종 역사서인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다.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선생의 연구와 양기봉 씨의 한글번역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서천 28조의 계보가 완성되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는 가섭에서 달마에 이르는 서천 29조의 이름을 최초로 나열한 선종의 역사서이다. 그 근거는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에 등장한 9명과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의 24명 속에서 중복된 인물을 정리하여 29명을 추렸다. 『돈황본단경』은 『역대법보기』를 이어받아 제7조 미차가(彌遮迦)를 빼고 서천 28조설을 완성한다. 이후에도 28명의 이름은 다소 들쭉날쭉 하다가 『보림전』(801년)에 이르러 현재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28명의 명단을 완전히 확정지었다. 『조당집』(952년)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처님 이전의 ‘과거칠불’ 명호까지 더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완벽한 선종 계보를 완성한 것이다.
28명의 선택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부처님 열반이후 달마 대사 등장까지 천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달마 대사의 입적연도는 알 수 없다. 빠른 기록은 436년이며 가장 늦은 것은 528년이다. 『경덕전등록』은 495년에 입적했다고 기록했다. 출생년도는 더욱 오리무중이다.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346년생’으로 되어있다. 맞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기록은 기록이다. 애매한 것은 실낱같은 기록을 근거로 최저치로 계산해야만 한다. 따라서 부처님과 달마 대사 사이의 간격은 800년 정도로 산출할 수 있겠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28명 정도가 거쳐 갈만한 시간인 것이다. 어차피 이 계산법도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30 곱하기 28은?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840’이라는 숫자가 뜬다. 옳거니!
28명의 선정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800여 년 동안 하늘의 별처럼 명멸했던 숱한 성현들 가운데 가섭 존자를 필두로 ‘선종적 캐릭터’를 완벽하게 지닌 인물을 1차로 추렸을 것이다. 그 인물들을 망라하여 시대 순으로 다시 배열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도드라질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인물층이 두터운 시대는 대표선수를 고르느라고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것이다. 선지식들을 선종의 특징에 부합하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고르다보니 선명성과 정체성은 확실하게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불교전체 역사 속에서 볼 때 무명(無名)의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이건 좀 곤란했다. 뼈대 없는(?) 집안으로 비치는 것은 법통설 정립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무용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인선기준을 완화했다. 1차에서 탈락했던 아난, 마명, 용수, 세친 등을 다시 영입했다. 부처님 당시 아난 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 대승불교 각파의 조사들을 선종의 전법조사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선종을 중심으로 모든 종파를 포섭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
알고 보면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살다보면 우애 때문에 금을 버려야 할 경우도 있고, 삼(麻) 때문에 금을 버려야 할 상황도 만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애도 살리고, 삼도 버리지 않으면서, 금까지 손에 쥘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복잡한 셈법이다. 도를 닦는다고 할지라도 의식주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더불어 대중생활을 하면서 의리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선종사 편집자들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늘 고심했다. 우애가 필요할 부분에는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인정을 베풀었고, 옷이 필요한 자리에는 가차 없이 삼(麻)을 선택했으며,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할 때는 과감하게 금을 풀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5비구로 출발하여 1250명의 대중을 거느릴 때까지 당신은 늘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심정이셨다. 중국선종 역시 소수로 출발하여 주류가 될 때까지 그 지난(至難)함은 부처님 당시 인도종교계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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