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별어]
서안 초당사에서 『금강경』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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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11 월 [통권 제1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098회 / 댓글0건본문
구마라집 영정과 사리탑을 만나다
천 년 전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인물을 모셔놓은 사당을 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얼마나 실물에 근접한 얼굴일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린 상상화가 대부분인 까닭이다. 혹여 외형을 묘사하는 한 두 줄의 기록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나마 실마리라도 삼겠지만 대부분 ‘맨땅에 헤딩하듯’ 그렸을 것이다.
구마라집 진영
『금강경』6종류 번역본 가운데 압도적인 인기 1위 자리를 천년 이상 지켜온 베스트셀러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법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과연 언어학의 천재는 어떤 관상의 소유자였을까? 서안 초당사(草堂寺)에서 당신의 영정을 만났다. “외국어가 제일 쉬웠어요!” 라고 말하는 샤프하게 생긴 모범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서역인 특유의 짙은 수염에 까칠한 인상인지라 미심쩍음을 거둘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눈인사 후 고개를 숙였다.
정작 찐한 감동을 준 것은 혀(舌)를 모셨다는 그 사리탑이었다. 대면하는 순간 환희심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천천히 주위를 몇 번 돌았다. 돌이라기보다는 옥에 가깝다. 신장(위구르)지방에서 출토되는 여덟 가지 빛깔이 나는 돌이라고 했다. 그래서 팔보옥석탑(八寶玉石塔)으로 불린다. 표면에 새겨진 주인공 이름 네 글자가 진품임을 증명해 준다. 게다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형 부도 디자인이다.(물론 신라, 고려 부도들이 모방한 것이겠지만) 1700여 년 동안 거의 원형 그대로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기적 앞에 합장하고 또 합장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다
초당사의 원이름은 장안대사(長安大寺)였다. 당신이 장안에 처음 들어와 이 절 구석진 자리에 짚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소박한 초당(草堂)에 거주하면서 비롯된 이름이다. 경내의 서명각(西明閣) 소요원(逍遙園)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것은 ‘범어(梵語)·한어(漢語) 동시통역학과’에 입학하겠다는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든 이후 일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듯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 절의 주인노릇을 한 것이다. 변방의 이민족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과 물과 우유처럼 섞여 화합했다. 그는 겸손하고 섬세했으며 늘 초심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이 사찰은 ‘큰절〔大寺〕’이라는 화려한 본래명칭은 사라지고 그의 상징코드인 ‘초가집 절〔草堂寺〕’로 이름이 바뀌었다.(물론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벽돌기와집이다.) 여기서 402년 불후의 명작인 『금강경』번역작업을 마쳤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천재교육을 받다
당신의 어머니는 한 번 듣거나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영민한 여인이었다. 구마라집을 임신했을 때는 보통 여자들의 일반적인 입덧이 아니라 ‘기억력이 더 좋아지는’ 정신적 입덧을 했다고 한다. 신랑 복은 별로 없었다. 보상심리까지 겹쳐 아들교육에 전력투구했다. 모자(母子)는 인도와 중국의 교차지역인 쿠차(Kucha, 龜玆)에 거주한 덕분에 2개 국어는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다. 당시 문명의 통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신문물인 불교문화가 왕성하게 이동하던 시기였다. 모친의 감독아래 불경(佛經)까지 암기했다. 어린 그의 외국어 실력과 학업속도는 만만찮은 아이큐를 가진 그의 어머니조차 놀랄 정도였다. 두 사람은 함께 출가의 길을 걷는 도(道)의 반려자이기도 했다.
두 번의 전쟁 끝에 장안에 도착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천재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진다. 전진(前秦)왕 부견(符堅, 338~385)은 구마라집의 ‘두뇌획득’을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치고는 비교적 수준 있는(?) 전쟁인 셈이다. 위험부담이 덜한 스카웃 내지 납치의 방법도 있을 터인데, 굳이 전쟁을 선택한 것은 다른 꿍꿍이도 있었을 것이다. 현장 지휘관인 여광(呂光)은 정복의 전리품이 금은보화가 아닌 ‘별 볼일 없는 승려’라는 사실을 알고 적이 실망했다. 귀국도중 본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할 수 없이 고장(姑藏) 지방에 터를 잡고 후량(後凉)을 건국했지만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늘 불안정한 체제였다. 이런 ‘생고생’이 포로인 구마라집 때문이라고 여긴 그는 화풀이 하듯 스님을 엄청 구박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와 집단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얼마 후 후진(後秦)왕 요흥(姚興, 366~416)은 후량을 평정하였고, 정중하게 구마라집을 장안(長安)으로 모셨다. 살아있는 육신사리(肉身舍利, 구마라집)를 얻고자 두 번씩 전쟁까지 치른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어쨌거나 자기를 알아주는 나라에 귀화한 후 보은의 뜻으로 ‘요진(姚秦) 삼장법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국가는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국명을『금강경』첫 페이지에 남겨 현재도 수억 명의 ‘독송 팬’들이 그 나라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아난 존자, 사리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다
구마라집 법사는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라는 절대 자신감을 반영한 유언을 남겼다. 말씀대로 다비식 이후 오직 혀만이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혀사리(舌舍利)인 셈이다. 많은 사리탑이 현존하지만 혀사리탑은 초당사가 유일할 것이다. 생존 시에는 두 번의 전쟁원인 제공자였지만 죽은 후에는 다행히도 사리 때문에 세 번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마라집 혀 사리탑
알고 보면 사리의 분쟁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붓다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인근 8개 부족국가는 전쟁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을 연출했다. 극적인 타협을 통해 사리를 8등분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면서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긴 했다. 그런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 본 아난 존자는 ‘당신의 사리 때문에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부족 간의 전쟁을 염려하여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갠지스강 한가운데서 열반하여 사리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았다(我若向一國而趣涅槃者 諸國持兵而諍舍利 殘害他... 可於䲮伽中流而般涅槃 令無爭競)’(『보림전』 권2)고 전한다.
혀사리탑은 본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법사리(法舍利)인『금강경』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분신(分身)을 거듭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속에는 사리탑을 조각하듯『금강경』을 목판에 새겨 법사리로 모셨다. “법을 보는 자 나(붓다)를 보리라.”고 하셨으니,『 금강경』을 보는 자 역시 구마라집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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